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 비판
이인규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요14;10, 11)
참으로 어려운 내용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in) 거하는 복합적인 상호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칫 문자적으로 생각하면,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서로의 몸을 자신의 안으로 삼키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거하는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 성경구절이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야기시켰던 문제의 구절이었습니다. 이것을 초대교회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라고 불렀는데, 그 어원은 셋이서 손을 붙잡고 춤을 추는 윤무(輪舞)를 뜻합니다.
상호내재에 관하여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들어보겠습니다.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 (신약의 결론, 위트니스리, 하나님. 288쪽)
위트니스 리는 성부하나님 안에 성자예수님과 성령이 함께 동시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분리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안에서도 성자예수와 성령님이 함께 동시존재했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도 하나님과 성령님이 함께 동시존재했으며,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죽으실 때에도 그 안에 하나님과 성령님이 함께 동시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후 영 안에서도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이 동시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과 성령도 함께 동시존재하게 되므로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되고 맙니다. 또 예수님이 성부하나님에게 기도를 하실 때에, 자기가 자신의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를 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위트니스 리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신약의 결론. 위트니스 리, 하나님 323쪽)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합니다.
– 그러므로 요한복음17장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 그분은 땅에 계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셨다. 그 분은 땅에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셨으며 동시에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셨던 분이시기도 했다.(하나님, 위트니스 리, 323쪽)
이것이 한 인격 안의 동시존재입니까? 한 분은 땅에 계시고 한 분은 하늘에 계시는데 어떻게 동시존재라고 말하며, 어떻게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은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이것은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하는데, 별도의 설명을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사용하였던 “상호점유”(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는 서로가 서로의 안에 거하는 형태를 의미하였던 단어입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요소, 혹은 세 성분이 한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이러한 주장은 훗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구별할 수 없는 동일한 인격이라는 이유로 양태론으로 발전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물론 지금도 지방교회, 베뢰아등은 이러한 양태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들은 초대교회 교부들도 이런 주장을 갖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정통신학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부들이 갖고 있던 주장이었으므로, 정통삼위일체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다시 말하여 초대교회 교부들의 주장이 곧 정통삼위일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을 교회사적인 교리를 공부한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그 용어는 삼위일체 이론이 발전되어가는 과정에서 존재했던 용어로서, 상당한 비판을 받았던 용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즉 그 “페리코레시스“라는 “상호점유“란 개념은 위격의 구별성과 위격의 상호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의문과 비난을 받았던 견해이었습니다.
성자는 성부에게 기도를 하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파송시키며, 성자예수는 성부에게 온전히 바쳐진 화목제물이 되며, 성부 하나님은 그 제물을 온 인류의 대속물로서 온전히 받으셨다…..이렇게 인격적으로 상호구별되어지는 삼위가 한 인격, 한 장소안에 동시존재하는 삼위라고 한다면, 상호관계가 가능한 인격적인 구별이 도저히 설명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방교회는 아래의 글을 인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87쪽)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하는 상호점유는 세 휘포스타시스(위격)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초기이론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세 위격이 상호점유(페리코레시스)라는 형태로 동시존재한다는 주장은 상호간에 구별되는 인격에 대한 성경구절을 설명할 수가 없으므로, 비판을 받았던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개념적인 면에서 그들은(갑바도기아 교부들) 휘포타시스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바르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사고에서 그 용어는 우리가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연상하는 충만한 의미상의 발전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2쪽)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 중 한 사람이었던 바실은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하였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본인은 상호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다만 본인이 믿고 지지하는 상호내재란 성경적인 개념의 상호내재이며,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이며, 지방교회의 것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의 실제 예를 살펴보고,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가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많은 사람은 모두 한 인격일까요? 많은 사람이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하는 것을 말합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인한 유기체적인 영적연결을 뜻합니까?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과 종이나 자주자와 남자나 여자가 모두 한 인격이며 한 장소에 동시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한 믿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구절을 보면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1:30)
바울과 빌립보교인은 서로가 안에 거하는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뜻하였습니까? 아니면 한 믿음 안에서의 유기체적인 영적연결을 의미하였습니까?
감옥에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안에 인격적으로 동시존재하며, 빌립보교인들의 인격이 바울의 인격 안에 동시존재, 상호내재하였습니까?
과연 그들은 한 인격이었습니까? 구별되는 인격으로서 유기체적인 연결을 의미하였습니까?
즉 앞에서 말한 요한복음의 상호내재는 “인격 안의 인격”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위의 유기체적인 영적교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에서 상호내재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오픈2 주석성경🙁신약 172쪽, 173쪽)
[요14:9]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듯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분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심을 뜻한다. 곧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 성품, 그분의 뜻, 계획>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인격적으로는 구별 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심을 말한다.
[요14:20] 내가 아버지 안에….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이들 사이의 친밀한 <영적결합>을 의미한다.
오픈2 주석성경은 박형용교수, 유재원교수, 윤영탁교수가 감수한 책입니다.
신학자들과 정통신학에서는 “상호내재”란 “본질적인 하나“ 혹은 “유기체적인 영적연합“을 의미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즉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웨슬레목사도 역시 상호내재를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주장합니다.
웨슬레는 그 상호내재를 “일치“ 혹은 “단일성“으로 해석하며, “구별된 인격“을 주장합니다. 또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거부하고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단일적인 본질의 일치“와 “구별된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성부와 성자가 성령과 함께 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된다”(김영선의 웨슬레 신학)
유명한 조직신학자인 웨인그루뎀도 다음과 같이 상호내재를 설명하였습니다.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루이스 벌콥은 지방교회와 같은 신인합일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C. 신비적연합의 그릇된 개념들. 2. 신비적 오류:
다른 위험한 오류는 신비적 연합을 신자와 그리스도의 동일성으로 이해한 신비주의자들의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신비적 연합에는 본질의 연합이 있으며, 거기에는 한편의 인격성이 단순히 다른 편의 인격성으로 합체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신자는 두 개의 구별된 인격들로 남아있지 않는다.(루이스벌콥, 벌콥조직신학 하권, 199쪽)
또 지방교회의 주장이 오류가 되는 성경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14:10을 상호내재의 근거로 본다면, 다음 성경 구절은 성부, 성자, 성도를 포함하는 상호내재가 되어지지 않습니까? 지방교회는 성령을 제외한 성부, 성자, 성도의 동시존재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곳입니까?
“그 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이 성경구절은 “아버지와 아들과 믿는 성도들의 삼위일체“가 된다고 해석하십니까?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란 성부와 성자와 성도의 동시존재를 의미하는지요?
그래서 성경본문은 유기적인 연합에 의한 단일성이라고 보아야만 합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에 거하고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2;24)
상호내재란 같은 믿음, 같은 사랑, 같은 목적으로 연결된 유기체적인 영적인 연합을 가르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 예수가 Master(주)가 되심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예수라는 뿌리에 연결된 가지가 되므로서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10)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지방교회는 아래의 성경구절이 전혀 보이지 않는가 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3:17)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믿음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서로의 안(in)에 거하는 상호내재가 되는 것입니다.
상호내재가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 같이 감추어진 비밀이 아니었으며, 특이하게 성경을 달리 해석하여야만 알수 있는 뜻이 아니며, “믿음으로 인한 연합”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하셨으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전7:15-17)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몸이 되어집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두 인격이 한 인격으로 합체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본질적으로 창기와 같은 성적 탐욕을 가진 동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창기와 실제적인 연합이나 한 몸, 한 인격이 아니라, 영적인 동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실제로 두 몸이 한 몸으로 변화하는지요? 그렇다면 창기는 수백 수천 인격이 함께 동시존재, 상호점유하는지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합하는 자는 주님과 한 영이 된다는 것은, 실제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인 영적 연결을 뜻합니다.
즉 창기와 합하는 자가 창기와 한 인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 같은 영적인 동질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합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실제로 한 인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영적인 동질성을 가진 사람이 되며, 그것이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상호내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삼위일체라고도 불리는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역사를 살펴 보아야만 합니다.
초대교회의 갑바도기아교부들이 주장하였던 상호내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갑바도기아 모델의 장점부터 얘기하자면, 상호점유론으로 대표되는 사상은 의심할 바 없는 진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에 횡행하던 이단들에 대항한 싸움에서 천재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라 묘사할 수 있는 중요한 기여였다. 갑바도기아 모델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위격 들 각각이 서로 혼란이 없이 충분한 신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91쪽)
물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셋을 대표하는 한 본질을 동시에 보는 것이며, 그 순서에 따라서 세 인격을 차례대로 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을 위격들의 상호점유[co-inherence of the persons: 헬라어로는 perichoresis, 라틴어로는 circuminsessio]라고 합니다. 원래,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상호교류나 상호순환, 혹은 상호상통이라는 개념(영적 교류)에 가깝습니다.
원래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라는 단어는 오리겐의 종속설과 이단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제시된 단어였습니다.
즉 성부라는 주격 안에 종속적으로 성자와 성령의 인격이 있다는 오리겐의 주장에 대항하여,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이것을 수정하기 위하여 “페리코레시스”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갑바도기아 삼위일체론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의 본성은 성부의 위격 안에 인격화 되었다는, 혹은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는 용어를 쓰자면, 위격화되었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오리겐의 기본원리였다. 그러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이 기본원리를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게 생각하였다. 오리겐은 성부를 세 휘포타시스 가운데서 첫번째로 생각한 데 반해,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2위가 성부에게 나오듯이) 제3위가 성부에게서 직접 방출했다고 말하는 편을 선호했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4-185쪽)
이제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는 예수와 성령이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이단들의 주장에 대해서 결정적인 성경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주었고, 또 한편 오리겐의 종속설에 대항하여 제시된 것이었습니다.
이 용어는 삼위일체가 전개되고 발전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진보적인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휘포스타시스는 삼위가 구별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문을 일으켰고, 그래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페리코레시스는 성공적인 삼위일체 이론이 아니었다는 평을 받습니다. 지방교회는 페리코레시스가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정통삼위일체라고만 주장할 뿐, 다음과 같은 부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6-187쪽)
또 상호내재 혹은 동시존재하므로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는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다음의 글에서 명백하게 밝혀집니다. 초대교회의 양태론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음을 아래 글에서 여러분들은 알게 됩니다..
“힙폴리투스의 글에 의하면 그들은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하나님을 때로는 아버지로, 다른 때는 아들로 표현했다. 하나님은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투스에 의하여 주장된 우주적 모나드와 같다. 그 모나드가 분할과 불분할, 창조와 피조, 죽음과 불사등을 동시에 가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적으로 하나로 존재한다.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한분이다. 아들은 독자적 실체를 갖지 않는다. 단지 한 입에서 나오는 음과 소리처럼 아버지와 한분으로 존재한다. 처녀의 자궁에 들어간 것은 아버지 자신이며, 결과적으로 자기의 아들이 되셨다. 그리고 그가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06쪽)
아버지와 이들이 동시존재하며, 하나님 자신이 처녀의 자궁에 들어갔다고 하는 초대교회 양태론지들과 아래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처녀의 태속에 들어가셨고, 하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였다는 견해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여 보십시요…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