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의 종말론(제3의 훈련소)

  • 6월 16, 2016

                                            지방교회의 종말론 (3의 훈련소)


                                                                                         이인규

   

 

지방교회는 성도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다면, 부활 후에도 처리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부활의 개념은 우리가 사용하는 부활과 다르며, 소위 신인합일이라고 불리는 상태, God-man 이 된 사람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즉 기름을 준비 못한 다섯처녀들은 구원받은 처녀이며, 혼인잔치에 참여못하였으나, 어두움에 던 져서 이를 갈며 슬피 울며 제3훈련소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무엇인가 보상적인 처리를 받아야만 한 다는 것입니다. 소위 제3훈련소라고 일컬어지는 연옥과 같은 개념을 말합니다. 즉 구원을 받은 자들도 어둠에 던져져서 이를 갈며 슬피 울게된다는 것입니다. 지방교회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원을 받은 자, 즉 온전히 하나님사람으로 성숙되지 못한 자도 구원을 받기는 받지만, 어두운 제3의 장소로 던져져서 고통을 당하며, 다시 한번 후기 휴거의 기회가 주어진다.

2) 다섯처녀는 온전히 하나님사람이 된 자들이며, 미련한 다섯처녀는 살려주는 영이 내주는 하였지만, 아직 온전히 하나님사람으로 성숙되지 않은 자들이다.

 

지방교회의 주장

 

이로써 우리는 열처녀들이 죽은 성도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나 지혜로운 처녀들이나 신랑이 더디 오므로 죽어 있었다.(왕국, 309)

 

믿는 이들이 휴거될 때, 모든 세대에 걸쳐서 죽은 자들 중 대다수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이 대다수는 마태복음251절부터 12절까지에 나오는 열 처녀로 상징되어 있다. 마태복음251절은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간 열처녀와 같다하리니라고 말한다. 여기 숫자 열은 대다수의 믿는 이들을 대표한다. 믿는 이들의 전체는 숫자 열둘로 상징되어 있다. 나머지 둘은 마태복음2440에서 42절에서 발견된다.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믿는 이들은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숫자 둘과 25장에 있는 숫자 열에 의하여 상징되어 있는 두 부류 중에 있게 될 것이다. 두 남자와 두 여자는 일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살아있을 믿는 이들을 대표한다. 이에 반하여 열처녀는 모두 잠들어 있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대다수의 죽게되는 믿는 이들을 나타낸다 (믿는이들 2, 1015-1016)

 

처녀들이 일어난 후에 그들의 등들을 손질했다. 이것은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그들의 간증을 처리함을 상징한다. 이것이 만일 우리가 죽기 전에 온전하지 못하다면 부활 후에도 주님의 간증을 위한 우리의 생활이 여전히 처리받아야 함을 가리킨다.(믿는 이들 2, 1017)

 

지방교회는 기름을 준비 못한 다섯처녀들은 구원받은 처녀이며, 혼인잔치에 참여를 못하였으나, 어두움에 던져서 이를 갈며 슬피 울며 제3훈련소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무엇인가 보상적인 처리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530절을 읽어보자. “이 무익한 종을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러분은 이것들이 주님의 말씀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구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구원 받은 사람이라도 어떤 종류의 어둠에 던져질 수 있다. 어떤 종류의 어둠이냐고 묻지 말라. 분명 그곳은 즐거운 곳은 아닐 것이다.(왕국, 520)

 

칼빈주의자들은 영원보장에 있어서 옳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은 마태복음 2530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 그들은 사람이 구원 받은 후에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이 구절이 참된 믿는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고 거짓 믿는 자들에게 적용된다고 잘못 말하곤 한다.(왕국, 522)

 

지방교회가 말하는 소위 제3훈련소라고 일컬어지는 곳은 구원을 받은 자들도 어둠에 던져져서 이를 갈며 슬피 울게된다는 장소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이 있지만, 이 상태를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그러한 표현은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이 기록된 성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24:51 엄히 때리고 외식 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지방교회의 이러한 주장에는 또다른 몇가지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나중에 왔다는 것은 부활한 믿는 이들의 후기의 휴거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분의 기름을 위해 대가를 지불했지만 그것을 너무 늦게서야 얻었다. 여기에서 시간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에 불을 켰었고, 주님을 맞으려고 나갔으며 죽었고 부활했고 휴거 되었지만 성령의 충만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데 있어서 늦었다…… 그들은 시대적으로 이 상을 놓쳤지만 구원은 영원히 잃지 않는다. (믿는 이들 2, 1020 )

 

즉 휴거가 전기의 휴거와 후기의 휴거로 나누어 진다는 주장입니다….. 세대주의와 유사합니다. 열처녀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며, 미련한 다섯처녀들도 구원을 받으며, 후기의 휴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태복음25장의 열처녀에 대한 비유를 읽어 보십시오. 특히 24장 후반부터 함께 읽으시면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지방교회의 해석이 정상적입니까? 이들은 그들의 황당한 교리에 성경을 짜맞추기 위하여 그냥 맘대로 임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교리를 짜맞추기를 하기 위하여 성경을 임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열처녀는 휴거를 말하는 것도 아니며, 죽은 사람을 가르키지도 않습니다. 이 열처녀의 비유가 말하는 본질적인 멧세지는 다섯처녀는 누구이고 또 다른 다섯처녀는 누구라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멧세지는 신랑이 더디올새라는 구절입니다.

 

그동안 성경학자들은 열처녀에 대한 성경의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다양하고 폭 넓은 의견을 제시하여 왔습니다. 특히 초대교회부터 이러한 열처녀의 비유에 대해서 알레고리적인 주관적 해석이 특히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열 처녀는 표면적으로 보는 그리스도인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이 정설이며, 구체적으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구원을 받는 그리스도인, 미련한 다섯 처녀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10”이라는 숫자는 완전숫자이며,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의 인원이었으며, 여러 종교 집회를 위해 필요한 정족의 인원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Lenski 라는 학자는 본문의 열처녀가 모든 시대에 예수를 신앙하는 모든 신자를 가르킨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랑은 재림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혼인잔치(신랑집)의 문은 구원을 상징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비유법에서 모든 단어 하나 하나에 모든 비유와 상징이 감추어진 것이라고는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름을 파는 자가 누구인가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그러한 해석은 잘못된 적용입니다.

특히 지방교회와 같이 이것을 휴거로 해석할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더욱이 제3의 훈련소와 같은 연옥을 말하는 내용은 더욱 아닙니다

열처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재림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이며, 그 재림을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25:13)

 

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것은 열처녀의 교훈과 동일할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혼 저물 때엘는지, 밤 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13:32-33, 35).

 

본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언제 올른지 모른다 것과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두가지의 메시지이며, 아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신랑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좀더 지체하신 후에 오실 것이다.

(2) 지혜로운 처녀처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평소에 그와 같은 지체에 대비하여야 한다.

(3) 어리석은 처녀처럼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급작스러운 종말이 올 때에 태만하여 생긴 손해를 원상태로 돌리기에 너무 늦을 것이다.

(4)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선택적으로 구원을 받을 사람이 있고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이 열처녀는 결혼을 하는 당사자가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의 혼인관습에 의하면 이들은 신부의 친구인 들러리 처녀를 말합니다. 이 들러리는 주로 밤에 이루어졌으며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오면, 신부들의 친구들은 신부를 신랑의 집까지 동반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 등불이 계속 타오르게 하기 위하여서는 기름이 충분히 준비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열처녀가 모두 잠을 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잠을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교훈이 아니라, 미리 기름을 준비하고 잠을 자라는 것입니다. 열처녀들은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를 막론하고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깨어있다는 헬라어 단어 그레고류오는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경계하다, 준비하다라는 뜻으로서 “keep watch”를 의미합니다. 즉 슬기와 미련의 차이는 등불을 들고 기름을 준비한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열처녀에 대한 비유를 핸드릭슨은 포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 적절한 해석이라고 생각되어지므로 소개합니다.

 

(1)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많은 점에서 같다. 특별히 모든 사람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도중에 있다.

(2) 그러나 그 유사점은 표면적일 뿐이다. 거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 자가 있다는 것이다.

(3) 초림과 재림 사이에 긴 시간에 경과한다.

(4) 주님의 재림은 급작스러우나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다.

(5) 재림의 준비는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양도할 수 없다

(6) 죽기 전에 준비 못한 자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까지 지상에서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 2의 기회가 없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순간을 모르는 입장에서 언제나 깨어 있는 것이 요구된다.

 

신랑되신 예수께서 신부로 비유된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때의 모습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서 내려오실 것이니“(살전 4:16).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이 장면은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올 때의 바로 그 장면이 될 것입니다. 본문은 언제 오실 줄 모르는 예수의 재림을 미리 준비하고 있으라는 멧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