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식(진주초대교회)의 구원론 오류
이인규
아바드성경은 여러 곳에서 행위구원론, 율법구원론을 강조하고 있으며, 배타적인 교회관을 말하고 있다. 또 구원을 죄에서 구원, 환경에서 구원, 영혼의 구원으로 분류시키는 이상한 구원론으로 구별하고 있으며, 구원파의 주장과 같이 회개와 자백을 구별하여, 자범죄를 지은 사람은 자백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또한 아바드성경은 회개를할 때에는 회개예물을 바쳐야만 한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참믿음의 조건으로서 실천적인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구원의 조건으로서 지나친 행위구원론, 율법주의가 많이 반복하여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교회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극히 적다는 주장과 함께, 믿는자가 행함이나 순종을 하지 않으므로 구원이 취소된다는 주장이 있으며, 신약에서는 율법의 내면적인 의까지 지켜야 한다는 부분적인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변승우목사나 전태식목사는 구원의 취소에 대해서 자신들은 알미니안적 혹은 웨슬레안적인 구원론이라고 변명하는데, 감리교나 성결교, 구세군과 같은 웨슬레안은 행위나 의지로 인한 구원의 취소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명백한 행위구원론이다.
이러한 율법주의와 행위구원론은 율법의 의로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므로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대해서 부정하는 구원론이며, 예수님을 더욱 철저한 율법주의로 왜곡을 하는 것이 된다.
– 요한 웨슬레 목사와 이 연회의 회집자들은……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가장 위험하고 가증스러운 도리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즉 우리가 현세에서나 심판 시에 칭의나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의 다른 것을 믿는 일은 없다.그리하여 시간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하지않는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지라도(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선행은 어디까지나 혹은 부분적으로나 또는 전체적으로나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우리의 공로가 된다거나 그 보상이 될 수는 없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09쪽)
–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므로…. 불경건한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는 순간, 그는 행함이 없어도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졌을 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이요, 그 반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믿음만 있다면 그는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흉악한 죄인으로서 지옥의 형벌 밖에 받을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 맡길때 그 시각으로 그는 용서함을 받는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11쪽, 웨슬레의 표준설교 인용)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에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제2장 교리
제1절 신앙과 교리의 유산
종교의 강령
23. 제 9조 사람을 의롭게 하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 우리의 행한 것이나 당연히 얻을 것을 인함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위로가 넘치는 도리이다.
24. 제 10조 선행
선행은 비록 믿음의 열매요 또한 의롭다하심을 따라오는 것이되, 능히 우리 죄를 없이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위엄하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기뻐하시는 바요, 참디고 활발한 신앙으로 좇아 나오는 것인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 같이 선행을 보고 그 활발한 신앙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 창17:10 (20쪽) 할례 : “할례받지 아니한 자를 백성 중에 끊어 버리신다”라는 말은 비록 언약의 백성일지라도 육신의 일을 버리지 않고 이를 좇아 사는 자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해석을 함으로서, 행위를 강조한다.
아바드성경은 구약의 할례를 육신의 일을 버리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신약성경 골2:11은 오히려 반대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할례 즉 영적할례가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할례는 옛 언약(구약)이며, 예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신약)과 다르다.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 (27쪽) 창22-23장 복음을 받은 자에게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 훈련의 첫단계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 말씀과 반대가 되는 것을 철저히 버리는 것, 세 번째 단계는 가장 귀한 것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이다.
복음을 받은 자에게 훈련이 필요하다는 견해는 옳다. 특히 성경적인 양육프로그램은 얼마든지 추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특정한 경우를 복음 받는 자의 훈련으로 인한 일상적인 세단계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른 구약의 인물이나 다른 사람에게도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을 당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앙심이 좋은 사람도, 어느 목사도, 자기 아들을 바칠만한 단계까지 훈련받을 수는 없다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한 경우를 보편적으로 받아야할 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며, 그런 훈련을 거쳐야만 복의 근원이 된다는 해석은 곤란하다. 더욱이 세 번째 단계로서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이상하다.
성경적인 양육프로그램은 기록된 말씀에 의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르치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행위구원론을 가르칠 수 없다.
▶ 창41장(63쪽)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
전태식목사는 구원의 옷은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고, 의의 겉옷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아바드성경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죄에서 구원, 생활의 구원, 영혼의 구원을 분리시키는 구원론이다.
그러나 “의”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여할 책임적인 측면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은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겉옷은 구약과 달리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가르킨다고 보아야만 한다.
계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행실”은 “디카이오마”이며 “법적 선고”을 말하며, 롬5:16-18의 “의롭다하심”에 사용된 단어이다. 위 본문에서 보듯이 이 세마포는 하나님이 허락하여 입게 하신 옷을 말한다. 전태식목사는 이사야본문을 인용하여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이 다른 것으로 구별하고 있는데, 의의 겉옷도 하나님이 더하여 주시는 것이다.
사 61:10-11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마태복음에서도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악하거나 선하거나를 막론하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었으며, 길에서 만나는 대로 초청된 그들이 예복을 미리 준비하였을 리가 없다. 그 당시 왕국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예복이 왕국에 미리 준비되었다고 한다. 즉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믿음의 의”가 없는 사람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마 22:9-12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더욱이 전태식목사는 의의 옷이 더러워질 수 있다고 하면서(64쪽) 항상 씻어 희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계7:14과 22:14을 인용하는데, 계시록 본문은 예수의 피에 옷을 씻는다는 것으로서, 전태식목사는 예수의 피에 옷을 씻어도 그 옷을 항상 씻어야 한다는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다.
전태식목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약의 성경구절을 모두 외면한 채 왜 일부분의 성경만을 인용하여 인간의 책임과 의지가 별도로 필요한 것처럼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 105쪽 하나님의 백성이 질병에 걸리는 이유 :
모든 질병을 하나님이 주시며, 치시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음. 그렇다면 질병과 사고, 재난과 같은 악을 하나님이 모두 주시는 것인가? 그러한 관점은 구약의 사람들이 생각하던 관점으로서 모든 질병이 죄 때문으로 알았다.
▶ 115쪽 B(21:24-25) 도표의 “신약의 법”
도표는 “신약의 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시는 의의 기준 혹은 잣대로 보아야 한다. 신약에서는 율법을 더욱 철저하게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내면적인 기준은 예수님이 보시는 의의 기준을 뜻한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요구하는 의의 기준을 내면적으로 까지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예수님이 더욱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신약성경이 말하지 않는 심각한 구원론의 오류이다.
산상수훈은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이 보시는 엄격한 기준의 잣대로서 더 내면적인 율법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반어법적인 강조적인 의미로 보아야만 한다. 즉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율법주의로서는 더욱 철저한 의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신약에서 말하는 법은 새로운 의 즉 “믿음”이다.
▶150쪽 회개와 회개예물
발씻음을 회개로 해석한 것은 옳지만, 그것을 자백으로 해석하면 구원파가 사용하는 용어와 같다. 구원파들은 회개는 일생에 한번만 하며, 그 이후로는 자백만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151쪽에서 이것을 죄와의 단절을 회개의 예물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틀리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킴이며 방향전환을 말하는 것으로서, 예물과 아무 상관이 없다. 더욱이 예물을 드려야만 회개가 된다는 주장은 심각한 오류이다.
과연 회개의 예물을 바치지 않으면, 죄와 단절이 되지 않거나 죄사함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예수 십자가 제물은 불완전한 속죄제물이었는가?
▶ 6쪽 5:17 완전케 하다:
아바드성경은 “구약의 법 즉 겉의 법에 속의 법(마음의 법)을 더하여 율법을 완전케 하려 혹은 완성시키려고 오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변승우목사의 해석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을 마음까지 지키는 더욱 엄격한 율법으로 완성시키려고 예수가 오신 것인가?
예수 십자가 대속 이후 성도들은 더욱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인가?
▶ 7쪽, 5:20 신약의 법(겉의 법 + 속의 법)을 지켜 마음까지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해석
율법적인 해석
신약에서 속사람과 겉사람은 육체의 소욕(거듭나지 못한 인간적인 소욕)과 성령의 인도(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 12쪽, 8:25, 구원
죄에서 구원
환경에서 구원
영혼의 구원
구원을 이렇게 분류하지 않는다. 만일 환경에서의 구원도 구원이라면 왜 신약의 십자가 이후 제자들은 고난과 핍박과 순교를 당하였는가? 가난과 질병이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인가?
구원이라는 개념이 바로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이것을 영혼의 구원으로 분류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분류로서, 아바드성경은 계속 이러한 구원의 분류가 반복되어진다. 이것은 구원파가 주장하는 영혼의 구원, 생활의 구원, 몸의 구원과 무엇이 다른가? 구원이 여러 가지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며 구원에 대한 개념이 발전되어왔던 것뿐이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하며, 구약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신정통치적인 체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위험이나 질병에서 피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러한 구원이 포로생활을 지나면서 정치적인 개념, 즉 포로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확인하고자 하였던 것도 예수가 로마로부터 구원하여줄 정치적인 메시야로 기대하였던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신약에서 구원의 개념은 죄로부터 벗어남으로 인한 종말적인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며, 과거적인 시제의 구원, 현재적인 시제의 구원, 장래적인 시제의 구원을 포괄한다. 예수는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이며, 환경의 구원을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다.
▶14쪽, 9:37,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천국복음을 가르쳐 알곡 만들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은 많은데 천국복음을 가르쳐 백성을 알곡으로 만드는 목자들이 적음을 말한다. 즉 대부분의 목자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전태식목사가 천국복음을 전하며 일반 목사들은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는 배타적인 교만과 독선으로 보인다.
▶ 28쪽, 17장 C.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17:20)
아바드성경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산 믿음이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해석을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다는 뜻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이며, 행함과 관계가 없다.
▶ 32쪽 F 약대가 바늘 귀로….(19:24)
아바드성경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으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라고 해석을 한다
구제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행위구원론적인 주장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성경본문은 구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 19:25-26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37쪽 C. 예복(22:11) : 성도들의 옳은 행실,
사61:10 구원의 옷과 의의 옷
계22:14 두루마기
계19:8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 성들의 옳은 행실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를 의미한다.
▶ 109쪽 F 율법(10:26)
아바드 성경은 “율법은 하나님과 택한 자 사이에 맺은 언약이며, 이 언약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라고 해석하므로서 명백한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말하고 있다.
▶ 110쪽 H 10:30-37, 111쪽 윗부분, 영생에 들어가려면 강도 만난자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본문의 비유는 “한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인가”(11:29)를 질문한 것으로 그것에 대한 답변이다. 이것을 행위구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강도 만난 자를 도와 주어야만 영생을 얻는가?
▶117쪽 D 구원을 얻은 자가 적으니이까(13:23)
물론 교회 안의 기독교인이 모두 구원을 받지 않으며,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성도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을 자가 교회 안에 적다는 것을 일부러 강조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마치 기존 기독교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견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바드성경은 율법주의와 행함을 강조하고 있으면서, 계속적으로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있으며, 교회 안에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좁은 문은 그당시 율법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유대교에서 예수와 그 제자들이 가르치는 믿음의 도가 바로 좁은 문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행함이나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인 측면의 책임적인 조건들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행위구원론이 되고 만다. 성경은 구원의 조건을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교회에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인 주장이 되어진다는 것을 주의하야야만 한다.
▶ 209쪽 E. (13:39) 행함으로도 의롭다함을 얻어야 한다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주장은 야고보서의 본질을 잘못 해석한 것
▶ 216 믿음의 세가지 의미
믿음을 죄에서 구원받는 믿음, 영혼구원에 이르는 믿음, 환경구원에서의 구원을 믿는 믿음으로 구별하여 분류할 수 없다
믿음은 (1) 지적요소(지식) (2) 감정적 요소(찬동) (3) 의지적 요소(신뢰) 로 분류할 수는 있다. 바람직한 믿음, 진실한 믿음은 세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믿음이다.
▶ 239쪽 H, I, J 믿음에 대한 설명
아바드 성경은 믿음을 고백하는 믿음, 영혼구원에 이르는 믿음,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구별하고 있다.
▶ 247쪽 B. (7:14) 율법을 겉의 법과 속의 법으로 분류하여, 그것을 육신의 죄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 253쪽(10:13) 죄에서 구원과 영혼의 구원을 분류하고 있음
야고보서
▶ 372쪽 B 행함이 없는 믿음(2:17)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나의 주로 고백했다 할지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없다면 영혼의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흩어진 유대인으로서(약1:1), 야고보서의 행함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의 조건으로서의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 421쪽 C (21:27)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에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데, 그 이름이 흐려질 수 있으며 지워지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5은 “반드시 흐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반대의 뜻이다.
물론 기독교인이거나 믿는 자의 구원은 취소될 수 있다. 그러나 생명록에 이름이 기록된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이 취소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은 성령의 보증과 인치심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의 구원이 취소된다는 것이 된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요 10:27-2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422쪽 22장 구원의 반열
물론 7장4절의 십사만사천과 7장9절의 능히 셀수 없는 무리를 다르게 구별하는 견해도 있으며, 그러나 같은 상징적인 표현의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십사만사천 반열과 능히 셀 수 없는 무리의 반열을 전혀 다른 것으로 단정하여 구별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열등한 반열로 분리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