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식(진주초대교회)의 잘못된 목사관

  • 6월 17, 2016

                                       전태식(진주초대교회)의 잘못된 목사관


                                                                                                           이인규

 

구약의 “주의 종”과 “선지자”들이 오늘날의 목사인가?

구약의 “제사장”이 오늘날의 목사인가?

주의 종의 허물을 덮어주면 축복을 받고, 주의 종을 비난하면 저주를 받는가?

 

이러한 주장이 아바드성경에서 수없이 언급되고 있으며, 전태식목사의 설교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으로 인하여, 마치 축복과 저주가 목사를 대하는 방법에 달려 있다고 설명함으로서, 목사의 위치를 신성불가침적인 영역으로 올려 놓고 있다.

 

또한 구약의 주의 종, 선지자, 제사장을 오늘날의 목사로 해석함으로서, 구약의 모형론(typology)과 예표성을 부정하며, 개신교의 만인제사장 교리도 부정하고 있다. 더욱이 축복과 하나님과의 동행의 조건을 목사에게 대접하며, 목사를 비방하지 않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의 종의 허물을 덮어주면 축복을 받고, 주의 종을 비난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주의 종을 신격화하거나 축복의 조건으로 해석하는 심각한 교회론의 오류이다. 특히 구약의 성경위인들과 선지자들을 주의 종으로 해석하거나, 신약의 사도를 목사로 적용시키며, 주의 종에게 쓸 것을 공급하여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목사를 신성화시키는 지나친 주장이며 심한 거부감을 일으킨다.

 

목사는 신약에서 성도를 양육하는 교사적인 직분이며, 나아가서 교회를 대표하고 치리하는 직분이다.

구약의 제사장은 오직 구별된 레위인만이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별은 매우 엄격하게 구별되어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제사장은 언제나 레위인 중에서 아론의 자손만이 계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없어지고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성도는 누구든지 만인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5-9)

 

아바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창9:22 (11쪽)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아바드성경은 함이 그 아비 노아의 하체를 보았던 성경구절에 대해서, 오늘날로 볼 때 주의 종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한 행위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완전한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며, 더욱이 주의 종의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축복을 받는다는 해설과 주의 종의 허물을 드러내고 비방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해설은 잘못된 주장이다.

과연 창세기9:22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목사가 잘못하여도 덮어주어야만 축복을 받는다고 해석할 수 있는가? 성경의 멧세지를 왜곡시키는 심각한 오류가 될 것이다.

 

▶ 창12:17 (14쪽)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아바드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종으로 세운 자를 괴롭게 하는 것을 미워하신다고 해설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목사중심주의적인 해석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아바드성경의 가장 중요한 멧세지는 목사는 잘못하여도 덮어주어야만 축복을 받는 다는 것인가? 성경에는 그러한 말이 단 한마디도 없다.

 

▶ 창18:5 (20쪽)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한 것을 “주의 종을 대접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계속 이렇게 성경구절을 주의 종(목사)의 경우로 적용시키는 것은 자가당착적인 해석으로 거부감이 들게된다. 이러한 이상한 비유는 아바드성경에서 수없이 나타난다.

 

▶ 106쪽 B(16:8) 모세를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인용하여, 주의 종을 원망, 비방,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 비방, 대적하는 것이다로 해석

아바드성경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설명되는 목사의 신격화, 교주화이다.

 

▶ 116쪽(22:28)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과연 재판장이 목사를 말하는가? 본문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엘로힘”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구약 고대의 재판장의 권세가 하나님께로 온다는 의미와 함께, “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재판장을 목사로 해석한다는 것은 주의 종을 신격회하여 욕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목사중심주의가 된다.

 

▶ 119쪽 25장 (출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구약에서 예물을 가져오라는 구절을 모두 교회의 예배에서 물질을 바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교회론의 오류이다. 예배는 물질이 아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며, 구약의 제사와 다르다. 이러한 반복적인 주장은 모두 수정하여야만 하며, 교회론과 예배론의 심각한 오류가 된다. 아바드성경은 물질과 헌금을 교회로 바치는 것과 목사의 비방하지 못하며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축복을 받는 것으로 반복하고 있다.

 

▶ 124쪽, D 출 28:2-3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제사장의 옷을 지어주는 것과 오늘날 목사의 쓸 것을 공급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계속 반복되는 치명적인 교회론의 오류이며, 목사 중심주의적인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다. 특히 주의 종을 공궤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주장은 목사를 신격화하는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민수기

▶ 209쪽 D(8:19) “레위인을 취하여 아론과 그 아들에게 선물로 주어서….”

오늘날 담임교역자에게 부교역자를 선물로 준 것으로 비유하여 해석하고 있다.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더욱이 레위인을 부목사로, 아론을 목사로 해석하는 것은 교회론의 명백한 오류가 된다,

 

▶215쪽 C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선지자, 제사장, 주의 종을 비방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목사를 구약의 선지자나 제사장으로 비유하여 신격화하는 교회론의 오류이다.

 

▶ 222-223쪽-224-225쪽 주의 종에 관한 교훈 :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목사라는 직분을 스스로 낮춘말이며, 주의 종이 성스러우며, 신격화된 직분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목사는 구약의 위인들, 선지자, 사도의 직분이 아니다.

 

갈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성경의 사도들이 자신을 낮추기 위하여 주의 종이라고 불렀으며, 신약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약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열왕기하

▶ 561쪽 F 왕하 2:23-24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엘리사를 조롱하다가 죽임을 당한 아이를 주의 종을 비방하면 죽임을 당한다로 해석하고 있다.

 

▶ 562쪽 주의 종을 비방하는 경우에 대한 4가지 설명:

(1) 함이 노아의 하체를 비방한 경우에 저주를 받게 되었다

(2)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잘못을 비방하다가 나병이 걸렸다

(3) 고라와 다난과 아비람과 온(민16장)이 모세와 이론을 비방하다가땅 속에 삼키움이 되었다.

(4) 사도바울이 아다니아가 대제사장인지 모르고 비방하다가 잘못을 시인하였다

 

독단적인 해석, 목사는 구약에서 선지자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다.

더욱이 (4) 사도바울이 행23:4-5에서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지를 모르고 책망하다가 “제사장인지 몰랐다”고 시인한 것을 주의 종을 비방하다가 사과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역이다. 행23장5절을 보면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목사가 백성의 관원인가?

구약성경에 이러한 목사 중심주의와 목사를 신격화시키는 설명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지적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위에 설명한 부분은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마태복음

▶ 1쪽 임마누엘의 반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경우

말3:7-10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할 때

민16-17장 주의 종을 대적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을 때에 대해서, 왜 “예수를 믿지 않을 때”라는 상식적인 답변은 없는가?

결론적으로 십일조와 주의 종을 대적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가?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조건이 십일조와 주의 종을 대적할 때가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십일조와 주의 종을 대적하지 않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가? 이러한 주장은 구원론에서 심각한 오류를 초래한다.

 

▶ 7쪽, 마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제자나 사도들, 곧 주의 종이나 교회를 통해 구제하는 것이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구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아바드성경은 문제가 있다.

교회중심주의, 목사중심주의, 헌물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전태식목사의 오역이다.

성도가 스스로 구제사업을 할 때에도 반드시 교회를 통하여 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본문을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여서, 그러한 의미로 해석을 할 수 있는가?

 

▶ 8쪽, 두 주인(6:24) 2.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법

1) 성전건축 및 성물

2) 제사장에게 쓸 것을 공급,

3) 규례의 예물

4) 절기 예물

5) 십일조

6) 가난한 자 구제

 

교회중심주의, 목사중심주의, 헌물중심주의이다

 

▶ 34쪽,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

(1) 주의 종을 대적할 때에

(2) 용서하지 않을 때에

(3) 더러운 물질을 드릴 때

(4) 악을 행할 때에

 

전태식목사의 주장은 목사를 대적하지 않고, 교회에 돈을 바쳐야만 기도응답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역시 교회중심주의, 헌금중심주의, 목사중심주의가 자주 언급된다. 구원의 조건, 축복의 조건등이 모두 목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 39쪽 마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모세의 자리”를 말하는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오늘날로 보면 교회에서 성도들 가르치는 주의 종이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각 회당에서는 “모세의 자리”라는 것이 있어 율법을 가르켰다고 한다. 그것을 목사로 비유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치 목사가 모세의 위치에 있다는 주장이다,

 

마가복음

▶ 58쪽 – 59쪽 E. 뿌리는 자

(막4: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동일한 비유인 마태복음12:24에서 뿌리는 자는 “주인”이며, 마13:37에서는 “인자 ”즉 예수님이다.

물론 선지자나 목사를 통하여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맞지만, 주의 종, 목사를 씨를 뿌리는 자로 해석하는 것은 본문에서 옳은 비유가 아니다.

 

▶ 174쪽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1) 하나님의 집(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2) 주의 종을 사랑하는 것이다

1. 주의 종의 말에 순복하는 것

2. 주의 종의 허물을 덮어주고 보호하여 주는 것

3. 주의 종에게 쓸 것을 공급하여 주는 것

 

매우 문제가 많은 주장이다. 교회와 목사가 하나님과 동등한가?

교회와 목사를 사랑하는 것을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자체는 심각한 오류이다.

 

▶ 265쪽, B 하나님의 동역자 : 주의 종(목사)를 사도나 선지자로 반복하여 강조하거나 격상하는 잘못된 주장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성경에서 목사는 엡4:11에 단 한번 언급되는데, pasters and teachers 로서 하나의 접속사로 동시에 두 직분이 사용되어 교사가 곧 목사님을 의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성도를 양육하고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로서 성도들은 존경과 순종을 하여야 하지만, 구약의 선지자와 사도와 비교하거나 하나님과 동격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고린도후서

▶297쪽 C. 사도(11:5) 사도를 현재의 주의 종(목사)로 적용하는 것은 교회론의 오류.

 

신사도운동의 문제점도 그들 목사를 사도라고 부르는 것 때문이다. 그런데 목사를 사도라고 적용시키고 있다. 교회사에서는 초대교회 속사도들 조차 사도라고 불리우지 않았다. 사도란 주님이 직접 임명하여 보내신 제자를 말하며, 성경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혹간은 제비뽑기로 맛디아가 사도로 임명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사도의 조건은 사도들과 함께 다니며 사역했던 사람이었다.

 

–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1l:21-22)

 

도바울도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예수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 내가 사도가 아니냐? 자유자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9:1)

 

로마서

▶ 256쪽 (13:2)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슬림이니 :

아바드성경은 이것을 주의 종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해석하여 “주의 종의 권세 = 하나님의 권위”로 해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해석이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수도 없이 많이 나오고 있음으로 목사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려는 소위 목사제왕주의의 심각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히브리서

▶ 360쪽 D (히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아바드 성경은 “전엣 계명”에 대해서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7:12의 제사직분과 제사장제도만을 가르킨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히브리서에 언급되는 언약은 예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말한다. 그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비교가 되는 것이다.

 

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렘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새 언약을 예언하였고, 히브리서의 기자는 8:10에서 예레미야서의 구절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히 8: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서는 유대인과의 옛언약인 율법이 예수의 피로세운 새 언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제사율법과 제사장 제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율법 중에서 과연 제사와 제사장 직분만 폐하여진 것인가?

과연 옛언약이 제사에 대한 율법만을 말하는가?

율법에 대한 문제에서도 아바드성경은 심각한 오류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