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손에 이끌려(대구교회, 이현래 목사)를 읽고

  • 11월 25, 2019

주의 손에 이끌려(대구교회, 이현래 목사. 교회생활사)

 

이인규

 


십수년 전, 이현래 목사는 하이텔에서 하표사(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라는 카페를 통하여 지방교회와 유사한 교리를 주장하다가, 한기총으로부터 2005년에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현래 목사는 CCC 출신 목사였는데 워치만 니의 책을 읽고 빠져서 스스로 자생적인 지방교회가 된 것이다.

 

지방교회(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의 이단적인 교리는 다음과 같다. 거의 모든 신학적인 견해에서 모두 정통신학과 다른 이단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면 명백하다.

  

신론 : 삼일론(양태론)

기독론 : 아폴로내리우스 주의(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

인간론 : 영과 혼과 육을 공간적, 장소적으로 분리하는 3분법,

구원론 : 신화사상(신인합일론), 단체구원론

성경론 :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해석을 추종, 계시, 비밀, 풍유적 해석.

종말론 : 내세 부정, 연옥과 같은 중간처소 주장, 극단적 세대주의

교회론 : 기독교를 사탄의 교회로 주장하며 배타적, 독선적, 부정적 교회론

   

최근에 대구교회가 매우 활발하게 전도를 하고 있으며, 대구에 교회를 크게 건축했다는 말을 들었으며, 도처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방교회와 대구교회에 빠진 사람의 가족들이 상담을 요청하는 일이 많아진 것으로 보아, 지방교회와 대구교회가 상당히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지방교회뿐 아니라 모든 이단들이 최근에 성행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그것은 기존 교회가 이단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며, 신학적인 부재가 그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피해자 중에 한분이 대구교회 이현래 목사의 주의 손에 이끌려라는 책을 보내주어서 그 책을 읽었다. 그의 신학적인 책이 아니라 자서전이었기 때문에 책에 큰 비중을 두고 싶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책을 읽어보니 주의 손에 이끌려라는 제목이 곧 워치만 니의 손에 이끌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현래 목사에게는 곤혹스러운 평가가 되겠지만, 그의 책을 읽을수록 주님의 손 워치만 니의 손을 같은 의미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 이현래 목사는 성경을 읽고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워치만 나의 책을 읽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스스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으며, 워치만 니의 성경해석을 자신을 거듭나게 한 100% 진리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기성교회의 신학과 교단이라는 제도 자체를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데,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 대등소이하다. 그러나 그 역시 또 다른 신학과 또 다른 교단에 빠져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된다.

 

1) 워치만 니의 책을 읽고 그 사상과 교리에 빠지게 되었다는 증언

        

62

70년대 우리나라 교역자로서 워치만 니 저서의 시리즈를 접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순수하게 이 복음의 노선을 따른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생명은 자기의 고유한 노선이 있는 것이다. 다른 노선 안에서는 성장이 어렵다. 혹시 성장한다해도 왜곡되거나 퇴색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나를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여건 안으로 이끄셨고, 그 생명이 장애없이 성장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로 해방시켜 주셨다.

         

98

나는 C.C.C에 들어가서 권위를 알게 된 것이 첫 번째 공과였고, 뒤에 워치만 니의 권위와 승복’, 혹은 영적 권위라는 책을 통해 말씀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이 공과는 주님을 따르는 내 일생의 기초가 되었다.

        

118-119

그래서 정처없이 시내에 나갔다가 작은 기독교 서점에 들렀다. 그 때 내 눈에 뜨인 것이 주의 형상을 닮아라는 책이었다. 책 크기가 부담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사서 돌아와 읽었는데 이 책 한권이 내 인생과 사역을 완전히 바꿔 놓을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책을 펴자 그 말씀에 빨려 들어 어느새 한 권을 다 읽었다. 나는 그 때까지 어떤 책도 단숨에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심오할 수 있는가. 누구나 다 아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역사를 말하는데 그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었던가? 그런 뜻이었던가? 어쩌면 성경을 이렇게 볼 수 있단 말인가! 안 목사님 강의가 좋긴 했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어느 책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했던 말씀이었다. 두 번째 읽기 시작했다. 그 때 나는 ! 이것은 연구한 결과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일반적으로 성경공부는 읽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적용하고 이런 식인데 이것은 그런 유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렇게 잘 알며 그들을 상대하시는 여호와를 이렇게 잘 알고 있는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다 알고 있구나!’ 부처님이 자신의 손바닥에서 노는 손오공을 알고 있듯이 이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 자신도 모르는 그 자신들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 때 알아졌다. 이 분은 성경을 깊이 알기 전에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사람을 깊이 알는 사람이구나! 그렇다. 이 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경험을 가짐으로써 그들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도 하나님에게 그들과 같은 다루심을 체험했던 사람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속속들이 하나님 마음을 말고 사람들의 마음을 안단 말인가?

           

148

내가 C.C.C에 들어가서 일했던 4년은 뜻밖의 일이었고 더구나 거기 있을 동안 워치만 니를 알게 되어 내 인생이 완전히 전환되었다는 것 또한 경이로운 일이었다. 교단에 순조롭게 있었더러면 나는 평범한 목회자의 길을 갔을 것인데 거기서 나오게 되어 C.C.C에 들어감으로써 많은 것을 배웠고 특히 김준곤 목사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곳 또한 내가 그대로 있었다면 C.C.C 간사로서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해임되므로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그리스도와 교회의 세계를 보게 되었고 여기서 영원한 나라 새 예루살렘만을 바라보는 코스로 들어서게 되었다.

         

307

워치만 니를 만난 후 나는 동굴 속에서 나온 사람처럼 새로워졌고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구름을 타고 있었다. 세상 안에서 살지만 거기서 구별되었고 사역을 하지만 거기서 구별되었다. 이상했다. 나는 분명히 엊그제의 나인데 나 아닌 내가 된 것이다. 내가 안다고 했던 모든 것은 종이 축이 말려서 바람에 날려가듯 어디론지 사라지고 내 앞에는 오직 환한 길, 대낮처럼 밝은 길이 있었고 나는 그 위를 걷고 있는 것이었다.

          

316

워치만 니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오직 그리스도 예수 그 분 자신만을 말하고 있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증거하고 있다. 결코 기독교인의 생활이나 종교생활을 위해 기록한 책이 아니다. 그것들은 부수적인 문제들일 뿐이다. 나도 그분을 만난 후에는 40년을 한 교회에서 사역했지만 그리스도 예수 그분 자신 외에 다른 것은 말해 본 일이 별로 없다

                

다음의 글을 보면, 그는 오직 워치만 니의 책을 완전한 말씀으로 생각하고 그것만을 전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워치만 니는 그의 우상이었으며 그의 하나님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면, 그 교주를 하나님과 같이 생각하게 되며, 그 교주의 주장을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535

냐는 대구에 내려왔을 때 주로 워치만 니의 서적들을 그대로 소화해서 전했다. 그 말씀들은 주의 형상을 닮아’. ‘영광스러운 교회’, ‘영적권위’, ‘영에 속한 사람’, ‘신약이란 무엇인가’, ‘노래 중의 노래’, 등의 책이었다. 말씀은 하나도 뺄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었다. 내가 꼭 들어야 하고 전해야 할 말씀들이었다. 이렇게 완전한 말씀이 없었던 것이다.

             

믿음이 좋았던 어느 청년이 이단에 빠진 후에 메시아를 만났다고 간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2) 성경적인 문제점과 신학적인 문제점

      

이현래 목사의 책은 비록 자서전이었지만, 지방교회의 교리가 은연 중에 나타난다.

그들의 구원론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를 God-man이 된 첫샘플이라고 주장한다.

이현래 목사는 오래 전부터 지방교회와 같이 사람이 성육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성경은 썩어질 사람을 썩지 않는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을 우상이라고 말한다.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또한 사탄은 스스로 성전에 앉아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

                

살후 2: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이현래 목사는 성경이 아닌, 워치만 니의 서적을 보고, 그 책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161-163

그 때 나는 워치만 니의 서적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이 뜨였고 새로운 말씀에 귀가 열려서 말씀의 진보가 빨라졌다. 단 한절도 빼놓을 수 없는 그분의 살아있고 오묘한 말씀은 나를 그 양식으로 젖게 했고, 그 말씀은 나를 점유하여 육신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 생명의 말씀은 육신이 된다. 교리는 생각에서 떠돌지만 생명의 말씀은 받는 자에게 곧바로 육신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을 쉽게 하는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지 누가 또 육신이 된다는 것이냐고 몰라서 달아나서 비난한다.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예레미야로 미리 예언된 것이며( 31:31 참조) 이는 예수 한 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라는 복수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이고 그가 이 독생자에서 맏아들( 8:29, 1:6 참조)이 되시려면 모든 사람이 그로 인하여 말씀이 육체가 되는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며 계획이다. 동산에 지으신 사람을 두시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하셨던 것은 그 나무 열매를 먹고 그 생명나무가 아담의 육체, 즉 생명나무 열매로 육체가 된 아담이 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 생명을 받지 않고 사단의 유혹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먹었다. 창세기 6장에서는 저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 열매로 육체가 된 아담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생명나무 열매(말씀)로 육체가 되는 우리를 위한 맏아들이시다. 하나님 말씀이 육체가 되지 못하면 율법이 되고 교리가 된다. 그래서 이것들은 생명을 갈 막고 말리며 죽이는 도구로 변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되어 살과 피가 된다. 그런데 먹고 소화되지 못하면 썪어서 독이 발생하고 균이 발생하여 살과 피가 되는 것을 방해하고 부패케 하며 심하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소화되지 않은 말씀으로 교리를 만들어 두면 어느 날 그것은 부패하여 사람을 잡는 도구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것을 도구로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저주하고 살육했던가

           

이현래 목사의 책에는 해석적인 오류와 신학적인 오류도 나타났다.

                        

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1: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1의 본문이 예수님이 말씀으로 오셨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그들이라는 복수 대명사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구약성경의 말씀을 모두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것 같다. 이런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해석이라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더욱이 창세기 6장에서 육체가 된다는 것이 지식의 나무로 육신이 된 아담을 가르킨다는 해석도 황당스럽다. 자신의 교리와 사상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성경을 인위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단들의 전용적인 수법이 아니던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주장도 반복하여 나온다. 정통삼위일체를 교리라고 부정하는 이현래 목사는 또 하나의 교리에 지나지 않는 지방교회의 양태론을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현래 목사는 워치만 니의 주장은 결국 인간의 이론과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며 진리로 평가가 되고 있는 것이다.

           

173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관계가 모호하다 해서 토의와 회의를 거쳐 연구 끝에 황제의 재가를 통해 만든 것이 삼위일체론이다. 사람들은 이 결정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인 분으로 믿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지식적 제한 안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구조적으로 정의하고 이를 확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 안에 제한될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 이상 속에 확정된 하나님이 있다면 그 역시 우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성은 피조물의 한 기능에 불과하다.

              

이현래 목사는 교회사마저 조작하고 있다. 니케야 회의에서 삼위일체가 결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큰 동조세력을 갖고 있었던 유사본질을 주장한 아리우스 장로에 비하여 동일본질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 청년집사가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토론이 거듭되는 가운데 아타나시우스가 토론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 회의였다.

        

 

395-396

인간 특히 아리안족의 지혜는 무엇이나 객관화하려고 한다. 심지어 하나님도 객관화하고 그 구조를 분석하여 삼위일체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객관화 될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며, 사도들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장황하게 부른 것이다. 나는 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될 수 있지만 예수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될 수 없다. 예수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뿐이다. 각자는 다 자기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예수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는 천당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지 않으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그런데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도마는 또 객관적인 길을 묻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천당은 객관적인 길로 갈 것이다. 천당을 만든 사람들은 그 길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내 아버지 집으로 가는 객관적인 길은 없고 그런 진리와 생명도 없는 것이다.

               

이현래 목사는 지방교회와 같이 사후 천국도 부정한다.

그는 주관적인 이론이 진리이고, 객관화된 사실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가 그토록 진리라고 생각하는 워치만 니의 성경해석은 주관적이므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인격이 된다는 표현은 전형적인 지방교회의 표현이다. 이현래 목사의 대구교회가 인터넷에서 사용하던 카페 명칭은 하표사(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었다. 이현래 목사의 삼위일체는 세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이며, 그리스도와 성도는 동일한 한 인격을 갖는다.

또 이현래 목사의 교인들은 오래 전부터 인터넷에서 말씀과 하나된 사람을 보러오라, 성육신된 사람을 보러오라라고 말해 왔고,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를 만나러 오라라고 말해 왔다. 그 그리스도가 된 사람이 곧 이현래 목사이다.

그것이 지방교회에서 말하는 소위 성육신 사상이다.

         

233

나는 워치만 니로부터 깨우침을 받았을 때 한 사람이 보였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시 여러 과정의 연단을 거쳐 아담의 성분이 제거된 그 사람, 순수하게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그분의 경륜을 수행했던 그 사람, 그 결정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 앞에 한 인간으로서 서신 것을 보면서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찾고 있다는 것을 본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한 인격에 의해 부름 받고 변화되었으며 사역자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교리나 제도는 아예 염두에 없었고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에 근원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한 인격,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는 우리 교회의 표어가 되었다.

       

240

돌이켜 보면 나는 충주에서 워치만 니를 만나고 나서 하나님에 의해 새로 만들어지는 그 한 사람이 보이면서 지금까지 내가 짊어지고 있던 모든 짐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

            

그는 영과 혼과 육을 분리시키는 워치만 니의 인간론을 옳다고 말하고 있으며, 정통신학적인 인간론을 사탄의 가르침으로 비유하고 있다.

          

338-339

영에 속한 사람 서문에 워치만 니는 그 책을 쓸 당시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마지막 글이라고 생각하고 죽을 힘을 다해 집필했다고 했다. 심지어 각혈을 하면서 가슴이 아프니까 책상에 엎드려 가슴을 압박하며 죽음을 보류시켜 놓고 그 글을 썼는데 그때 그는 사단의 많은 방해를 받았노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영과 혼과 육의 분리는 사단이 경계하고 싫어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단은 영과 혼과 육을(살전 5:23 참조) 한데 몰아 넣어 흔들어 놓고 그 안에서 자신의 뜻을 펼쳐가는 것이다.

                    

3) 교단의 신학과 교회를 비난하는 글

         

교단의 신학과 교회를 비난하는 글도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결국 이현래 목사는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와 동일한 또하나의 신학과 교회를 만든 것이며, 그것은 워치만 니라고 하는 사람의 사상과 교리를 따르는 것 뿐이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교단의 신학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정교단의 교리는 쓰레기이며, 워치만 니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마 그런 생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124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김 목사는 신학적 무덤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이 무덤이 단순하고 편하고 따질 일 없고 싸울 일 없으니 얼마나 좋았던지, 그동안 미주알 고주알 배웠던 지식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책도 대부분 없애 버렸다. 홀가분해서 좋았다. 해방된 기분이었다…. 교단, 교회, 신학, 교리 이런 것이 지긋지긋하고 꼴도 보기 싫었던 나는 그 모든 옷을 벗고 알몸으로 시원하게 흐르는 강물에서 멱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의 자연스러운 인간성은 그동안 공연히 굳어져 있었던 나를 원래의 내 성향대로 되돌려 놓았다.

          

126-127

(필자 주: 주석으로 성경을 연구한 지) 한 두어 달이 지났을까 나에게는 어둠이 몰려들었다. 왜 이렇게 진전이 없는가? 학생들은 왜 이렇게 반응이 없는가? 이 물음에서 고만하다가 뜻밖에 워치만 니라는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내가 가는 길에 세 번째 만난 스승이었다. 나는 이 분의 책 한권을 읽고 너무나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처음 듣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워치만 니의 책을 읽어 본 나는 다른 세계를 만났던 것이다. 같은 말씀인데 이렇게 다르게 볼 수 있는가? 이런 뜻이 과연 그 안에 있었던가?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 보자 못한 말씀이 이렇게도 쉽게 감춰져 있었단 말인가? 그동안 별 공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다 보면 이 책 저 책 읽기 마련인데 어느 책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말씀이 그 안에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128

예수는 누구인가? 참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이 당연한 기초를 새로 보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배웠고 들었고 보았던 모든 것은 종이 축이 말려가듯이 말려가 버렸고,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새롭게 되는 신기한 세계를 걷게 되었다. 나는 새로워졌다. 옛것은 없고 새것만 남아 있었다. 멀고도 멀리 계시던 그 주님 안에 내가 있었다. 그동안 나는 찾았지만 얻지 못했고 따라갔지만 길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지금까지 그분은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는 그 분 안에 있다.

                   

그는 왜 성경을 읽지 않고 워치만 니의 책만을 읽었을까? 그는 워치만 니의 눈과 입과 머리로 성경책을 보았기 때문이다

          

308

나는 1년 이상 성경을 읽지 못했다. 다 알았던 성경이 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가? 그래도 나는 아는 것만 말하기로 했다. 이상한 일이다.

           

309

개는 개대로 알고, 소는 소대로 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이삭은 이삭대로, 야곱은 야곱대로 알았다. 나는 이 사실을 안 이후 분수를 쌓았다.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는데, 복잡한 내 머리가 정지되었다. 그릭 내 지식은 정지되었다. 나는 그 때까지 모았던 책을 거의 다 버렸다. 나는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책들에 눌리고 있었고 그 내용이 자기들도 모르는 것을 써 놓은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 쓴 책이 아니면 손이 가지 않았으므로 다 버렸다.

         

지방교회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표현하는 소위 건축이라는 용어인데, 하나님 자신의 공급과 분배라고도 말한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자신을 대량생산하였다고도 말한다.

        

177-178

나는 40년을 지나오면서 두가지 건축을 보고 있다. 교리나 지식이나 제도나 은사나 인간의 열심 같은 것으로 건축된 호화롭고 거창한 교회를 보는 반면 생명으로만 건축된 살아있는 교회를 본다…. 생명나무들은 적셔진 땅에서 자라고 보석들은 흐르는 강물에서 연마된다. 그러면 생명나무 열매에서 생명이 공급되고 보석들은 건축이 되는데 생명을 먹었으므로 이 건축은 생명의 건축이 된다. 새 예루살렘은 생명의 건축이다. 이 생명은 인격 안에 공급되고 인격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을 표현한다

            

건축, 생명나무, 새예루살렘, 보석 모두 지방교회가 항상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현래 목사가 워치만 니에게 배운 교리가 정통 조직신학과 전혀 다르다는 증거를 스스로 말하고 있다.

             

361-362

그 때 나는 공부를 더 할 수 있다면 보수적인 조직신학을 공부해서 올바른 교리와 신학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것들은 기독교를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목회를 통해 체험했으나 그 깨달음이 분명하지 못하다가 C.C.C에 가서야 그것이 분명해졌고, 워치만 니를 만나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살리는 것은 신학이나 교리가 아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6:63)라고 했다. 신학이나 교리와 같은 지식은 육에 속한 것이다. 영은 신비로운 영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하셨다.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살리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이 오면 살아난다. 교리나 신학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 없어서 죽은 것이다. 아담은 사단의 말을 듣고 죽었다.

            

신학과 교리는 육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며, 워치만 니의 신학과 교리는 진리라고 말하는 이현래 목사는 또하나의 신학과 교리를 추종하는 자생적인 지방교회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은 워치만 니가 아니라 기록된 예수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뱀의 말은 과실을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사단의 유혹이었다. ( 3:4)

이현래 목사가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그 신화사상이 성경과 전혀 다른 사상이라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성경이 말하는 육에 속한 것과 영에 속한 것의 차이는 거듭나지 않은 것과 거듭남의 차이다. 우리는 비록 육에 있지만, 거듭난 사람은 영에 있다고 말하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육에 있다고 표현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전 8:9)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 1:18-19)

             

 

육신(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성령)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