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교 조사심판 교리비판 및 반증(정운기 목사)

  • 6월 16, 2016

                                         안식교 조사심판 교리 비판 및 반증

                                                                                                                정운기 목사 / 예하성 이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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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안식교)의 출발에 관해서 2011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발간한 <종합이단사이비연구보고집>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식교는 1844 10 22일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윌리암 밀러의 소위 시한부종말론에서부터 그 뿌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불발로 끝난 윌리엄 밀러의 시한부 종말론을 추종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엘렌 지 화이트가 계시를 받아 밀러의 시한부 종말론을 나름대로 재해석함으로 생겨난 종파가 모여서 소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Seventh day Adventists)가 만들어졌다.”(p.150)

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안식교에서 1844년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844년이란 다니엘서 8장의 2300주야에 대한 예언의 계산에 의해 나온 결과로 안식교는 이러한 계산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엘렌 지 화이트의 계시를 따라 조사심판이라는 교리를 만들어낸다. 조사심판 교리는 안식교를 특징짓는 교리 중의 하나이면서 성경 해석상에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교리이다.

조사심판이란 교리가 나온 배경에 대한 안식교의 설명을 살펴보자.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1844년에 오실 것으로 기대했던 자들의 실망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올 것으로 바라보던 자들의 실망보다 훨씬 더 아픈 것이었다. 실망의 결과로 많은 사람은 예언의 연구를 포기하거나 이런 결론에 이르게 한 역사주의적 예언 해석 방법에서 돌아섰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많은 기도와 열성으로 이 예언과 성소 문제를 계속 연구하고,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심을 끊임없이 바라보았다. 그들의 연구는 그분의 그 같은 봉사에 대한 풍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음으로 보상을 받았다. 그들은 초기 교회와 종교 개혁 당시의 예언적 신앙이 여전히 효력이 있음을 발견했다. 예언적 시간 계산은 정말로 옳았다. 2300년은 1844년에 끝났다. 그들의 실수와 그 당시의 모든 해석자의 실수는 그 예언 기간의 끝에 일어날 사건에 관한 오해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소 봉사에서 오는 새 빛은 그들의 실망을 희망과 기쁨으로 바꾸었다. 성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그들이 연구함에 따라, 1844년에 그리스도께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 앞으로 나아오셔서 하늘 성소에서의 그분의 대제사장 봉사의 마지막 부분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봉사는 다니엘 7장이 재림 전 조사 심판으로 묘사하는 대속죄일의 성소 정결의 원형이었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441)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교리중에 조사심판 교리 외에 정통교회의 주장과는 다른 교리를 들자면 토요일 안식일 교리 영혼 멸절 영원 지옥 부재 교리 등이 있고, ‘엘렌 지 화이트가 받았다는 계시를 중요시 여기는 점은 성경 외의 다른 계시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필자는 본 글을 통해서 안식교의 조사심판 교리가 왜 비성경적인 이단교리인가를 분석하며 비판하고 반증해 보고자 한다.

1. 예수님이 1844년에 하늘 성소에서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셨는가?

안식교의 조사심판이란 다니엘서 8:14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는 구절을 근거해서 만들어진 교리이다. 이 구절은 윌리엄 밀러에 의해 주전 457년을 기산점으로해서 2300년 후인 주후 1844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임을 주장했으나 예수님의 재림이 실현되지 않자 그 예언을 믿고 그 날을 기다렸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엘렌 지 화이트에 의해서 조사심판이란 교리로 다시 재해석이 된 교리이다. ‘조사심판 이란 예수님이 1844년에 하늘의 성소에서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셔서 조사심판을 통해 하늘 성소를 정결케 함으로 속죄 사업의 마무리를 하고 계시며, 예수님의 재림시에 누가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지 누가 승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조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안식교의 주장

먼저 안식교의 주장을 살펴보자.

이리하여 예언의 말씀에서 비치는 빛을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23백주야의 끝인 1844년에 이 세상에 강림하시는 대신에 속죄 사업의 마무리를 행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있는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엘렌 G. 화잇, <살아남는 이들>, 시조사, 1996, 348)

하늘에는 성소, 곧 여호와께서 지으시고 사람이 짓지 아니한 참장막이 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봉사하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번에 드리신 당신의 속죄의 희생의 은혜가 믿는 자들에게 효력을 나타내게 하신다. 그분은 승천하시자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시고 중보의 봉사를 시작하셨다. 그분은 2300주야의 예언 기간의 끝인 1844년에, 그분의 속죄 봉사의 두 번째요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셨다. 그것은 모든 죄의 최종적 처리에 해당되는 조사심판의 사업이며, 고대 히브리 성소가 대속죄일에 정결케 되는 의식으로 예표되었던 것이다. 이 예표로서의 의식에서는 동물의 희생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성소가 정결케 되었지만, 하늘의 것은 예수님의 피의 완전한 희생으로 정결케 된다. 조사심판은, 죽은 자들 중에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가를 하늘의 주민들에게 계시해 준다. 그것은 또한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고 있고 그러므로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도록 승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분명히 알려 준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427)

이와 같이 품성을 검사하는 일, 곧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는지 결정하는 것이 곧 조사 심판이요, 하늘 성소에서 하는 마지막 사업이다.”(엘렌 G. 화잇, <각 시대의 대쟁투>, 시조사, 1999, 103)

조사 심판과 죄의 도말은 주님의 재림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죽은 자들은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아야 하므로 그들의 사건이 심리(審理)되는 조사 심판이 마치기 전에는 그들의 죄가 도말될 수 없다. … 심판을 위해 정해진 때, 2300주야가 마치는 1844년에 조사 심판과 죄를 도말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온 모든 사람은 다 이 엄숙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다 같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위의 책, 153-154)

비판 및 반증

위의 안식교의 주장에 대해 비판하고 반증을 해보자.

안식교에서는 예수님이 1844년에 지성소에 들어가셨다고 주장하나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지성소에 들어가셨음을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는데, 공동번역성경에는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이 들어가신 곳이 지성소임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히브리서 10:10-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죄사함) 사역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단번에 이루어졌고 완전하고도 영원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1844년 이후로 계속해서 하늘 지성소에서 속죄 사업의 마무리를 하고 계신다는 안식교의 주장은 비성경적인 주장인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10:19-20을 공동번역성경으로 보면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는 마음놓고 지성소에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입니다.”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15:38)으로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없어졌다. 그러니 신약에 들어와서 참 것의 그림자’(9:24)인 지상 성소의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없어졌듯이 하늘에도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사도 요한이 하늘 보좌를 보고 기록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고(4:5), 제단이 있고 금향로가 있는 것(8:3) 등을 보는데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예수님이 1844년에 하늘 성소에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다는 안식교의 주장은 자의적 해석에 의한 잘못된 주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의 날짜 계산이 옳고 그른 지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고 위의 사실들만 보더라도 조사심판 교리는 엘렌 G. 화잇의 거짓 계시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교리임이 분명하다

2. 품성이 구원의 조건이나 보증이 될 수 있는가?

안식교는 조사심판을 통해서 성도들의 품성을 조사해서 예수님의 재림 때에 누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임이 결정된다고 한다. 안식교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소멸되고 그 몸은 잠자는 상태로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조사심판에서 품성이 인정된 사람은 부활하게 되고 죽지 않은 사람 중에 품성이 인정된 사람은 승천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 땅에서 아무리 구원을 받은 자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자라도 조사심판에서 품성이 인정되어야 최종적인 구원이 결정이 되니 안식교에서는 품성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안식교의 주장

안식교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관대한 복음의 초청에 응한 혼인 잔치의 손님들의 비유를 통하여 이 심판을 묘사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택하는 사람 모두가 진실한 제자는 아니기 때문에 임금은 손님을 살펴보고 누가 혼인 예복을 입었는지 살피러 나온다. 이 예복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이 소유하게 될 순결하고 흠없는 품성이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443)

결혼 예복의 비유에서, 자신의 옷을 입은 채로 도착한 그 하객이 쫓겨난 것은 불신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수락했다( 22:10). 그러나 그가 온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 예복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왕 앞에 나설 수 있게 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 그분의 의로운 품성 또한 필요하다. 죄인들로서 우리는 빚을 탕감받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은행 계정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 이상이 필요된다. 우리는 왕의 가족으로 입양될 필요가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중보 봉사는 용서와 옷입힘이라는 이중의 목적이 있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157)

이와 같이 품성을 검사하는 일, 곧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는지 결정하는 것이 곧 조사 심판이요, 하늘 성소에서 하는 마지막 사업이다.”(엘렌 G. 화잇, <각 시대의 대쟁투>, 시조사, 1999, 103)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기록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룩한 생애를 살 능력을 받는다. 그의 안에 거함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고 현재와 심판 때에 구원에 대한 보증을 얻는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163)

구원과 관련된 안식교의 주장들을 종합해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안식교에서의 구원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둘째, 재림 때의 구원을 받는 조건은 품성이 되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에 대한 보증이 된다고 한다.
셋째, 22장의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의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로운 품성을 가져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비판 및 반증

이러한 안식교의 주장이 왜 비성경적인 주장인지를 밝히고 반증해 보고자 한다.

첫째, 성도의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때에 결정나는 것이다(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성도는 구원받은 상태로 살다가 죽으면 죽는 순간에 거지 나사로처럼 천사들에게 그 영혼이 받들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16:22). 그리고 살아있는 상태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게 되면 변화되어(고전15:52)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져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살전4:17).

둘째, 품성이 구원을 받는 조건이나 보증이 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16:31)에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1:17)를 통해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 주셨기에 구속(죄 사함)의 은혜로 얻는 것이다(3:22-26). 그러니 품성은 구원을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이지 구원을 받는 조건이 될 수 없다(5:22-23, 벧후1:3-8). 또한 에베소서 1:13-14에 보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이 구원을 받은 보증이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에 대한 보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셋째, 마태복음 22:1-14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 그리스도의 의로운 품성을 가져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22 혼인 잔치 비유에 대한 해석은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은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입은 사람은 적으며, 청함을 받은 사람 중에 택함을 받은 사람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혼인 잔치에 참석은 했으나 예복을 입지 않아 쫒겨난 사람은 청함을 받고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며, 이 사람 역시 택함을 입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은 일관되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말하고 있기에 이 비유에서 예복 그리스도의 의로운 품성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1:4)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속의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받아 구원을 얻은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지 조사심판에서 주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품성을 가져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안식교의 주장은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다른 복음인 것이다.

3. 7장과 단8장의 작은 뿔이 동일한 존재인가?

안식교의 주장

다니엘서 8장에 대한 안식교의 해석을 살펴보자.

다니엘 8장은, 선악의 대쟁투와 하나님의 마지막 승리에 관하여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 장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봉사의 시작과 하늘 성소의 정결 사이에서, 하나님 지상 세력이 그리스도의 봉사를 방해할 것을 알려 준다. 이 이상에 나타난 수양은 메대 바사(Medo-Persia)제국을 나타냈고(8:2), 그 두 뿔 중에 나중에 나온 뿔이 더 큰 것은 분명히 그 제국의 두 국면을 묘사하는데, 그 나라의 더욱 우세한 왕조인 바사가 나중에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다니엘이 묘사한 바와 같이, 이 동방의 왕국은 그 세력을,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향하여’(8:4) 크게 확장하였다.
서편에서부터 오는 숫염소는 헬라를 표상했고, 그 큰 뿔은 첫째 왕 알렉산더 대왕을 나타냈다(8:21). 서편에서 온 알렉산더는 신속히 바사(Persia)를 정복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몇 년 후에 그의 왕국은 카산더(Cassander), 리시마쿠스(Lysimachus), 셀류쿠스(Seleucus), 프톨레미(Ptolemy) 네 나라로 분열되었다(8:8,22). ‘이 네 나라 마지막 때에’(8:23), 다른 말로 하면 분열된 헬라 제국의 마지막 때에 작은 뿔 하나가’(8:9) 일어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전 2세기에 짧은 기간 팔레스틴을 지배한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언의 이 부분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많은 개혁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이 작은 뿔을 이교 로마와 법왕 로마를 막론한 로마로 규명했다. 이 후자의 해석이, 다니엘이 자세히 설명한 바와 꼭 맞으며, 전자의 해석은 부합되지 않는다. … 다니엘 2,7,8장의 예언들은 서로 일치한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437-438)

다니엘의 이상은, 그리스도께서 대속죄일 의식의 원형(原型)에 해당하는 봉사, 곧 조사 심판과(7) 성전의 정결 사업을 언제 시작하실지를 명시했다.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8:14). 이 이상은 마지막 때에 관한 것이므로 여기에 말하는 성소는 지상의 성소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며 지상 성소는 주후 70년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하늘에 있는 새 언약의 성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봉사하시는 장소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p.439)

비판 및 반증

그러면 이제 안식교의 성경 해석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안식교는 다니엘서 2장과 7장과 8장의 예언을 일치되는 예언으로 해석하여 단7장에 나타나는 작은 뿔’(7:8)과 단8장의 작은 뿔’(8:9)을 동일한 존재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 이 점에서 성경 해석에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2장의 신상의 해석에서 나오는 네 나라와 단7장의 네 짐승의 해석에서 나오는 네 나라를 바벨론 나라부터 시작하여 땅에서 이어서 일어날 네 나라를 예언한 것이라는 해석은 옳은 해석이나 단7장과 단8장의 작은 뿔을 같은 존재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니엘서8:20-21에서 수양이 메대와 바사 왕들이고, 수염소가 헬라 왕이요, 수염소의 두 눈 사이의 큰 뿔은 첫째 왕이라고 했으니, 첫째 왕은 헬라 제국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이고, 큰 뿔이 꺾인 후에 나온 네 뿔은 알렉산더 사후에 분열된 네 나라이다. 여기까지는 정통 교회의 해석과 다를 바가 없는데 단8:8-9에 나오는 작은 뿔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다니엘서8:8-9 수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 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편과 동편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라고 기록이 되어있는데 작은 뿔 네 뿔 중의 한 뿔에서 났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이 작은 뿔은 네 왕의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의 왕조에서 일어날 한 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렇기 때문에 단8:13-14 성소가 짓밟히고,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는 예언은 시대적으로 볼 때 헬라제국 시대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아야한다. 외경인 마카베오상에 보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왕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진 역사적 사실이 기록이 되어 있다(마카베오상1). ‘안티오쿠스(4) 에피파네스에 의해 예루살렘성전에는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이 제물로 드려지고 가증스런 우상이 세워지는 것으로 성전이 더럽혀졌다가 마카비(마카베오)혁명에 의해 정결케 되었는데 단8:14 이천 삼백 주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예루살렘성전이 짓밟히기 시작한 때부터 성전이 다시 정결케 되어진 때까지의 기간을 예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유대인들이 지켰던 수전절’(10:22)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7장의 작은 뿔과 단8장의 작은 뿔이 다른 존재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7장의 작은 뿔 땅의 네째 나라’(7:23,2:40)인 바벨론, 메데파사, 헬라 다음의 로마제국에서 일어날 열 왕’(7:24)의 때에 일어날 어떤 왕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네째 나라 다음에 일어날 단7장의 작은 뿔과 셋째 나라인 헬라 제국에서 일어날 단8장의 작은 뿔은 시대적으로 완전히 다른 시대에 일어날 왕이고, 7장의 작은 뿔 넷째 짐승의 머리(7:20)에서 나오는 반면에 단8장의 작은 뿔은 뿔(8:9)에서 나오기 때문에 결코 같은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8:23)에 대한 원어는 아하리트 마지막 부분, , 결말, 마지막 때, 미래, 후대의 의미를 가지는데(바이블렉스 원어사전), 8:23에서의 마지막 때에 후대의 의미로 해석을 하여 작은 뿔’(8:9)은 헬라제국의 분열된 네 왕의 나라 중 셀류쿠스 왕조의 후대에 일어날 한 왕인 안티오쿠스(4) 에피파네스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단8장의 작은 뿔과 단7장의 작은 뿔을 동일한 존재로 해석하는 안식교의 성경해석에는 큰 오류가 있으며 이러한 오류를 바탕으로 자의적인 성경해석에 의해 만들어진 조사심판 교리는 비성경적인 거짓된 교리인 것이다.

4. 예언 상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해석인가?

안식교의 조사심판 교리는 윌리엄 밀러의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고자 하는 연구에서 출발했다. 윌리엄 밀러가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을 1844 10 22일이라고 한 것은 다니엘서 8:14절의 이천 삼백 주야 2300일로 보고 그 2300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주전457년에서 2300년을 더하여 주후1844년이 나왔고, 그 해의 대속죄일인 10 22일을 예수님이 재림의 날로 계산을 한 것이다.

안식교의 주장

이러한 밀러의 예수 재림의 날짜 계산에 관한 안식교의 주장을 살펴보자.

재림의 시기를 가장 분명히 계시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예언은 다니엘서 8 14절이었다.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밀러는 성경 말씀 자체가 해석해 주는 법칙에 의하여, 예언상 하루는 1년을 상징(象徵)하는 것임을 알았다(14:34; 4:6 참조). 그는 또한 2300, 곧 실제적인 2300년이 유대인의 시대를 훨씬 지나는 것이므로 그것이 그 기간의 성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밀러는 그리스도교 시대에서 이 세상이 성소라는 일반적인 견해를 받아들임으로 다니엘서 8 14절에 예언된 성소의 정결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 지구가 불로 정결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2300일의 정확한 기산점만 발견한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쉽게 확정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엘렌 G. 화잇, <각 시대의 대쟁투>, 시조사, 1999, 12-13)

“2300, 혹은 이천삼백주야는 히브리 원어상으로 볼 때 무엇을 말하는가? 창세기 1장에 따르면 주야는 하루이다. 본서 4장과 13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징적 예언의 기간은 역시 상징적이다. 즉 예언상 하루는 1년이다. 그러므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믿어온 바와 같이, 다니엘 8장의 2300일은 2300년에 해당된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439)

비판 및 반증

본 글에서는 위의 안식교의 날짜 계산의 비성경적인 부분과 오류를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해 보고자.

첫째는,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예언상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해석법인가? 하는 점이다.

첫째,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행전 1:6-7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는 말씀들을 볼 때 재림의 시기를 알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요 재림의 날과 때를 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예언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해석하는 점에 대해서 안식교에서는 민수기 14:34과 에스겔 4:6을 근거로 들고 있다. 민수기 14:34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찌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불신앙함으로 징계받는 내용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열 두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탐지한 기간인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년을 광야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이 예언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계산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십일을 사십년으로 환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계를 받는 기간이 사십년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 4:4-6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찌니라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 구십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일로 정하였나니 일일이 일년이니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범죄한 햇수의 일년을 하루로 환산하여 에스겔이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여 삼백 구십일을 우편으로 눕고 그런 다음에는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여 사십일을 좌편으로 누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이러한 상징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죄에 대해선 반드시 징벌하심을 알게 하심으로 각성시키고자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일년을 하루로 환산했다는 말씀이지 사람들에게 성경의 예언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민14:34과 겔4:6을 근거로 해서 단8:14 이천삼백주야 2300년으로 환산하여 1844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말한 밀러의 성경해석을 인정하여 그 계산법에 근거해서 나온 안식교의 조사심판 교리는 잘못된 성경해석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교리인 것이다.

5. 안식교의 이천삼백주야 기산점 산정 비판

안식교에서 단8:14 이천삼백주야 2300년으로 해석하고 2300년이 시작되는 기산점을 주전457년으로 삼고 있는 것에 관한 안식교의 주장을 살펴보자.

안식교의 주장

“70이레 혹은 490년은 유대인과 예루살렘을 위하여 정해졌다’(9:24). 기본이 되는 히브리어 동사는 하타크(chathak)이다. 비록 이 동사가 성경에 단 한 번만 사용되었을지라도 그 의미는 다른 히브리어 자료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게세니우스(Gesenius)가 쓴 유명한 히브리어영어 사전은 그것이 끊어내다’, ‘분리하다는 의미라고 적절히 서술했다. 이런 배경에서, 가브리엘의 설명은 매우 뜻 깊은 것이다. 그는 490년이 보다 긴 2300년의 기간에서 끊어내야 한다고 다니엘에게 말한다. 가브리엘은 490년의 기산점(起算點),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9:25)라고 지적하는데, 그것은 기원전 457, 곧 아닥사스다(Artaxerxex)왕 제7년에 해당한다(4장 참조). 490년은 주후 34년에 끝났다. 그리고 2300년에서 490년을 끊어 내면 1810년이 남는다. 2300년은 주후 34년 이후 1810년이 지나야 하므로 1844년까지 이르게 된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440)

비판 및 반증

안식교의 주장에 대해 비판하고 반증해보자.

이천삼백주야를 2300년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앞의 글에서 밝힌 바가 있지만 이천삼백주야를 2300년으로 해석하는 안식교의 주장을 옳다고 가정(假定)한 후에,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起算點)에 대해서 비판을 해 보고자 한다.

안식교는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을 산정함에 있어 다니엘서 9장의 칠십이레 예언이 시작되는 기산점이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과 같음을 주장하고 있고 칠십이레를 490년으로 해석하여 2300년의 처음 시작부터 490년간의 기간으로 해석한다. 칠십이레에 대한 해석부분은 다음 주제에서 다루어 보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칠십이레의 기산점에 대해서만 분석해 보고자 한다.

다니엘 9:25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그러니 칠십이레의 기산점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식교에서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아닥사스다왕7(주전 457)을 기산점으로 삼고 있다.

칠십이레의 기산점에 대해서 간하배(Harvie M. Conn)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70이레의 출발점을 알게 되었다. 그 출발점은 곧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날 때부터이다. 우리 한역에는 영() 곧 명령의 뜻으로 번역되었으나 원래 … (다바르)라는 히브리 용어는 단순히 말씀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의 창시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 이 말씀의 내용은 예루살렘의 복구와 건축이다. …여기에서 중심 되는 문제는 언제 이 말씀이 공포되었는가?’하는 점이다. … 우리가 받아들이는 학설은 요한 칼빈, 클리포드, 카일, 루돌프, 영 등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말씀이 공포된 해를 포로 생활이 끝나고 본국으로 귀환하도록 명령을 내린 고레스 왕 원년(주전 538)이라고 간주한다.”(간하배, <다니엘서의 메시야 예언>, 개혁주의신행협회, 2007, 280-282)

필자는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주전 538년으로 보는 간하배의 해석이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첫째는, 바이블렉스 원어 사전에 보면 으로 번역된 다바르는 성경에서 , , 사건이란 뜻으로 번역이 되고 있고, “ ‘로서의 다바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 혹은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단9:25의 그 구절을 너희가 돌아가 예루살렘을 재건하리라는 말씀이 계신 때부터로 번역하고 있다.

둘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를 통해서 성취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레스를 통해서 예루살렘, 예루살렘성전, 성읍등이 중건되고 건축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성경의 여러 곳(44:28, 대하36:22-23, 45:1-13)에 기록이 되어 있고, 에스라 1:1-4에는 바사왕 고레스가 고레스 원년에 성전 건축을 하도록 조서를 내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안식교에서는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아닥사스다왕7(주전 457)으로 주장을 하는데 이 때에는 하나님이 아닥사스다왕을 통해 예루살렘이 중건될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아닥사스다왕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을 내린 것도 아니며, 단지 아닥사스다왕이 에스라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함께 올라가라는 귀환령을 내렸을 뿐이다(7:7-26).

그렇기에 안식교의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에 대한 주장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그런데 안식교에서 굳이 아닥사스다왕7년을 기산점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칠십이레를 490년으로 계산하여 그 해를 기산점으로 잡아야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심(주후29) 전후의 7년간을 칠십이레의 마지막 한 이레의 기간으로 맞출 수가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서 기산점 주장에 나타난 안식교의 비성경적인 해석을 정리해 보자면, 첫째, 8장의 이천삼백주야와 단9장의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 부터가 잘못되었다. 8장의 이천삼백주야는 앞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칠십이레와는 전혀 관련없는 기간이다. 이천삼백주야는 헬라시대의 안티오커스(4)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지기 시작한 때부터 마카비 혁명에 의해 다시 정결케 될 때까지의 기간에 대한 예언이며, 칠십이레는 이천삼백주야와는 관련없이 메시야의 초림과 예루살렘 성전에 관계된 또 다른 예언의 기간인 것이다. 둘째, 칠십이레의 기산점은 주전 457년이 아닌 고레스왕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보는 것이 성경적이다.

위에 인용한 안식교의 주장 중에 비경적인 점을 한 가지 더 비판해 보자면, ‘하타크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끊어내다 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이천삼백주야의 예언의 기간 속에 칠십이레가 포함되었다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바이블렉스 원어사전에 의하면 하타크 나누다, 결정하다는 뜻이 있는데 이천삼백주야와 칠십이레가 서로 관련없는 예언의 기간이기에 지금 개역성경대로 기한을 정하였나니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보며, 안식교에서 끊어내다로 해석하는 것은 칠십이레의 기간을 이천삼백주야에 포함을 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으로 일치시키기 위한 억지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안식교에서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아닥사스다왕 7년으로 주장하고, 칠십이레의 기산점을 이천삼백주야의 기산점과 같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자의적 성경해석에 의해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생겨난 결과이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잘못된 성경 해석에 의해 만들어진 조사심판 교리 역시 비성경적인 거짓교리인 것이다

6. 안식교 칠십 이레 해석 비판 및 반증

안식교는 다니엘 9장의 칠십 이레 예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하고 있다.

안식교의 주장

시기에 관한 예언을 이해하는 열쇠는 예언적 시간의 하루는 문자적 태양력 1년에 해당된다는 성경 원칙이다(14:34; 4:6). 이 연(年日)원칙에 따르면 70이레(혹은 예언상의 490)는 문자적인 490년을 대표한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9:25) 이 기간이 시작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는 이 칙령은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Artaxerxex)왕 제칠년에 반포되어 주전 457년 가을에 효력을 발생했다(7:8, 12~26, 9:9). 예언에 따르면 칙령 후 483(예언상의 69이레) 메시야 곧 왕이 나타날 것이었다. 주전 457년으로부터 483년을 계수하게 되면 주후 27년 가을이 되는데, 이때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시고 공중 봉사 사업을 시작하셨다. … ‘때가 찼다’(1:15)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이 시기에 관한 예언의 성취를 언급하는 것이다. 70번째 이레의 중간 즉, 주후 31년 봄, 정확히 그리스도의 침례 후 3년 반이 되던 때에 메시야는 당신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제사 제도를 끝나게 하셨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시조사, 2007, 61-62)

안식교에서는 칠십 이레를 해석함에 있어 이천삼백 주야의 해석과 동일하게 예언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칠십 이레의 기간을 490년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안식교에서 예언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는 근거로 삼고 있는 민14:34과 겔4:6은 앞의 글에서 밝혔듯이 하나님이 1일을 일년으로 또는 일년을 1일로 환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징벌받는 기간을 예언하셨거나 에스겔의 상징적인 행동의 기간으로 삼았다는 것이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언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해석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식교에서 칠십 이레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490년의 기간을 주장하는 것은 마지막 한 이레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해의 전후 7년간의 기간으로 맞추기 위해서라고 본다. 그러나 먼저 글에서 반증한대로 칠십 이레의 출발점은 아닥사스다왕 칠년(주전 457)이 아닌 고레스왕 원년(주전 538)으로 보아야 하며 그렇다고 보면, 칠십 이레를 문자적인 490년 기간으로 맞추어 해석한 안식교의 년대 계산은 다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비판 및 반증

그렇다면 칠십 이레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성경적인 올바른 해석인가?

먼저 칠십 이레를 해석함에 있어 정통교회 내에서도 세대주의적인 해석을 따르는 분들이 있으나 필자는 세대주의적인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아 본 글에서는 세대주의적인 해석의 문제점도 함께 밝히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칠십 이레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원어적 해석을 살펴보자.

여기 칠십 이레’(…)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주의 할 것은, (1) ‘이레란 말의 히브리 원어(…) 일곱들’(sevens)이란 뜻이며 칠십이란 말보다 앞에 있어서 역설체(力說體)를 지니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칠십 이레란 어귀를 자역(字譯)하면 일곱들, 그것들의 칠십이란 뜻이다. 여기서 일곱들이란 말이 역설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된다. (2) ‘칠십 이레란 말이 ‘70 주간이라고 번역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주간(週間)을 의미하는 낱말은 보통으로 여성 명사 솨부오드(…)인데, 여기서는 남성 명사 솨부임(…)이 사용되어 그저 일곱들’(7의 복수)이란 의미를 가졌다. , 이 말이 주간이라는 시간의 길이를 말함이 아니고, ‘일곱들이란 숫자가 상징하는 성격(신령한 뜻 있는 성격)을 말함이다. …그러면 칠십 일곱들,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결정하신 것이다. , 그의 구속(救贖) 사업의 완성을 위하여 작정하신 것이다. 그 작정은, 그의 완전히 지혜로우신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 기간이 얼마나 오랠지 하나님께서만 아신다.”(朴允善, <성경주석 에스겔서 다니엘서>, 1972, 靈音社, 484-486)

필자는 칠십 이레의 기간을 상징적으로 보는 박윤선 박사의 해석이 옳은 해석이라고 보며, 아울러 다니엘서 9:24-27의 칠십 이레 전체에 대한 해석을 전 총신대학원 교수였던 천정웅 교수가 다음과 같이 잘 정리했다고 여겨진다.

‘70이레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위하여 정하신 기간인데 성경 본문대로 3기간으로 나누어 성경본문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다. 1기간은 ’7이레 기간이고, 이 기간에는 예루살렘에 성전과 성곽이 복구되는 기간이고 제 2기는 ’62 이레로 복구된 예루살렘이 발전을 거듭하되 예수님의 부활 승천까지 수난과 고난 중에 진행될 것이며 제 3기간은 구속 완성의 결과로 성전에서 매일 드리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완전 종식되어 버린 기간이다.”(천정웅, <다니엘>, 1991, 말씀의집, 185)

안식교에서는 단9:27의 한 이레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전후한 7년으로 보고 있는데 단9:26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는 구절은 마24:15-21의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 분명하기에 한 이레를 예수님의 죽음을 전후한 7년으로 보는 안식교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9:27 한 이레에 대해서 세대주의에서는 마지막 세상 종말의 때에 있을 ‘7년 대환난의 기간으로 해석을 하기에 이 구절은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세대주의적인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보고 있다.

첫째는 단9:27절의 그가를 단9:26절의 한 왕으로 해석해서 ‘7년 대환난 기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다. 이 해석이 잘못된 것은 26절의 한 왕의 백성에서의 주어는 한 왕이 아니요 백성이 되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볼 때 27절의 그가 26절의 한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7절의 그가 26절의 한 왕이라고 가정해서 보더라도 26절의 시대와 27절의 시대를 같은 시대로 보아야지 27절을 세상 종말의 시대에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고 본다.

둘째, 9:27절을 예수님께서 마24:15절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사건 때 이루어질 예언으로 말씀하셨고, 주후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의 티투스 장군의 군대에 의해 멸망당함으로 단9:27의 예언은 다 성취가 되었기 때문에 단9:27을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본다.

셋째, 앞에서도 밝혔듯이 예언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한 이레 7년으로 해석하는 것에 잘못이 있다는 점이다.

석원태 목사는 단9:27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 마지막 한 이레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신약의 도래됨, 곧 구속의 도래 즉 은혜시대가 도래함을 뜻한다. 동시에 사도들의 복음시대와 함께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까지의 어간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한 이레는 예수십자가 사건 후에 될 일을 가리키고 있다.”(昔元太, <다니엘서강해>, 京鄕文化社, 1993, 367-368)

필자가 석원태 목사의 해석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이유는 단9:27 그가 26절의 한 왕이 아닌 25절과 26절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며, 그래서 27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세우신 구속의 언약을 굳게 세우시기위해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9:24-27절 전체를 다시 요약적으로 살펴보자면, 9:24은 메시야가 와서 구속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고, 9:25-26은 육십 구 이레 후에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과 예루살렘의 멸망이 예언되어 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주후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그 후 맛사다 항전까지 이어진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황폐케 되었다. 그리고 27절의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는 메시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죄사함을 위한 새언약(22:20, 26:28)을 한 이레의 기간 중에 굳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는 메시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율법에의한 짐승의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절반의 원어(헤치) , 중앙, 가운데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밤중’(12:29, 16:3, 3:8)으로 번역되기도 한다(바이블렉스 원어사전 참조). 그러기에 이레의 절반 이레 중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이 마24:15에서 인용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로마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이 구절에서의 황폐케 하는 자를 박윤선 박사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황폐케 하는 자란 말(… 쇼멤), ‘황폐케 된 것이라고 번역함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훼파된 성전을 의미한다. 여기 쏟아지리라고 한 것은,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성전에 대한 심판, 또는 자기 백성(유다 민족)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朴允善, <성경주석 에스겔서 다니엘서>, 1972, 靈音社, 502)

그렇기 때문에 26절의 끝까지 27절의 종말까지를 세상의 종말로 보아서는 안 되고,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교의 종말이요,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서 볼 때 필자는 칠십 이레에 대한 안식교의 해석이나 세대주의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단9:24-27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칠십 이레는 하나님이 인간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위해 정한 기간으로 예루살렘 중건의 말씀이 있었던 고레스 원년(주전 538)부터 예루살렘의 멸망까지의 기간을 세기간으로 나누어 예언이 되었다. 처음 일곱 이레 기간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이 복구되고, 다음 예순 두 이레 기간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나머지 한 이레의 기간은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구속의 은혜 언약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멸망시킴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율법적인 짐승 제사를 폐하신 기간이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