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식(진주초대교회)의 잘못된 교회관
이인규
아바드 성경은 신약의 교회를 구약의 성전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으로 해석하는 잘못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특히 예배를 교회에서만 드려야 한다는 주장은 교회론의 심각한 오류이며 구약의 모형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장이다. (신구약 성경에 상당히 많은 반복을 하고 있음)
교회는 “에클레시아”로서 “에크”(…로부터)와 “클레오”(부르다)의 합성어이다. 즉 교회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는 성도들의 회중을 뜻한다.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장소, 즉 성전의 개념이 없어졌다(신 12:5, 11, 14, 마 18:20, 고전 3:16, 엡 2:21). 물론 구약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곳(성전)이 따로 있어서 오직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되었고(마18:20), 어느 곳이든지 성도가 모인 곳이 성전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고전3:16). 또한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도 성전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고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를 말씀하셨다.
또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서, 모든 성도들이 만인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바드성경은 구약의 주의 종, 제사장, 선지자를 모두 오늘날의 목사로 해석하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하더니, 구약의 성전을 신약의 교회로 해석하는 해석을 하고 있다.
▶ (2쪽) 창2:8의 에덴동산을 교회로 비유
거듭난 사람은 세상에 두지 않고 교회에 두신다는 해설
▶ 창8장 (9쪽) 교회가 방주가 아니라는 주장
아바드 성경은 하나님을 믿고 섬겼던 사람들이 8명뿐이었으므로 방주가 교회라고 생각하는 주장이 잘못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방주가 교회의 예표와 상징이라는 것은 구원에 관한 비유이며, 인원수에 대한 비유가 아니다.
위와 같은 주장은 매우 이상한 주장이다. 구원을 받는 사람이 8명 뿐이었므로 방주가 교회가 아니라는 생각은 방주에 대한 예표적인 의미는 생각하지 못하고, 본질적인 아닌 숫자만을 염두에 둔 이상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아바드성경은 왜 아담과 하와 2명만 있었다가 타락하여 쫓겨난 에덴동산을 교회라고 하였는가?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2명뿐인데 그것을 숫자로만 해석하면 천국을 예표할 수 없게 된다. 더욱이 벧전3:20-21은 노아의 홍수를 세례로 비유하고 있다.
벧전 3:20-21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히브리서의 기자는 노아의 방주를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로 비유하고 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또한 회개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임하심을 홍수 전의 회개와 비교하고 계신다.
마 24:36-39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아바드성경은 방주를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방주가 심판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해설하고 있으며, 환난을 이기는 신약의 방법으로는 (1) 성령의 방주 (2) 말씀의 방주 (3) 물질의 방주로 설명하고 있는데, 물질의 방주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에 헌금이나 십일조를 하는 것이 심판을 이기는 방주가 된다는 뜻인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물질의 헌금으로 비약하여 해석하고 있음으로 심한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성경해석을 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 거짓교회가 된다.
전태식목사의 결론이 무엇인가? 진주초대교회 교인들은 그 교회 아닌 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안되고, 헌금을 많이 하여야만 심판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것이 전태식목사의 교회론인가?
▶ 창13:4 (14쪽)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바드성경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해설을 하고 있으며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해설을 하고 있다. 특히 교회를 성전과 같은 개념으로 해석하는 부분이 수없이 나타난다.
전태식목사는 이와 유사한 구약의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성전, 교회등 택한 장소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렇다면 가정예배와 야외예배는 예배가 아닌가? 창13:4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며, 창13:18은 또다른 장소에서 단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 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더욱이 신약에서는 택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신다(요4:20).
▶ (36쪽) 창26:12-14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본문을 지시하는 땅, 교회에 머물러야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얻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논리적인 이유가 되지 않는 기복적인 신앙이다.
▶(41쪽)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서 강간을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바드 성경은 야곱이 그의 서원대로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지 않고 세겜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마치 교회를 옮기게 되면 저주를 당하게 된다는 해석이 될 것이다. 전태식목사는 주의 종을 비난하면 화를 받는다는 성경해석을 하는 것을 강조하므로 전태식목사를 자신을 비난하지 못하게 하고있으며, 제단의 장소, 성전의 장소를 강조하므로서 다른 교회로 이동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벧엘을 하나님의 집, 즉 교회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디나가 강간을 당한 이유가 세겜에서 단을 쌓았다는 것 때문이라는 어떤 설명도 성경은 말하지 않으며, 전태식목사는 세겜을 단을 쌓으면 안되는 곳으로 설명하는 것 같은데, 33장20절 이미 세겜은 아브라함이 단을 쌓은 곳이다(창12:6-8)
더욱이 창33:20 엘엘로헤이스라엘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혹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강하시다”라는 뜻으로서, 그곳에서 단을 쌓은 것이 잘못된 것처럼 말하는 해석은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더욱이 성경에서 야곱의 서원은 벧엘에서만 단을 쌓겠다는 것이 아니며,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창 28: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창 28: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창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은 창35:7과 창35:14에서 그 서원을 지키게 된다.
▶(62쪽) 창40장 교회 안에 생명(복)과 사망(저주)의 두 길이 있다.
생명나무를 복으로 상징하는 것도 매우 이상한 풍유적인 해석이다. 더욱이 네 강을 복으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된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며 특히 비손강을 물질적인 축복이라고 비유한 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비손이라는 단어는 “쏟아진 물”을 의미한다. 힛데겔을 하나님의 복이 빨리 이루어진다로 해석할 근거도 전혀 없으며, 힛데겔은 헬라어로 티그리스 강을 뜻한다. 더욱이 유브라데를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임한다고 해석할 근거는 전혀 없다.
또 성령시대를 안식에 들어가는 길과 안식에 들어가지 않는 길로 해석하여 히4:3을 인용하였는데, 히4장의 안식은 성령의 시대의 안식이 아니라, 종말적인 안식의 개념을 설명하는 해석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일곱교회를 궁극적이며 종말적인 것으로만 해석하는 것도 이상하다. 요한계시록 일곱교회는 과거일 수도 있고, 현재일 수도 있으며 장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 (69쪽) 창44-45장
아바드성경은 구약의 성전을 신약의 교회로 비유하여, 교회 안에서 심판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안에서 주어진 언약이며, 신약은 교회 안에서 주어진 언약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며 심판을 받는 자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 외에 행함이 필요하고, 그것을 별도의 의의 겉옷이라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 된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선택된 민족이었으며, 교회는 자발적으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전태식목사는 71쪽에서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신판은 믿는 자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위의 주장과 같이 그 심판이 믿음 외에 행함이 필요하다고 하면, 매우 위험한 행위구원론이 되고만다. 구약의 경우만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며, 신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롬 3:23-27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
출애굽기
▶ 86쪽, 출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본문에서 “내 앞”이 성전을 말한다는 해석은 너무 치우치는 해석이다. 모세를 부르신 여호와께서 성전에 있었는가? 위 본문이 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리라는 뜻인가?
▶ 87쪽(출5:3) F.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광야로 탈출을 시키기 위하여 바로에게 제사를 이유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즉 모세가 광야로 나가서 제사를 지내도록 바로왕에게 변명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아바드성경은 예수를 믿어야할 사람이 믿지 않을 때 받는 징계로 해석하고 있는데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경우로서 (1) 예수를 믿어도 순종하지 않는 경우와 (2)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는 자도 저주를 받는다고 해석을 하고 있다.
본문은 예수를 믿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며, 그러한 해석은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순종이 조건이라는 행위구원론이 된다.
더욱이 예수를 믿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면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 아니라 순종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 89쪽 D.(출6: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아바드성경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 안에도 모든 성도가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해석하는데, 본문은 그러한 뜻과 전혀 상관이 없다,
또한 광야생활을 교회생활로 예표하고 비유하는 것은 옳지만, 광야생활을 기복신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 93쪽 D. (출8:28)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아바드 성경은 본문에서 “멀리는 가지 말라”는 구절에 대해서 “사단이 교회에 깊숙이 빠지지 말라고 유혹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
그러한 해석은 본문과 전혀 관계가 없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다. 바로왕이 모세에게 교회에 열심히 다니라고 말하였다고 생각이 되는가?
▶ 120쪽 성전
아바드성경은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시는 것과 성도들 안에 성령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은 다르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이 말하는 “성전”의 개념을 부정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된다.
신약에서 성전은 성도들의 몸이다. 구약의 성전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 아직도 교회가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성취적인 개념을 부정하는 주장이 된다. 더욱이 성도가 성전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것은 구원론의 오류가 된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아바드성경은 고전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이 다르다고 해석하는데 명백한 오류이며 다르지 않다. 바울은 두가지의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행7:46-50에서 스데반이 비판하던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는 장소로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14쪽, 9:37,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천국복음을 가르쳐 알곡 만들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은 많은데 천국복음을 가르쳐 백성을 알곡으로 만드는 목자들이 적음을 말한다. 즉 대부분의 목자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전태식목사가 천국복음을 전하며 일반 목사들은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는 배타적인 교만과 독선으로 보인다. 진주초대교회에 대해서 문의를 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들어보면, 전태식목사가 다른 교회에 대해서 배타적이며 부정적인 견해를 자주 말한다는 것이다.
▶ 22쪽, 가라지, 13:25, 40
아바드 성경은 마귀와 그의 사자들은 창세로부터 “교회 안에” 들어와 믿음의 도를 미혹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법을 행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말한다고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교회에도 거짓믿음과 형식적 믿음이 있지만, 가라지라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뿌려진 마귀를 말한다. 밭을 교회로 해석하는 것은 신천지의 비유풀이이다
마 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0쪽, E. 내 이름으로 모인 곳(마18:20) 하나님께서 여호와 곧 자기 이름을 두시기 위해 택하신 곳, 곧 성전을 말한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무형적인 회중을 말하는 것이며, 성전이 아니다. 또한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뜻은 성전이라는 유형적인 건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38쪽 신약-혼인잔치 비유(22:14)
아바드 성경은, 청함을 받아 혼인잔치에 온 사람은 많았으나, 예복을 입어 실제 혼인잔치에 참예한 자는 적었다고 말한다. 이 비유 역시 세상에서 택함과 교회에서 택함이 구분됨을 말해준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정반대의 해석이다.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은 거절하였고, 사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을 청하여 혼인잔치에 손님이 가득했다.(마22:9-10) 과연 예복을 입어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이 적었는가? 성경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뿐이었다고 말한다(22:11)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는 것은 초청된 이스라엘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39-40쪽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방법(엉터리 알레고리적인 임의해석)
아바드 성경은 성경본문과 전혀 상관이 없는 해석을 하고 있다. 그 엉터리 해석의 목적은 교회를 떠나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 산으로 도망할 찌어다(24:16) :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환란을 이기기 위해 교회 중심 곧 예배 중심으로 살라는 것이다?
* 지붕으로 내러가지 말며(24:17) :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는 뜻이다
밭에 있는 자는…(24:18) : 성도는 하나님의 밭이므로 좋은 밭이 되라는 뜻이다.
*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24:19) : 아이밴 자와 젖먹이는 자는 평소보다 오히려 신앙이 나태하기 마련이다. 본절은 이와 같이 신앙이 나태해지는 자는 결코 환란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24:20) : 겨울은 동면의 계절이며, 안식일은 노동을 쉬는 날이므로 믿음이 잠을 자거나 쉬지 말라는 뜻이다?
이러한 해석은 알레고리적인 임의적인 해석이다.
산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간주되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은 곳도 산이었다. 유대인들의 지붕은 기도와 휴식이 가능한 지붕이었다.
집안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것은 귀중한 물건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의미이며. 밭에 있는 자가 겉옷을 가지러 가지 말라는 것도 촉박하고 급한 재앙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에 재한 경고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충분하다.
겨울이나 안식일에 대해서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충분하다. 겨울은 추춰서 도망을 가기에 지방이 있으며, 안식일은 먼 거리를 갈 수 없으므로 제한을 받는다는 뜻으로 본다.
(41쪽)
*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24:26) :
주님의 재림은 지상재림이 아니라 공중재림이다. 그러므로 광야에 있다는 말은 미혹시키는 말이므로 속지 말라는 뜻이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한다는 자체가 비정상적이다, 광야(개방된 장소)나 골방(패쇄된 장소)은 어느 장소에 불문하고 거짓 그리스도를 조심하라는 뜻이다. 본문은 공중재림이나 지상재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48쪽, 어디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분별하시는가?
하나님의 집에서…..
성경은 “밭이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알곡은 신자, 쭉정이는 불신자를 말한다.
▶78쪽 T 구름을 타고 : 교회 안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분별
아바드 성경은 반복하여 교회 안에 알곡과 쭉정이가 있다고 강조하고, 교회 안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교회 안에도 거짓 교인이 있지만, 심판은 세상의 불신자와 신자를 심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밭은 세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 95쪽 G 전도, 전도가 이스라엘 백성 곧 믿는자에게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것
전도라는 단어는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것이다. 왜 일부러 이상한 해석을 함으로서 믿는자에게 도를 전하는 것을 전도라고 정의를 하는가? 이것도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다는 주장을 고의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인가?
▶117쪽 D 구원을 얻은 자가 적으니이까(13:23)
물론 교회 안의 기독교인이 모두 구원을 받지 않으며,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성도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을 자가 교회 안에 적다는 것을 일부러 강조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마치 기존 기독교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견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바드성경은 율법주의와 행함을 강조하고 있으면서, 계속적으로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있으며, 교회 안에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좁은 문은 그당시 율법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유대교에서 예수와 그 제자들이 가르치는 믿음의 도가 바로 좁은 문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행함이나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인 측면의 책임적인 조건들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행위구원론이 되고 만다. 성경은 구원의 조건을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교회에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인 주장이 되어진다는 것을 주의하야야만 한다.
▶ 120쪽 D 자기 십자가(14:27)
아바드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주의 종의 십자가, 성도의 십자가”를 구별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 148쪽 (4:21)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바드성경은 이것을 “예배는 반드시 성전에서 드려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본문은 정반대의 해석이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면 하나님이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아오신다는 뜻이다.
▶ (4:22) 구원이 유대인에게 남이니라 :
아바드 성경은 본문을 “신구약시대를 막론하고 반드시 유대인의 예배를 따라야 한다”고 해석을 한다.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주장이며, 구원이 유대인에게 난다는 것은 메시야가 유대인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이상한 해석은 과연 아바드성경이 정상적인 성경인지 의심스럽게 한다.
▶ 174쪽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1) 하나님의 집(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2) 주의 종을 사랑하는 것이다
1. 주의 종의 말에 순복하는 것
2. 주의 종의 허물을 덮어주고 보호하여 주는 것
3. 주의 종에게 쓸 것을 공급하여 주는 것
고린도전서
▶263쪽 1장 교회 : 교회를 구약의 성전으로 적용하고 있음, 교회론의 심각한 오류
고린도전서에는 교회의 개념의 정의되어 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교회(에클레시아)는 무형적인 성도들의 회중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교회”란 원래는 벽돌건물의 예배당이라는 공간적인 장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약의 “에클레시아”는 행19:32절의 (무리)로 사용되었고, 39절의 (민회)에서는 아데미 신전에 모인 많은 무리들에게 사용된 적도 있으며, 그와 같이 모임을 가르키는 회중을 가르킨다. 또한 행7:38에서는 “광야교회”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즉 이스라엘의 회중을 누가는 광야교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곧 신약에서 교회를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에클레시아”의 본래적인 의미, 즉 애굽으로부터 광야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중을 교회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또 신약의 사복음서에서는 마태만이 유일하게 에클레시아,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을 때에(마16:16), 예수님은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16:18) 즉 오늘날 교회란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그러한 고백을 하였을 때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와 같은 고백을 알려준 것은 하나님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곧 교회가 되는 이유는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성경에서 교회의 명칭은 “그리스도의 몸”(고전12:27, 엡1:23, 골1:18), 믿는 개인의 몸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성전”과 “성령의 집”(고전3:16, 벧전2:5, 엡2:21-22), “진리와 기둥과 터”(딤전3;15), 또는 “그리스도의 신부”(엡5:25-32)라는 비유적인 표현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하더이다.”(요4:20)
여인은 예배할 곳(장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때(시간)에 대해 말씀하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
거룩한 산만이 예배드리는 곳이 되지 않으며, 성전만이 예배를 드리는 곳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온 세상에 충만하게 임재하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 274쪽 C 교회에서 멸망 받는 자의 수가 많다.
아바드성경은 변승우목사와 같이 교회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적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기존의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이며 배타적인 구원관을 말한다. 물론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며, 형식적이고 거짓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과 행함, 순종등의 행위를 강조하면서 교회에 구원을 받을 사람이 적다고 주장한다면, 그 구원관은 믿음이 아닌 행위구원이 되어지지 않는가? 과연 누가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 받을 사람에 대해서 숫자가 적다거나 많다고 판정할 수 있는가?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의 구원관이 과연 무엇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시종일관 행함과 율법, 순종등을 강조하면서 교회에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다면, 오직 믿음을 주장하던 바울과 루터, 캘빈, 웨슬레등은 무엇인가? 만약 그러한 구원관이 옳다면 가톨릭에서 개혁을 하여 나온 개신교가 잘못이란 말인가?
게다가 교회를 옮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을 해석하고 있으며, 목사를 비방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해석을 하고 있지 않는가?
▶ 251쪽(9:27) 교회 안에서 구원 얻는자가 적다고 해석
변승우목사와 동일한 해석으로서 부분적인 구약의 성경만을 해석한 것
디모데전서
▶ 338쪽 B, 교회에는 언약궤가 있어야 한다?
히브리서
▶ 360쪽 D (7:18) 폐하여진 “전엣 계명”은,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7:12의 제사직분과 제사장제도만을 가르킨다는 주장
히브리서에 언급되는 언약은 예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말한다. 그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대조가 되는 것이다. 마치 제사만이 없어졌다는 주장은 잘못된 율법주의이다.
▶380쪽 E. (3:20) 교회 안에서 구원을 얻는 자의 수가 적다.
아바드 성경은 계속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가 적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물론 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자가 적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구원주이며 심판주이신 하나님이 아닌 제 3자가 어떻게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가? 노아의 방주에서 8명이 살아났다는 것과 교회에서 구원을 받은 숫자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배타적인 주장은 이단들이 주로 하는 주장과 같으며, 일반 기독교의 가르침을 틀리다고 전제하는 주장이 되므로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마치 자신만이 올바른 가르침을하며, 자신의 교회만이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381쪽 D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4:18)
잠언11:31의 칠십인역을 인용한 것으로서, 의인이 실제로 겨우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경각심을 높이기 위하여 강조를 한 것이다. 성경을 정반대로 해석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