신사도운동의 비판 (요엘의 군대, 중보기도, 신부운동)
이인규
(에스더기도운동본부의 포스터)
1. 요엘의 군대
IHOP과 같은 곳에서는 성도들이 ‘요엘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요엘의 군대’(Joel’s Army)를 ‘Jesus Army’라고도 부르며, ‘왕의 군대’, 혹은 ‘주의 군대’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에스더기도운동(이용희)같은 곳에서 요엘의 군대를 강조하다가 문제가 되자 슬그머니 Jesus Army로 용어를 바꾸어 버렸다.
물론 찬송가에 있듯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 군병’이 되자고 하는 것까지 비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영적싸움에서 승리하자는 의미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을 군사로 비유한 몇몇 구절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딤후 2:3-4, 빌 2:25, 몬 1:1)
그러나 신사도운동과 유사단체들이 주장하는 ‘요엘의 군대’는 그러한 상식적이며 보편적인 의미와 전혀 다르다. 이미 몇가지의 예를 든 것과 같이 신사도운동과 IHOP과 같은 유사단체들은 요엘서를 아주 중요한 예언서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요엘서의 예언이 그들에게 종말적으로 성취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욜 2:11)
본문만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군대의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므로 ‘하나님의 군대’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엘서를 잘 살펴보면 그 군대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한 이방민족의 군대이며, 정반대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1) 요엘의 군대는 이방인들의 군대
요엘의 군대는 성도들이 참여할 군하나님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심판적인 재앙을 가져오는 이방인들의 군대이다.
“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욜 1:6)
본문에서 ‘이족’(異族)을 공동번역은 ‘외국군대’로 번역하였으며, 다른 번역성경들은 ‘메뚜기 군대’로 반역하였으며, 영어성경은 ‘a nation’(한 국가)로 번역하였다.
요엘서에서 메뚜기로 비유된 이방군대를 언급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출애굽기의 메뚜기 재앙을 기억하게 함으로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며, 심판의 상징으로 비유된 것이다. 그런데 신사도운동은 우리에게 메뚜기로 비유된 이방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엘서의 이방군대는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2:20) 그러한 성경적인 사례는 예레미야서의 ‘느부갓네살’(렘 25:9)과 이사야서의 ‘고레스’(사 44:28, 사 45:1)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5:9)
그 증거로서,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그 메뚜기 군대를 쫓아내겠다는 욜 2:18-20의 본문을 살펴보면 그 군대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앞의 부대는 동해로, 그 뒤의 부대는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욜 2:18-20)
욜 2:20은 출 10:19를 반영한 것이며, 이스라엘을 공격하던 적의 부대를 메
뚜기로 비유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돌이켜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넣으시니 애굽 온 땅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아니하니라” (출 10:1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북쪽에 있는 군대는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고, 앞의 부대를 동해로, 뒤의 부대를 서해 바다로 넣으신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들이 그 군대가 되어 쫓겨나거나 동해와 서해로 들어가는 것이 옳은가?
2) 요엘서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
물론 요엘서의 멧세지를 이스라엘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요엘의 군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요엘의 군대라고 불리는 이방민족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심판을 받기 전에 하나님에게로 돌이켜 회개하라는 내용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욜 2:12-13)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욜 2:32)
3) 요엘의 군대는 일차적으로 앗수르와 바벨론
요엘서가 기록한 당시는 BC 830년경으로 보며,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은 BC 722년에는 앗수르에 의하여, BC 586년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인 성취는 이루어졌다. 과연 우리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여야 하는가?
4) 계시록 9장과 요엘서를 비교하라
사도요한은 계시록 9장의 본문을 기록하면서 구약의 요엘서를 반영하였다. 과연 계시록 9장의 메뚜기와 같은 군대는 누구인가?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계 9:7-11)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욜 1:6)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욜 2:4-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욜 2:25)
요엘의 성경말씀이 전하는 멧세지는 우리가 요엘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메뚜기로 비유된 이방 군대에게 멸망당하지 않도록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것과 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주장과 같이 우리가 요엘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주장이 된다.
그러나 일부 신사도운동 인사들은 기독교를 사단과 동일시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요엘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무엇일까? 심지어 어느 신사도운동 인사는 종말적으로 최후의 전쟁을 해야 할 상대가 기독교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방문한 피터 와그너는 기독교를 종교의 영, 사단의 개라고 비난한다.
2. 중보기도
필자는 그동안 신사도운동이 사용하는 용어들이(24/7 기도, 요엘의 군대, 다윗의 장막, 늦은비, 대부흥, 대추수등) 대부분 성경과 다른 내용이라는 것을 언급하였다. 그들은 비록 기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와 사상은 전혀 다르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이단들이 하는 것과 같이, 그들은 비성경적인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성경에 짜맞추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사도운동에 주장하는 ‘중보기도’라는 용어에 대해서 살펴보자.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사실 성경에 없다. 그러나 그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남을 위하여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볼 때에 필자는 (비록 중보라는 용어가 적절치 않다고 하여도) 중보기도를 부정하거나 비판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최근에 신사도운동이 사용하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아주 잘못된 용어이며, 비성경적인 내용이다.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는 다음과 같다.
1)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는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는 주장이다
2) 중보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사라고 주장한다
3) 중보기도가 영적전쟁이라고 주장한다
4) 중보기도는 비밀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중보기도가 예언기도라고 주장한다
(1)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와 중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했던 이유는 그 죄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선지자, 사사, 제사장등 중보자가 있었다. 물론 ‘중보기도’와 ‘중보자’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러나 신사도운동에서는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는 증거로 신약성경을 전혀 인용하지 못하며, 구약성경구절만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 중보자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주장한다.
– 오늘의 중보자들이 증거하듯이 중보사역의 가장 큰 상급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중보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선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피터와그너, 방패기도, 30쪽)
– 오늘의 중보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충성스러운 중보사역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지 않으실 때가 많은 것이다.(피터와그너, 방패기도, 31쪽)
물론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중보자가 필요하였으며, 그 중보자들이 곧 제사장이었으며, 선지자였으며, 사사와 예언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중재하는 중보자였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32:30-34)
이사야 역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하는 중보자로서의 사명을 요청하였다(사6장) 구약의 선지자와 사사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사여 선지자는 중보자로서 파송되는 역할을 담당하기 위하여 숯불로 입술을 지지는 정화적인 절차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 6:8)
그러나 신사도운동은 왜 중보자가 예수 한 분이라는 신약성경을 인용하지 않으며,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휘장이 찢어진 사건과 그 피로 인하여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 10:19-20)
예수가 중보자가 되시므로 이제는 구약시대의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모세의 중보자적 사명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까지로 제한된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요1:17, 갈3:19-20)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 3:19)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를 세워 당신의 멧세지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신약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한사람이며 곧 예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는 신사도운동의 주장은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심을 부정하는 내용으로서 구원론에서 심각한 오류가 된다. 그 내용이 바로 히브리서 1:1-2가 되는데,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자신의 멧세지를 전하셨지만 신약시대의 마지막에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며, 그 말씀이 곧 ‘성경의 최종적 성취’의 근거가 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 1:1-2)
(2) 중보기도가 은사라는 주장
피터와그너는 중보기도가 은사라고 한다. 그러한 주장이 옳다면 누구든지 중보기도를 할 수 없고, 중보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중보기도가 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더욱이 그러한 은사는 나타남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 어쨌든 나의 은사 목록은 지금까지 살펴본 25가지의 은사에 두가지 은사를 더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그 두가지는 귀신을 쫓는 은사와 중보기도의 은사이다. 이 두가지를 첨가한 이유는 그 은사의 나타남을 통해 결정한 것이다(피터와그너, 방패기도, 50쪽)
은사라는 것은 공동체인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각 지체에게 나누어 주는 성령의 선물이다. 중보기도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피터 와그너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결국 자기들을 예수님과 함께 중보자로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3) 중보기도가 영적전쟁이라는 주장
과연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영적인 전쟁인가? 그의 책 <방패기도 38-39쪽>에 의하면 제인이라는 사람이 밤에 잘 때에 가위에 눌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가위에 눌리기도 한다. 그러나 와그너는 이것을 흑암의 세력과 싸운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신디제이콥스가 제인에게 전화를 하여 “어젯밤에 당신의 방에서 흑암의 세력을 보았고 함께 중보기도를 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인사들은 기록된 성경의 내용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을 통하여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피터 와그너는 한 개인이 가위가 눌렸던 것을 증거로 중보기도가 영적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 나는 에드윈 스투브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한다. “중보기도는 전쟁이다. 그리고 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는 원칙이 있다. 영적전쟁은 먼저 기도로 이기고 그 다음에는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피터와그너, 방패기도, 39쪽)
이러한 주장은 신사도운동에서 영적전쟁을 대신 수행하여 줄 수 있는 존재가 소위 자칭 사도와 선지자라고 부르는 중보자 몇몇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사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4) 중보기도는 비밀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주장
사도라고 불리는 자들의 비성경적이며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여 새로운 이론이 추가되고, 만들어진다. 중보기도는 비밀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해괴망칙한 주장을 하는데 이것 역시 몇몇 소수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는 것을 만들기 위함이다.
– 비밀을 유지하는 은밀함 : 신디 제이콥스는 개인 중보기도자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두 번째 조건이 비밀을 유지하는 은밀함이라고 말한다. 내가 처음 중보기도 동역자로 짝을 맺은 사람들은 대개가 나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오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바비 벌리와 처음 중보기도를 하게된 때를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바비는 우리가 서로 나눈 기도 제목들을 극비로 할 것을 거듭해서 내게 부탁했다. 바비는 개인 기도제목을 비밀로 유지하지 않아서 결국 구설수에 오르고 중보기도도 동역자 개인과 사역에 악영향을 끼쳤던 경우를 알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약속을 이행했다….. 더불어 우리가 알게된 사실은 중요한 서류를 은행개인 보관함에 맡겨 놓은 것 만큼이나 중보기도를 의한 정보를 나누는 일이 비밀리에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밀은 목사나 지도자가 위급시 긴밀한 기도를 필요로 할 때에 한해서 누설할 수 있는 것이다.(피터와그너, 방패기도, 210-211쪽)
중보기도를 비밀로 하여야 한다는 이러한 주장은 성경과 전혀 다르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교회는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그 중보기도의 내용이 서로에게 비밀이었던가?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행 12:5)
성경을 보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는 기도가 비밀유지를 하면서 행하여졌다는 언급이 없다. 사도바울은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공개적으로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한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히 13:18-19)
또한 야고보서는 서로 공개적으로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약 5:16)
성경은 서로 비밀유지를 하면서 기도를 하라고 언급하지 않으며 합심하여 기도를 하라고 말하고 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19)
5) 중보기도가 예언이라는 주장
중보기도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잇는 것이 아니며, 은사도 아니고 능력도 전쟁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중보기도는 예언기도도 아니다.
– 모든 중보 기도자들은 보통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지만, 때때로 예언적인 중보기도를 하기도 한다. 일부 중보기도자들에게 있어서 예언적 중보기도는 그들이 은사로 받은 중보기도 사역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피터와그너, 방패기도, 203쪽)
–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손드라 존슨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보기도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대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적 기도를 하는 대부분의 중보기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어떠한 일의 결과를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피터와그너, 방패기도, 204-205쪽)
(에스더기도운동 이용희의 군화를 신은 신부)
3. 신부운동
신사도운동과 그 유사단체들은 유난히 ‘신부’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심지어 어느 단체가 ‘신부’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면 그들이 신사도운동과 관련된 단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신부운동’이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사용하는 ‘신부운동’이라는 용어가 과연 일반적인 기독교의 용어와 같을까?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용어는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
반면에 신사도운동과 그 유사단체들이 주장하는 ‘신부’라는 용어의 개념은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나타난다. 마이크 비클은 열처녀 모두가 그리스도인인데, 그 중의 다섯은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은 기름부음을 받아서 성령체험을 한 신사도운동의 교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열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들러리를 말한다. 열처녀의 비유에서 본문의 초점은 ‘기름’이 무엇인가, 혹은 ‘신부’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들러리인 열처녀는 모두 졸았으며, 신랑이 늦게 왔기 때문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처녀는 그 기름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성령을 받을 때에 ‘부족한 량의 성령’을 받는 사람은 없으며, 또 여분의 성령을 준비할 수도 없고, 모자라는 성령을 다른 곳에서 살 수도 없다.
열처녀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이며,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멧세지는 “언제 오실 지 모르는 예수의 재림을 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1-13)
신부운동을 주장하는 단체를 살펴보면, 몇가지의 위험한 주장을 발견할 수 있다.
1) 혼인잔치를 임박한 시한부종말론으로 해석한다.
2) 모든 거듭난 기독교인을 신부라고 해석하는 것을 부정한다.
3) 신사도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배타적이며 제한적인 의미의 운동(movement)을 강조하려고 한다.
4) 신부운동을 신비적인 연합적 개념으로 해석한다. 이런 연합을 한 몸이 된다는 성적이며 관능적인 결합으로 비유하며, 특히 그들은 아가서를 풍유적으로 해석하여 신부라는 용어를 자신들에게만 적용시킨다.
성경에서 어린양의 신부는 무엇을 말할까?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교회를 ‘아내’로 비유하여,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비유하였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성도들을 처녀로, 남편을 그리스도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특히 남편과 아내에 대한 비유는 신약에서만 표현된 내용이 아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을 남편,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유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사54: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5)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 즉 에클레시아(교회)가 곧 ‘신부’로 표현한 것이며, 그래서 성경은 변절자나 배교자를 간음으로 비유하기도 한다(렘3:1-2, 호1:2). 성경은 이스라엘을 아이를 낳지 못하고 가정을 잃어버린 비참한 여자로 비유하기도 하며, 남편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다시 영화롭게 만들어준다는 비유도 표현한다(사54:1-3, 겔16:8-14).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신부라는 개념의 정체가 무엇일까?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 백과사전’은 신사도운동의 원조격이 되는 늦은비 운동의 윌리엄 브랜넘의 새로운 계시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브는 뱀과 성적관계를 맺는 죄악도 저질렀다. 어떤 사람은 뱀의 씨앗에서 출생하여 지옥에 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이 운명이 영원하지는 않다. 하나님의 씨앗, 즉 브란함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신사도운동이 사용하는 ‘신부운동’이라는 용어는 늦은비 운동 브랜넘의 주장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 소위 하나님의 씨앗들이 되는 ‘단체 그리스도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그것을 ‘신부운동’이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원조인 ‘늦은비 운동’이 브랜넘의 죽음으로 와해되자, 마이크 비클, 밥 존스, 폴케인이 연합하여 캔서스시티예언자그룹(KCF)을 만들게 된다. 그 캔자스시티예언자그룹에서 마이크 비클과 밥 존스 등의 거짓 선지자들이 나눈 대화가 기록된 ‘어니 그루웬 레포트‘에서 ‘씨앗 세대’에 대한 주장이 들어있다. 그들은 ‘선택된 이 씨앗 세대’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그들은 ’집단 그리스도‘라고도 부르며 이것이 곧 ‘요엘의 군대’이며, 곧 ‘지저스아미’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신사도운동과 아이합이 말하는 요엘의 군대와 신부운동의 유래이며 정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