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가?
이인규
최근에 들어서서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하는 목사도 있고,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하는 목사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바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계승되는 지방교회의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을 유혹할 때에 미혹하던 주장이 바로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창3:5)이었다. 또한 성경은 사탄을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려고 하는 존재”(사14:14)이거나 “자기를 하나님이라 하는 자”(살후2:4)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시113:5)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단적인 견해에 먼저 주의하여야만 한다.
(1)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론
(2) 삼분법으로 분리시키는 인간론
(3)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키는 기독론
위 세가지의 이단적인 주장이 곧 사람의 신화사상의 근본이 되고 있다.
아울러, 우리는 아래 두가지의 개념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4) 그리스도의 개념
(5) 워치만 니의 인간론 오류
각 항목에 대해서 살펴 보자.
(1) 양태론적인 삼위일체
양태론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인격으로 보며, 한 인격이 세 양태를 갖고 사역하였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직접 육체로 오신 것이 예수이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고 오순절 이후에 성령으로 오셨다는 주장이다.
정통삼위일체는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며, 인격적으로 볼 때에는 상호교류하며 서로 구별되어진다는 것이며, 성경의 사실을 그대로 요약하고 정리한 것이다.
양태론은 불사의 성부하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드므로 초대교회부터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려졌으며 기독교 교회사 2000년 동안 줄곧 이단적인 주장이었다. 또한 삼위의 동시공존과 상호교류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으므로 비성경적인 오류로 받아들여졌다.
–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 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쪽)
–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위트니스 리의 하나님 297쪽)
더 자세한 사항은 지방교회의 양태론 총정리를 참고하고, 결론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성령”은 삼위일체적인 성령이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라고 부르며, 바로 양태론적으로 이해되는 부활하신 예수가 된다. 즉 양태론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는 곧 살려주는 영으로 이해가 되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부활”이고 “재림”이며, “거듭남”이 되어진다.
(2) 삼분법으로 분리시키는 인간론
지방교회 워치만 니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이론은 위트니스 리로 계승되었고, 구원파와 베뢰아등에게 오염되어진다. 즉 인간을 영과 혼과 육으로 분리시켜 각각의 공간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서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이며, 죽어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진다.
그러나 워치만 니는 영과 혼이 각각 분리되어진다고 보았으며, 영은 하나님이 거하는 장소로, 육은 죄가 거하는 장소로, 혼은 자아의 인격이 거하는 각각 별개의 장소로 구분하였다.
– 영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부분으로서 영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경배할 수 있다. 영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해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식의 요소라고 한다. 하나님은 영 안에 거하시고 자아는 혼 안에 거하고 감각은 몸 안에 거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혼은 영과 몸의 교차점으로서 그 안에서 영과 몸이 융합된다(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1권, 35쪽)
– 육신은 많은 출구를 가지고 있다. 육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계시를 받지 못하는 한 죄인이든 신자든 간에 육신의 무가치함과 사악함과 더러움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깨달을 수 없다“(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1권, 128쪽)
성경은 혼과 영이 분리되어진다는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워치만 니는 거듭난 사람은 “영 + 혼 + 육”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방교회 교인이 성령을 받으면 “성령(하나님) + 인간(혼, 육)”이 되어지며, 또한 예수도 “성령(하나님) + 인간(혼, 육)”이 되어지므로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예수를 God-man 의 첫샘플이라고 보며, 사람도 God-man 으로서 똑같이 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양태론자들에게 하나님이며 예수가 되기 때문이다.
–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왜 그런가? 그 목적은 우리를 그 분과 똑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다.(위트니스 리,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3쪽)
– 하나님의 성육신 안에서는 신성이 인성 안으로 들어왔고, 인성에 더해졌다. 이 하나님-사람의 부활 안에서는 인성이 신성 안으로 가져가졌고 신성에 더해졌다. 이것을 놀라운 왕복교통이다. 사람의 본성과 신성한 본성, 이 두 본성이 서로 더해졌을 뿐 아니라, 한 실제, 한 인격으로 제삼의 성분을 산출하지 않고 서로 연합되었다.(위트니스 리, 새 예루살렘 237쪽)
– 바로 그 때 그들은 안팍으로 – 생명과 본성과 기질과 몸의 형태에서 – 하나님의 맏아들과 똑같게 될 것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4쪽)
즉 인간론의 오류는 기독론에서도 이단적인 주장을 불러오게 된다.
이러한 기독론은 초대교회부터 있었던 아폴로내리우스라고 하는 이단적인 주장이었다.
– 그(아폴로내리우스)는 사람이 신, 혼, 영의 3부로 구성되었다는 헬라철학의 3분설의 개념을 가지고 로고스가 죄의 좌소인 영의 자리를 취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체와 혼만을 가지셨고 영의 자리는 로고스가 채웠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축소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영이 없는 인성을 입으신 것이다.(신복윤교수.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 102쪽)
즉 지방교회의 이단적인 기독론은 아폴로내리우스의 기독론과 결합하게 된다.
– 우리는 우리 존재에 세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당신은 사단이 그의 거처를 당신의 몸, 즉 당신의 육체 속에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것을 아는가?(위트니스 리, 왕국, 218쪽)
(3)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키는 기독론
예수는 인성과 신성이 분리되지 않는다. 결코 두 인격이 부딪힌 적도 없었으며 오직 하나의 인격만 갖고 있었을 뿐이다.
정통기독교의 기독론은 100% 하나님과 100% 사람이 하나로 연합하여 하나의 인격으로 연합되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예수의 신성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인성을 예수라고 하는 인간의 혼과 육으로 보는 것이다, 즉 혼과 육을 가진 지방교회 교인들은 양태론적인 그리스도(하나님 자신)가 들어오게 되면 예수그리스도와 동일한 성육신 God-man 이 되는 것이다.
– 우리가 또한 삼일적으로 아들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신 그 영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당신이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부를 때 당신은 주님을 누린다. 당신이 주님을 누릴 때 즉시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은 그 영이시다. 주님은 그 영으로 실제화 되신다. 주님을 더 부를수록 당신은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시며 실제의 영이며 당신 안에 계신 그 영을 더 갖게 된다. 실제란 주로 삼일하나님의 신성한 성분 안에 있는 존재자체를 가리킨다. 그 영이 하나님의 실제이다.(위트니스 리, 새 예루살렘, 396쪽)
–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들은 누구인가? 자녀들과 아버지는 같은 종류가 아닌가? 요한복음3장6절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라고 말한다. 당신과 당신의 부모는 모두 같은 종류, 육신의 종류이다. 6절은 또 말하기를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한다. 이 두 영은 같은 종류이며 또한 같은 근원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많은 하나님-사람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또한 우리가 믿고 경배하며 따르는 우리의 주님, 또한 첫번째 하나님-사람이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사람의 생활, 40쪽)
지방교회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시킨다.
예수님이 한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부활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첫번째 피조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그 분이 육체 안에 사셨을 때에 “그분의 한 부분”은 다만 사람, 곧 다윗의 씨였다. 그 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부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그것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인정됨을 통해서이다(같은 책 45쪽)
– 그러므로 그분의 부활 이전에 그분은 그분의 신성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그 분의 성육신으로 그분은 인성 안으로 들어가셨고 그 분의 존재의 부분으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그러나 그 분의 인성은 그분이 부활할 때까지는 “아들화” 되지않은, 즉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지 않았다.(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23쪽)
– (골1:15-18의 구절)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창조된 것들 가운데 첫 번째,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 이심을 계시한다.(그리스도 67쪽)
다시 말하자면 초대교회의 이단적인 양태론, 이단적인 인간론, 이단적인 기독론까지 지방교회에서 총체적으로 등장시키는 것이다.
또 4세기 경 라오디게아의 감독이었던 아폴리나리우스는 아리우스를 강하게 반대하다가 다른 극단으로 흐른 결과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갖었지만, 인간의 정신이나 영은 갖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은 하나님의 신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였기에 인성의 축소를 주장하게 되었고 이를 아폴로나리아즘이라고 부른다. 그는 한편 인간을 육, 혼, 영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그리스도의 인성은 육체와 혼의 두 부분으로만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신적 로고스는 영의 자리를 취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굳이 신학적인 설명을 할 필요도 없다.
과연 사람의 성품이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 할 수가 있는가?
(4) 그리스도의 개념이 무엇인가?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개념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를 말한다.
요한복음 1장41절을 보면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히브리어 “메시야”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시는 선지자의 사역,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 간구하시는 제사장의 사역, 모든 권세를 위임받고 통치하시는 왕으로서의 사역, 이 세가지를 수행하시는 분이며 그 세가지의 사역이 총괄되는 사역을 곧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가 되어진다고 말하며, 그러한 메시야를 유대인들은 기다려 왔던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는데, 그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진다.
구약에 있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이었다. 단명기 9장24절에는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니….”라는 예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야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연 거듭난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그리스도”를 문자적으로만 생각하는 편견이며 대단한 착각이다. 그러한 주장은 사람이 곧 메시야라는 주장이 되고만다.
모세와 아론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으며, 다윗왕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으며,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다. 그러나 과연 이들을 “그리스도”나 “메시야”라고 언급한 적이 성경에 있었는가?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에까지 예수이외의 사람이나 존재를 한번도 그리스도나 메시야로 언급한 적은 없다.
아주 간단한 구별방법이 있다….성경에서 그리스도나 하나님으로 불렸던 사람이 있는가?
마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마 24: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오히려 성경은 거짓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그리스도가 있다하여도 나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예수님의 출현에 대한 예언은 “지극히 거룩한 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었으며 구약의 모든 성경이 예언하였던 바로 그 “그리스도”(호 크리스토, the Christ) 였으며 그 “메시야”였다.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눅1:15) 세례요한도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라고 말했다(요3:28. 4:25). 마23:10에는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
딤전2:5에는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되어 있음으로 그리스도가 오직 한분임을 언급하고 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르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3:16)
즉 아브라함의 언약을 구속사적인 측면으로 볼때 “그 자손”이란 오직 그리스도 한분을 가르킨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롬5:7)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언제나 그리스도이며 메시야는 오직 한분이셨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요4:25)
예수님의 대답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말씀 하셨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다” (요4:26)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26:63)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가 말하였도다.” (마26:64)
우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양자라는 신분적인 변화를 갖게 되지만,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께 함께 하신 독생자가 되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지는 것은 우리가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들로 임명됨”(헬, 휘오데시아)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부자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즉 우리가 양자되어짐은 “우리 몸의 구속”이라는 피조물로서의 완성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우리가 죄의 노예라는 신분으로부터 구원과 해방을 뜻한다.
더욱이 지방교회의 신일합일의 밥법은 그야말로 유치한 수준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의 후계자들은 – 이중의 얼굴을 가진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를 갖고 있다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읽어보자.
– 우리가 또한 삼일적으로 아들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신 그 영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당신이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부를 때 당신은 주님을 누린다. 당신이 주님을 누릴 때 즉시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은 그 영이시다. 주님은 그 영으로 실제화 되신다. 주님을 더 부를수록 당신은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시며 실제의 영이며 당신 안에 계신 그 영을 더 갖게 된다. 실제란 주로 삼일하나님의 신성한 성분 안에 있는 존재자체를 가리킨다. 그 영이 하나님의 실제이다.(새 예루살렘, 396쪽)
– 명주는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올 준비가 되셨다. 우리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그분은 즉시 우리의 영의 종착지에 도착하신다. 우리의 영은 그분의 노정의 종착지이다.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28쪽)
– 우리는 불신자를 구원하기 위해 설교가 필요없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 ‘오 주예수’를 세 번만 말하도록 한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불신자가 해야 할 것은 입을 열고 ‘오 주 예수여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믿을 의도가 없다 할 지라도 그들은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의도가 있든 없든, 그들이 창문을 여는 한 공기는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다. (Lee Stream magazine, Ⅷ: 1,Feb.!, 1970,p.6)
– 교회가 그분의 이 한 영을 마시며 그 분과 한 영이 됨: 우리가 “오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을 마시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순간순간 이 성령을 마셔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 성령이 오신다. 우리가 부르는 것은 주님이지만 받는 것은 성령 이다. 예수는 그 분의 이름이요, 성령은 그분의 인격이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오게 된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이다.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성령이 온다. (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9쪽)
그들은 “주여 주여”라고 주문을 외우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양태론의 마지막 단계인 생명의 영이며 부활의 영인 삼일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실제가 그들에게 들어오고, 그렇게 하여 그들에게 들어온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 안에서 성숙하게 자라나면 그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소위 신일합일이라고 불리는 방법이 주문 외우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음에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고 하여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면 주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신다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황당한 주장일 따름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은혜이다.
주여 주여 라고 이름을 부르면 그들에게 영이 된 주님이 들어가고, 그들은 하나님이 된다는 것인가?. 그들은 이러한 신인합일을 부활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안에서 재림이 온다고 주장한다.
–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새 창조 안의 부활한 나를 말한다. 이 부활한 내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하나가 되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부활시키셨는가? 부활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신성을 우리의 인성과 연합시키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부활한 것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43쪽)
– 그와 같이 완결된 영을 살아날 때, 이것이 바로 완결된 영의 부활 안에 사는 것이다. 이 부활은 어떤 능력이나 사물이 아니라 한분의 인격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분은 부활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더욱이 부활의 실제는 삼일하나님의 최종완결인 그 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결론-삼일하나님, 그리스도, 그 영, 부활은 하나임-을 갖는다.
– 주님의 오심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지만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는 아닐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 여러분은 그분이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이 여러분으로부터 오실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위트니스 리의 왕국, 329쪽)
–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심으셨고, 그분이 지금 우리 안에서 자라고 계시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안에서 성숙되고 계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익고 성숙할 때, 그것은 그분의 오심의 때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아닐 것이다.(왕국, 330쪽)
이것이 그들의 거듭남이며 부활이고 천국이며 재림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부활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어떠한 사람들은 지방교회가 단순히 양태론을 주장하는 곳으로만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워치만 니는 이단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방교회의 이러한 논리는 워치만 니의 삼분법적인 인간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스스로가 말하듯이 기독교가 아니다. 지방교회는 죽어서 가는 천국도 부정한다. 그들은 부활도, 재림도, 구원도, 거듭남도 모두 기독교와 다른 철저한 이단종교이다.
(5) 워치만 니와 같은 삼분법의 오류
필자는 삼분법이 옳은가 이분법이 옳은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인간을 개념적으로 분류할 때에는 삼분법도 있을 수 있고 이분법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지방교회와 같이 영과 혼과 육을 분리시켜 공간적이며 분리적인 뜻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단적인 인간론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때에는 우리의 육체만이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적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육은 그 자체만으로 악하거나 악의 원천이 되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이 죄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죄의 모습이라는 뜻이 아니며, 인간자체가 죄인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이 말한 육체의 소욕은 총체적인 인간을 말하며,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을 뜻한다.
바울이 말하는 육신(사르크스)은 인간의 부분적인 죄성이 아니라, 총체적인 인간에 매여 있는 죄성을 말하며, 바울이 영을 좇으라고 하였을 때에 그 영은 곧 인간의 소욕과 대립되는 성령하나님을 따르는 소욕을 의미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6-17)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5-9)
바울은 사람을 육과 영으로 분리시키지 않았으며, 그가 말한 육신은 인간의 부분적인 측면이 아니라 인간자체를 말하며, 그가 말한 영은 인간의 부분적인 측면이 아니라 성령자체를 말한다. 그가 육신의 소욕을 좇지 말라고 하였을 때에 그 육신은 인간적인 육신을 말하는 것이고, 영을 좇는다고 하였을 때의 그 영은 성령, 즉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다.
또 예수를 영(영혼)과 육체로 분리시켜, 예수의 육체만을 인성이라고 표현하는 주장은 잘못된 기독론으로서, 성경은 육체에도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또 예수님은 그가 돌아가실 때에 그 영(sprit)을 하나님께 받아달라(눅23:46)고 말씀하셨으며, 스데반도 그 영(spirit)을 하나님께 부탁하였다.(행7:59)
만일 예수님의 영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하나님께 부탁한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도 죽을 때에 그 영(혹은 혼)이 죽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성경은 사후에 떠나는 것을 영(spirit)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혼(soul)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soul)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12:2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soul)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행5:10)
그렇다면 사람이 죽었을 때에 혼과 영이 각각 분리되어 따로 행동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12:27에서 예수께서는 “지금 내 마음(soul)이 민망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다음, 요13:21에서 예수님은 “심령(spirit)에 민망하셨다”고 하신다.
마리아는 “내 영혼(soul)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spirt)이 내 구주를 기뻐한다고 눅1:46-47에서 말하였다. 무엇이 다른가?
또한 육이 더럽고 죄많은 것이 아니라, 육과 영을 함께 깨끗케 하여야 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1)
마찬가지로 육체는 죄악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니”(시63:1)
과연 지방교회의 주장과 같이 양태론적인 예수가 거듭난 우리의 영에 들어오는가?
성경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무엇보다도 양태론자들의 주장은 성경적인 오류를 가져온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성령을 받아서 제자에게 부어주신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에 대해서 그들은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10:37-38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인간 예수가 부활하여 신적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예수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9)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알아 보지 않았는가?
마 8: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예수님 자신이 초기 공생에에서 스스로 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