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제일교회(박윤식)에 대한 총신대교수 보고서
본 연구보고서는 박윤식 씨의 가장 대표적인 문제 설교 <씨앗 속임>(1981.7.5)에 대하여 평강제일교회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회에 배포한 녹취록(학산합동속기사무소, 2005.6.10)에 주로 기초한 것이며, 필요한 경우 가능한 한 다른 관련 자료들을 참조하였다.
2005년 8월 31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일동
서론
한국 교회에서 오랫동안 이단 시비가 있었다. 근래 2004년 한기총과 1991년 통합 총회가 이미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1986년 본 교단 제 71회, 1996년 제 81회 총회가 그 이단성을 결의 한 바 있는 대성교회(현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씨와 관련된 최근의 사태에 자극받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회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본 연구에 착수하였다. 우리 교수 일동은 이 연구가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이단의 홍수에 처한 본 교단과 한국교회에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데 미력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박윤식 씨에 대한 이단 시비 논쟁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인데, 주로 신앙계와 현대 종교, 풀빛목회, 목회와 신학 등에 관련 논문 혹은 기사들이 게재되었다.
‘박윤식 씨와의 대담에서 나타난 그의 생애‘ <신앙계>(1978년 5월),
‘대성교회의 내막: 박윤식 씨는 이단인가?’ <성별>(1979년 9월),
‘대성교회 박윤식 목사에 대한 질의‘ <성별>(1982년 5월호),
‘말씀의 아버지 박윤식 목사, 그는 과연 이단인가?’ <현대종교>(1983년 3월호),
‘박윤식 소속 교단, 총회 특별위에서 이단으로 제명‘ <현대종교>(1983년 9월호),
‘박윤식 교리 성서적으로 짚고 넘어 갑시다‘ <현대종교 (1985년 4월),
‘박윤식의 이단교리를 공박한다‘ <현대종교>(1985년 6월),
‘박윤식 교리, 정통 칼빈주의자인가?’ <현대종교>(1985년 7-8월),
‘박윤식의 이단적인 주장 철회하기를 촉구한다‘ <현대종교>(1985년 7-8월),
‘장로교 간판 쓴 이단자 박윤식의 비밀 말씀 공부 요약‘, <현대종교>(1985년 9월),
‘박윤식 씨와의 인터뷰 기사‘ <풀빛목회>(1985년 7월),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 <목회와 신학>(1991년 2월),
‘박윤식 교리의 이단적 핵심‘ <현대종교>(1991년 2월),
‘대성교회 박윤식, 그는 과연 이단인가?’ <현대종교>(1991년 6월),
‘박윤식의 비밀말씀 교리는 표절 작품인가?’ <현대종교>(1991년 6월),
‘자칭 말씀의 아버지 박윤식 씨는 누구인가?’ <현대종교>(1994년 4월).
본 연구를 수행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박윤식 씨에게서 나온 원 자료들을 사용하였다. 박윤식 씨에 대한 통시적인 연구를 위해, 또 그의 사상의 일관성과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그의 설교와 강의, 글, 교회에서 발간한 자료들, 10단계 성경공부를 비롯한 중요 자료들, 필요할 경우 그 외 관련 자료들도 참고하였다.
둘째, 이 자료들을 공정하게 검토하고 해석하는데 주력하였다.
셋째,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필요할 경우 원문을 그대로 실어 누구라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하였다.
넷째, 우리가 사용한 판단의 기준은 칼빈주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장로교 전통, 또는 개혁주의이다.
박윤식 씨와 관련된 최근의 자료들을 수집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단 시비가 일기 시작한 1970년 대 후반 이후 박윤식 씨는 자료들의 유출을 절대 금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80년 초 저녁 예배 시 설교에서 박윤식 씨는 이렇게 교인들에게 설교했다. “불평, 불만하는 데 오열이 숨어듭니다. 말씀을 도적질하는 간첩이 있다는 것이다. 말씀을 도적절해서 말씀의 뜻과 상관없는 그것들한테 전해주는 이러한 자가 교회에 있다는 것이다. 저는 윤 목사한테 명령합니다. 만약에 녹음테이프나 어떠한 노트를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 전해주는 자, 말만 들어도 당장 제명하기 바랍니다. 가짜 예수 믿는 것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의 뜻을 깨달았습니까? 피눈물로 기도하는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창세기 16장 강해‘(본문 창 1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회는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자료들을 상당량 입수하여 박윤식 씨의 신학을 적절하게 연구 할 수 있었다.
I. 대성교회(현 평강제일교회)의 박윤식 씨의 신앙 배경
박윤식 씨의 출생 배경에 대해 여러 자료들이 불일치하지만, 대략 1928년 5월 17일 출생했고, 원적은 황해도 서흥군 신막면 신막리 108번지로 알려져 있다. 박윤식 씨는 1967년 2월 자유감리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자유감리교회는 현재 그 활동과 본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64년 10월 전도사로서 가정 집회를 시작하여, 1968년 10월 원효로에 일석(一石)교회를 개척하고, 1969년 대방동에 일석교회를 건축하고, 1977년 7월에 대성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현재의 오류동으로 이전한 것은 1992년이며, 1994년 2월 18일 탁명환 살인사건이 발생한 후 대성교회의 명칭을 평강제일교회로 변경하였다.
1983년 10월 박윤식 씨가 직접 작성한 기록(이단 시비가 일던 1983년 10월 박윤식 씨가 직접 작성하였다. <작은 문선명 박윤식 씨와 대성교회>(정정조 지음) 11~18쪽에 ‘총회 질의에 대한 답변‘이란 제목으로 전문이 그대로 실려 있다)에 의하면, 그는 1967년 2월 자유감리회 신학교 4년을 졸업하고, 1978년 호헌 총회 신학교를 졸업했으며, 1973년 2월 국민산업대학 기업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교단 관계는 1974년 ICCC 예장교단에 가입했고, 1978년에 예장 호헌교단에 가입했으며, 1992년 12월 합동 보수 교단에 가입했다.
박윤식 씨는 자신의 가르침이 지리산에서 3년 6개월 7일 동안 기도하여 직접 깨달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확한 기간은 본인의 진술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1960년 11월 13일부터 1962년 8월 14일 14시 14분까지(1981년 10월 25일 장안산 설교), 또는 1960년 11월 13일부터 1964년 8월 14일까지(1978년 월간 <신앙계> 5월호 자술내용. 1983년 10월 박윤식 씨가 직접 작성하여 합동개혁 총회장에게 보낸 ‘총회 질의서에 대한 답변‘) 두 가지로 진술했다.) 1980년 10월 25일 <大聲>지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20년 전 박(박윤식) 목사는 혈혈단신 지리산을 찾았다. 3년 6개월 7일 깊고 험한 산속, 말 할 수 없는 공포감, 고독, 절망, 슬픔, 굶주림, 추위,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온갖 고생과 싸우면서 오직 신구약 성경 속에 감추인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몸부림쳤다. 사람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거늘 모두가 덧없이 살다가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차마 수수방관할 수 없는 희귀한 양심. 뭇 인간사 속에 서려 있는 온갖 추악하고 허망한 죄악의 냄새를 그대로 외면하고 살 수 없는 살아 있는 양심이 있어 마침내 목숨을 내어 놓고 지리산 속에서 하나님과 담판을 벌였다.” “3년 6개월 7일. 낮에는 성경보고 밤에는 피눈물로 기도했다. 이미 내 놓은 목숨이다. 40일 단식기도를 작정했다. 무서운 고난의 40일이었다. 작정기도를 끝냈으나 아무 응답이 없다. 그 절망감, 그 허무감, 탈진감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기고 다시 40일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하늘 아래 그 눈물, 그 간절함을 알 자 없으리라. 두 번째 40일 단식기도가 끝나던 날, 마침내 온 우주의 흑암을 깨고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 첫 마디가 (롬 3:4) 말씀이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그날 이후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이 임하여 (렘 1:1-3, 겔 1:1-3)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 끝까지 한 줄기로 꿰뚫어 흐르는 하나님의 중심에 부딪친바 되었다.”(‘지리산 산상 구국 기도‘ 1980년 10월 25일 <大聲> 7쪽) |
박윤식 씨는 자신의 가르침의 권위를 이 사건에서 찾으며 기회 있는 대로 이 사건을 강조한다. 박윤식 씨의 가까운 교역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삼각산에서 150일 동안 첫 번째 단식기도를 했고 이때 방언을 받았으며, 장안산에서 47일 단식기도할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지리산으로 가라고 인도하여 지리산 1915m 천왕봉까지“ 가서 “2백 명쯤 들어갈 수 있는 동굴“에 들어가 기도하면서 “1천2백 번 성경을 상고“했고 “이 말씀이 무엇일까 무슨 뜻일까 생각하면 구절로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2년 6개월 되어 기도 중에 밝은 빛 가운데 몸이 뜨는 기분이 되었고 눈을 감아도 떠도 빛이었으며, 두루마리 성경이 나타나는데 당신이 보신 성경과는 달랐다“는 것이다.(<십단계 말씀공부> 77~78쪽)
“그 다음에 총천연색 필림같이 J(예수님)이 말구유에서 나시므로 또 사생활 공생활 J(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부활하시고 승천하기까지 다 보여주심. 성경을 통해 계시를 받았고, 주님의 사생애와 공생애를 J(예수님)이 사생활 30년 동안에 요셉이 자기 子(아들) 아니니 돌려놓고 자기 자식 때때옷 입히고 J(예수님)을 처마 밑에 서 있는 것을 어머니인 마리아가 몰래 음식 갔다 먹이시고 3년 동안 핍박 받으며 말씀 증거하셨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고자 한 자 그 상을 결단코 잊지 않겠다고 하셨을까?”(<십단계 말씀 공부> 79쪽) |
박윤식 씨는 이처럼 자신의 권위를 지리산에서 받은 직접 계시에 두고 3년 6개월 7일간 기도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달았다는 의미로서 계시와 영감과 조명의 차원에서 볼 때 조명의 차원을 뜻하는 것임. 즉 하늘의 지혜를 뜻함“, “3년 6개월 7일 홀로 억만 사탄과 싸워 이긴 산 역사가 이루어진 곳“, “3년 6개월 7일간의 기도생활 중 많은 시험을 이겨내고 조명을 받아 성경의 깊은 뜻을 깨달은 것, 은혜 받은 곳이라는 뜻“(박윤식 답변서). 대성교회에서 장안산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대성교회가 연례적으로 ‘장안산 기도회‘를 갖는 것에서도 나타난다.(<휍시바> 1995년 4월 22일)
최근 서북노회가 제출한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원로목사의 이단성 여부에 관한 보고서‘에서도 이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심지어 이 기간 동안 성경을 1천 독 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고 있다. 3년 동안 매일 신구약 성경 전체를 완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변호한다.(평강제일교회 가입 사실 확인 특별위원회가 제출한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원로 목사의 이단성 여부에 관한 보고서‘(서북노회, 2005년 6월 21일) 49~50쪽) 그러나 이 때 받았다는 그의 가르침은–본 소논문을 통하여 밝혀지겠지만–상당 부분이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의 가르침과 너무도 유사하다. (박윤식 씨의 가르침은 통일교 계통의 이단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에서 빌려 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1983년 1월 18일 변찬린이 박윤식 씨에게 보낸 편지‘ <현대종교>(1998년 1월) 80~81쪽)
박윤식 씨는 신학교도 설립하여 신학생을 양성했다. 그는 성지신학교를 1971년에 설립하여 1976년 2월까지 총 121명의 학생들을 졸업시켰으며, 박윤식, 강의방, 윤성택이 주로 교수했다. 졸업생은 박윤식 씨가 시무하는 교회의 목사 장로 평신도가 70%였고 타 교회 목사가 10% 그리고 기타가 20%였다.(박윤식, ‘총회 질의에 대한 답변‘)
II. 박윤식 씨의 신학사상의 문제점
박윤식 씨의 신학사상의 이단성 여부가 1980년대에 한국교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자 박윤식 씨는 1985년 7월 6일자 <기독신문>에 ‘전국교회에 삼가 아뢰옵니다‘라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이 광고에서 박윤식 씨와 대성교회(현 평강제일교회)는 신학적으로 잘못된 길을 간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다만 자신을 오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우리는 이 광고를 통해 우선 박윤식 씨의 신학사상이 당시 전국 교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불러 일으켰고 이미 이단성 시비에 휘말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자신은 한 번도 잘못된 사상을 가르친 적이 없다고 확언했기 때문에 이 때 이전의 모든 자료들을 검토 비판하는 것이 이단 시비가 일어난 후의 박윤식 씨, 곧 지금의 박윤식 씨에 대한 평가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윤식 씨는 자신의 설교나 글 등을 지금까지 한 번도 반성하거나 철회한 적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정당함을 여러 경로를 통해 선전하고 있다. 최근 서북노회가 발간한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원로목사의 이단성 여부에 관한 보고서>는 오히려 “박윤식 목사와 평강제일교회가 이단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모범적인 하나님의 일군과 교회“라며 변호하고 있다. (각주 14: 평강제일교회 가입사실 확인 특별위원회,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원로 목사의 이단성 여부에 관한 보고서>(서북노회, 2005년 6월 21일), 2.)
그렇다면 현재의 박윤식 씨와 그의 제자들/후계자들의 사상은 1970년대에 발표되기 시작한 그의 글과 설교에도 그대로 들어있고, 이 자료들의 분석만으로도 지금의 박윤식 씨와 그의 제자들/후계자들의 사상을 저울질하고 비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구보고서의 주 재료는 그에 대한 이단시비가 있었던 1970~1980년대를 전후하여 발표된 것이지만 이것은 곧 오늘의 박윤식 씨와 그의 제자들/후계자들의 사상이기도 하다.
1.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갖고 태어난 자가 가인이라고 주장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사이에 출생한 가인은 분명 아담의 씨(자식)인데도 불구하고 가인을 뱀의 씨라고 하는 주장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 통일교 문선명의 <원리강론>, 그리고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등 통일교 계통에서 주장하는 전형적인 가르침이다. 박윤식 씨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 평강제일교회(구 대성교회)는 박윤식 씨나 평강제일교회가 문선명의 통일교에서 가르치는 하와와 뱀(천사)과의 성적 타락을 가르친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박윤식 씨는 1981년 7월 5일에 행한 ‘씨앗 속임‘이라는 설교에서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갖고 그 결과로 태어난 자가 가인이라는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각주 15: 이 설교가 언제 어디서 행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박윤식 씨 측에서 준 자료에는 1981년 7월 5일 주일 3부 예배 때 행한 설교라고 하나 박윤식 씨를 연구한 이들은 이 ‘씨앗 속임‘ 설교가 1982년 5월 경 장안산 수련회장 특별집회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평강제일교회 측이 본 신대원 교수회에 제공한 녹취록(학산합동속기사무소 작성, 2005.6.10)을 사용하였다.)
– 씨앗 속임 – 기쁠 ‘희‘(嬉)자를 봐도 또 계집 녀 자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저 하여튼 세상에 제일 나쁜 것도 계집 여자가 붙어 있고, 좋은 것도 계집 녀 자가 붙어 있어요?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분명히 너희 아들 낳게 해줬다 했으면야 ‘아멘!’ 믿어야 될 텐데 아, 요놈의 여자가 살짝 속였거든, 그러니깐 말씀의 영이 떠난 아담은 민충이같이 자기 씨인 줄 알고서 ‘그래, 하나님의 허락으로 말미암아 낳지‘, 알았어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는 아담이 속아 넘어가고, 또 여자 자신도 어둠의 권세 사단한테 속아 넘어가고. 그러니깐 낳고 보니까 전부 뱀 알[아이], 뱀의 씨들만 낳았다 그 말입니다. 알았지요? 창세기 4장 1절, 창세기 4장 1절. 다 같이 시작. 교인일동: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목사(박윤식): 자, 이것 보세요. [짝짝짝]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분명히 한자리 같이 했죠? 했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말했는고 하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했다.” 아담이 말하지 않고 그 여자가 재치 있게 먼저 하와가 뭐라고 말했는고 하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했다“했단 말입니다. 알았지요? 이거 봐, 이거 봐. 세상에 쉽게 말하면은 여자가 남편 있는데 죄를 졌습니다. 어떻게? 춤바람 나 가지고 놈팽이와 같이. 이거는 뭐 세상에 있는 사실 아니오? 그래 어째서 아이를 낳았어요. 뗄려고 애쓰는데 남편이 자기도 동침했기 때문에 ‘내 아들이겠거니‘, 하고선 ‘떼지마, 아, 딸 밖에 없는데 아들인지 알게 뭐야‘. 낳은 다음에 가만히 보니까 그 여자는 춤춘 남자 얼굴을 알겠어, 모르겠어? 알겠지? 닮았다 말이야. 그러니까 보기 미안하니까 ‘에게게 당신 닮았네‘. 그렇겠어, 안 그러겠어? 그러니까 오늘날까지 주석에도 없어, [찾아도] 잘 들어. 그러니까 떠들지 말라는 거야. 잘 들어. 깊은 얘기, 깊은 얘기 들으면 다 벌렁 벌렁 넘어질 사람들이 무슨 깊은 얘기, 깊은 얘기 말이야. 이날까지 성구[성경]에 대해서 의심 없이 우리가 연구도 하지 않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서 지나왔다 그 말이야. 그런데 그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낳은 자식 같으면은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일을 해야 할 텐데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정말 방해하고 별 지랄들 다 했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벌써 씨가 달라.… 목사(박윤식):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로 말미암아 잉태가 되었다니까 남편되는 아담이가 끄떡끄떡 했다 그 말입니다, 자기 아들인줄 알고. 그런데 하는 짓이 자기 아들이 아니야, 하는 짓이. 그래서 예수님이 그 당시에 종교지도자 목사, 장로, 제사장 향해서 하는 말씀이 ‘독사 새끼들아, 뱀 새끼들아, 니 애비의 짓을 니가 행한다‘고 말씀했지요. 보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들에 논두렁에 다니는 뱀보고 말했나? 종자가 달라. 알았어요? 창조주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지, 그 당시 제사장 뭐 말라빠진 것야. 그런 사람 말들을 필요 없어요. 자, 그러면 가인의 정체, 이것 보세요. 가인이 분명히 하나님께[로]서 낳았다면 그 정체가 행함이 깨끗해야 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것 보세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낳은 자식은 과연 하나님이 허락한 축복 속에서 자라야 된다 그 말이야. 근데 이게 하는 짓이 달랐거든.
목사(박윤식): … 자, 이것 보세요. 이 가인이 분명히 아담의 아들이었다면 아담이 살인자가 됐어? 아담이 살인자요? 못된 나무가 못된 열매를 맺고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요? 그러니까 이 성구를 봐서도 이 가인은, 잘 들으세요. 써, 이 아담한테, 인류[이브]한테 씨앗을, 씨를 속이는 작전을 하고 있다 그 뜻입니다. 알았지요? 목사(박윤식): …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원어성경을 보든가 기도하는 가운데 보시게 되면은 ‘아하, 이렇게 속임을 통해서 왔구나‘[낳았구나] 말이야. 그러니까 이거보세요. 가인은 살인자의, 거짓말쟁이의 그 씨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알았지요? 이것 봐요. 자, 우리 솔직히 말합시다. 그래서 내가 족보를 내 놓지 못한 것은 내 할아버지나 아버지나, 또 잘 들어요. 또 뭐인고 하니 남자[남들] 따질 필요 없이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나 정말 밀양 박 씨의 계통을 통해서 낳[았]느냐, 중간에 우리 어머니나 우리 할아버지가 아니, 우리 할머니가 새치기해서 내가 실은 문 씨인데 박 씨 집안에서 낳기 때문에 내가 박 씨로 내가 됐느냐. 전 세계, 이거 봐요. 인류 역사 가운데 씨앗 속임이 있어, 없어? 틀림없지요? [틀림없어] 난 밀양 박 씨를 믿지 않는 사람이야. 솔직히 말해서. 은혜 받은 이후로 절대 믿지 않아. 과연 순수하게 우리의 조상이 말이지요, 우리의 조상이 정말 박혁거세 계통으로 나왔느냐, 할머니가 ‘아차‘ 하는 순간 강간을 당했든가, 우리 조상 가운데 우리 할머니가 평양 기생이라든가 이런 가운데 술을 따라주다 ‘마셔라, 부어라‘ 하다가 다른 씨를 받아서 이렇게 나를 또 낳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내가 후레아들, 내가 쌍놈이오? 밝히 믿자고, 밝히. 그래서 예수님으로서 씨앗 속임을 다 알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주겠다, 새 이름을 주겠다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야. 알았어요? |
1) 박윤식 씨는 하와가 아담을 속여 가인을 낳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담은 가인이 자기 씨인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씨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가인은 사탄이 아담 몰래 하와의 육태 속에 심어 놓은 씨, 하와가 아담을 속이고 ‘씨앗 속임‘을 해서 낳은 ‘뱀의 씨‘, ‘뱀의 알‘(아이)이라는 것이다.
2) 가인이 하와가 아담을 속이고 낳은 뱀의 씨라면 하와와 뱀과의 성관계를 통해 가인이 출생했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이다. 하와가 ‘씨앗 속임‘을 해서 출생한 가인은 영적 환영일 수 없고 육적 자식임이 분명하다. 성경에 나오는 가인이 시공 속에 존재했던 실제 인물이었고, 박윤식 씨의 설교에서도 하와가 가인을 낳고 눈으로 확인하면서 “에게게 당신 닮았네!”라고 아담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와가 대체 누구와 관계를 갖고 이 뱀의 씨를 낳았겠느냐 하는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다. ‘뱀의 씨‘라는 말은 곧 가인의 정체를 알려주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첫째, 박윤식 씨는 그의 ‘씨앗 속임‘ 설교에서 하와가 아담을 속이고 낳은 자식인 가인을 ‘뱀의 씨‘라고 불렀다. ‘뱀의 씨‘란 뱀에게서 나온 ‘씨‘(자식)라는 의미이다. 박윤식 씨는 하와와 뱀의 관계를 전제하고, 이 관계에서 출생한 씨임을 밝히기 위해 ‘뱀의 씨‘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둘째, 가인의 출생을 말하는 이 문맥에서 하와와 뱀의 관계란 성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 아들의 출생은 남녀 결합의 결과인데 하와와 뱀과의 관계에서 ‘뱀의 씨‘가 태어났다고 하면 누구라도 하와와 뱀의 성관계 이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와가 아담을 속이고 ‘뱀의 씨‘를 낳았고, 그 ‘뱀의 씨‘가 아담의 씨가 아니라면 하와와 뱀과의 성관계를 전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난 6월 7일 본 교수회의 연구보고가 발표된 후 박윤식 씨는 어떻게 파충류와 인간이 성관계를 가질 수 있겠느냐고 하며 보고서의 내용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반문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주장과도 맞지 않는 것이다.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에서 그대로 빌려온 ‘씨앗 속임‘ 설교에서 박윤식 씨는 하와를 유혹한 뱀을 실제 파충류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뱀을 타락한 천사, 사탄, ‘거짓 선지자의 암호‘(각주 16: 박윤식, ‘씨앗 속임‘ 설교녹취록(1981.7.5, 학산합동속기사무소: 2005.6.10) 12쪽)로 보았다. 박윤식 씨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본다:
‘이 독사 새끼들아, 뱀 새끼들아, 니 애비는 마귀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알았어요? 가인은 하와의 육태 속에 심어 놓은, 정말 아담이 모르는 사이에 마귀가 와서 심어 놓은 이 씨인 줄을 아담은 캄캄하게 영계가 어두워서, 영계가 정말 마비가 돼서 알 수 없는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 아시고 말씀을 잘 들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뱀은 <거짓 선지자>의 암호다‘. 뱀은 거짓 선지자의 암호. 암호. 그 다음에 두 번째, 뱀은, 뱀은 거짓말을 통해서, ‘거짓‘을 통해서 ‘다른 씨‘를 심어준다. |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상기 박윤식 씨의 진술, “뱀은 <거짓 선지자>의 암호“라는 말이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가 자신의 <씨앗 속임> 설교에서 그렇게도 많이 인용하고 의존했던 변찬린에 따르면, 뱀은 단순한 파충류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肉化)된 존재이다. “용은 타락한 지혜천사이고 뱀은 지혜천사의 하수인의 암호이다. 영적 존재인 사단 마귀는 하늘의 존재인데 이 마귀의 지령을 받고 <거짓 예수> <거짓 영> <거짓 복음>을 밀수입한 지상의 존재가 곧 뱀인 것이다.”(각주 17: 박윤식, ‘씨앗 속임‘ 설교녹취록 87쪽. 그는 “뱀이 복음서에는 바리새인 같은 거짓 선지자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고 본다.) “지혜천사는 뱀과 공모하여 하와를 유혹하였는데“(각주 18: 박윤식, ‘씨앗 속임‘ 설교녹취록 89쪽), 이 경우에 그녀에게 접근하여 유혹한 뱀은 사람으로 현현한 ‘타락한 천사‘였다. 말하자면, 천사들은 “영화된 존재이지만 타락으로 퇴화되어 사람에게 나타날 때에는 육화(肉化)되어“(각주 19: 박윤식, ‘씨앗 속임‘ 설교녹취록 310쪽)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천사들은 영으로 수렴된 존재이지만 그들이 인간에게 나타날 때 잠시 肉化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三次元 세계에서 四次元 세계로 나가면 그 몸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四次元 세계의 존재가 三次元 세계로 오면 없던 몸이 금방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렴이란 三次元 세계에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짐을 말한다.(각주 20: 박윤식, ‘씨앗 속임‘ 설교녹취록 312쪽) |
그러므로 박윤식 씨가 자신의 설교 ‘씨앗 속임‘에 언급했던 ‘뱀‘이란 하와와는 성관계를 할 수도 없는 파충류였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자신의 설교를 부정하는 일이다. 그는 뱀을 그냥 뱀으로 보지 않았다. 박윤식 씨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문선명이나 변찬린도 뱀을 타락한 천사로 보았고 그 천사가 인간 세상에 현현할 때는 인간의 모습을 입고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문선명 계통에서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실제로 하와가 아담을 속이고 타락한 천사, 곧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뱀과 성관계를 가졌고 ‘씨앗 속임‘을 통해 뱀의 씨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하와가 아담을 속이고 뱀과 성관계를 통해 가인을 출생했다는 주장은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을 비롯한 이단자들의 공통된 해석이다.(각주 21: 김백문, <基督敎根本原理> (서울: 東亞出版社工務部, 1958) 478쪽, 특히 485쪽; 문선명, <原理講論>(서울: 成和社, 1981) 80~81쪽; 변찬린, <聖經의 原理, 中>(서울: 圖書出版 大河, 1980) 13쪽) 박윤식 씨의 ‘씨앗 속임‘도 이들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각주 22: 박윤식, ‘씨앗 속임‘ 설교녹취록 5, 18쪽) 박윤식 씨의 설교 “씨앗 속임”은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각주 23: 변찬린, <聖經의 原理, 中>(서울: 圖書出版 大河, 1980) 11~18쪽을 보라. 박윤식 씨의 ‘씨앗 속임‘ 설교는 변찬린의 위 책에서 용어와 논지 그리고 내용을 그대로 빌려왔다.)
박윤식 씨는 “마귀의 비밀은 남녀 관계를 통해서 씨를 뿌리지만은 하나님의 씨 뿌리는 것은 남자가 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뿌렸다“라고 함으로써 마귀의 씨, 가인의 씨가 남녀 관계를 통해 확산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박윤식 씨의 시각에 뱀의 씨, 가인의 후예들인 인류는 모두 뱀의 후손들임을 뜻한다. 박윤식 씨는 가인의 후예 유대인들이 뱀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씨앗 속임 설교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깐 예수 당시 때 유대인들은 전부다 소속이 어디냐 할 때에 가인의 계통들입니다. 알았죠? 거다 마귀 새끼들이야 전부다.”(각주 24: 박윤식, ‘씨앗 속임‘ 설교)
최근 박윤식 씨가 ‘씨앗 속임‘에서 말하는 하와와 뱀과의 관계가 ‘영적 간음‘이지 ‘육적 간음‘이 아니라며 박윤식 씨를 변호,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각주 25: ‘서북노회보고서‘, 29~30쪽: “마귀가 하와의 태에 뿌린 씨도 상징적 간음을 의미한 것이지 육적인 성관계가 아니었다.” “한 마디로 사탄이 뱀을 통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하며 속임으로써 행한 영적 간음을 의미한다.”) 박윤식 씨를 지지하는 이들은 영적 간음을 주장하는 박윤식 씨의 주장이 변찬린의 주장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반면, 육적 간음을 말하는 문선명의 주장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박윤식 씨의 ‘씨앗 속임‘ 설교에 나타난 신학사상이 거의 전적으로 변찬린에게 의존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서북노회 보고서‘도 박윤식 씨와 변찬린을 동일한 사상계보에 속한 인물로 함께 묶어놓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변찬린이 과연 하와와 뱀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했는가만 밝히면 될 것이다. 우리는 변찬린의 진술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그 역시 하와와 뱀의 관계를 ‘육신적 성관계‘로 해석하였으며 이점에서 그의 견해가 김백문, 문선명의 해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것만 밝히고자 한다.
변찬린의 아래 두 진술을 주목해보라:
가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한 열매가 아니고 <마귀로 말미암아 득남>한 열매였는데 하와는 아담에게 자기의 성적 범죄(性的 犯罪)를 숨기기 위하여 <씨앗 속임>의 고백을 하였고 타락하여 영이 어두워진 아담은 가인을 장자(長子)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범죄는 지금도 허다하게 존재하고 있다. 여인들이 남편 외에 다른 정부(情夫)나 간부(姦夫)를 두고 있을 때 <씨앗 속임>의 밀사(密事)는 일어나는 것이다.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15쪽) 우리는 성경 속에 은장된 <씨의 개념>을 대각해야 한다. 이날까지 가인이 누구의 씨였는가를 모르고 막연하게 아담의 씨로 착각한 것도 씨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었던 까닭이다. 현대(現代)처럼 법의학(法醫學)이 발달되고 범죄수사가 진보된 시대라면 <가인의 혈액형(血液型)>을 검사하면 그가 누구의 씨인가를 판별하여 <씨앗 속임>의 죄를 폭로할 수 있겠지만 가인은 지금부터 6,000년 전 원시광야(元始廣野)에 살던 사람이었다. 비록 아담 하와 가인의 혈액형(血液型)은 알 길이 없으나 성경을 사경함으로써 가인이 누구의 씨였는가를 밝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듯 살인자의 뿌리는 살인자인 것이다.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18쪽) |
박윤식 씨가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인용했던 변찬린의 ‘씨앗 속임‘은 하와와 뱀 사이의 육적 성관계를 전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계를 ‘성적범죄‘(性的犯罪)로 명기하고 있고, 오늘날과 같이 법의학이 발달한 상황이라면 아담, 하와, 가인의 ‘혈액형‘(血液型)만 조사해 봐도 가인이 누구의 씨였는지 금방 밝혀질 만한 문제였다고 설명하였다. 변찬린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와와 뱀의 관계를 ‘육적 성관계‘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씨앗 속임‘에 나타난 하와와 뱀의 관계를 해석함에 있어서 변찬린과 박윤식 씨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서북노회보고서‘의 결론은 그 본래 논증 의도와는 달리 변찬린과 박윤식 씨가 하와와 뱀의 관계를 육적 성관계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오히려 증명해준 셈이 되었다.
창세기의 인류 타락 사건을 철저하게 육적 성관계로 해석함으로써 뱀의 더러운 피가 후대의 인류에게 혈통적으로 유전되었다는 이러한 성관계 중심의 해석은 김백문, 문선명에게만 아니라 변찬린, 박윤식 씨에게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결론적으로 박윤식 씨의 씨앗 속임 설교에 나타난 사상은 전통 개혁신학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비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2. 선악과를 먹은 것을 하와와 뱀이 성관계한 것으로 해석
인류의 타락을 보도하는 창세기 기사의 핵심은 인류의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에 있다. 이 타락 사건에 대하여 박윤식 씨는 하와가 아담을 속이고 뱀과의 성관계를 통하여 뱀의 씨 가인이 출생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그의 설교인 <씨앗 속임>에서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각주 26: 박윤식, ‘씨앗 속임‘ 설교녹취록 5, 18, 24~25쪽)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분명히 너희 아들 낳게 해줬다 했으면야 ‘아멘!’ 믿어야 될 텐데 아, 요놈의 여자가 살짝 속였거든, 그러니깐 말씀의 영이 떠난 아담은 민충이같이 자기 씨인 줄 알고서 ‘그래, 하나님의 허락으로 말미암아 낳지‘, 알았어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는 아담이 속아 넘어가고, 또 여자 자신도 어둠의 권세 사단한테 속아 넘어가고. 그러니깐 낳고 보니까 전부 뱀 알[아이], 뱀의 씨들만 낳았다 그 말입니다.”(5쪽)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로 말미암아 잉태가 되었다니까 남편되는 아담이가 끄떡끄떡 했다 그 말입니다, 자기 아들인줄 알고. 그런데 하는 짓이 자기 아들이 아니야, 하는 짓이. <중략> 그러면 가인은 누구의 자식이냐 그 말이야. 가인은 하와의 육태 속에 심어 놓은, 정말 아담이 모르는 사이에 마귀가 와서 심어 놓은 이 씨인 줄을 아담은 캄캄하게 영계가 [너무] 어두워서, 영계가 정말 마비가 돼서 알 수 없는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 아시고 말씀을 잘 들으시면 감사하겠습니다.”(6쪽) “이런 더러운 이 여자의 피 속에는 다른 씨들이 많이 흐르고 있어. 그러기 땜에 안심이 안 돼.”(18쪽) “예수님이 ‘아니, 내가 씨를 보겠다는데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 씨 어떻게 봅니까?’ ‘너 죽음으로 말미암아, 너 믿기만 하면 씨가 두루룩, 두루룩 쏟아지게 할께. 걱정하지 말고 믿어! 이래야 마귀가 속아서 씨를 심지 못하지, 사람을 통해 또 심기 시작하면은 또 마귀가 속여서 하와를 속이듯이 또 먹게끔 하는 거야.”(24-25쪽) |
“… 또 마귀가 속여서 하와를 속이듯이 또 먹게끔 하는 거야“라는 진술에서 마귀가 하와를 속여 무엇을 먹게끔 한다는 말인가? 여기 “먹는다“는 것은 선악과 사건, 즉 마귀가 하와를 속여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사건을 지칭한다. 위의 ‘씨앗 속임‘ 설교에서 등장하는 마귀(뱀), 하와, 먹게끔 한다는 것은 에덴의 인류 타락 사건 곧 선악과 사건을 지시하고 설명하는 것으로서 하와가 아담을 속이고 씨앗 속임을 하여 뱀의 씨 가인을 나은 것을 의미한다.
상기 인용문 중에서 중요한 부분은 “마귀가 속여서 하와를 속이듯이 또 먹게끔 하는 거야“라는 진술이다. 이것은 박윤식 씨의 성적 모티브적인 ‘씨앗 속임‘ 설교의 핵심주장과 밀접히 연계된 것으로, 마귀가 혈연관계를 통해 자기 씨를 심는 방식을 설명하는 문맥 속에 언급된 내용이다. 그의 씨앗 속임 설교에서 마귀(뱀)가 혈연관계를 통한 씨앗 속임으로 자기 씨를 심는 방식과 마귀가 하와를 속여 선악과를 먹게 만든 사건은 동일한 사건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주장은 ‘선악과적 범행‘의 함축, 즉 마귀가 하와와 성관계를 맺어 가인을 낳는 혈연관계를 맺음으로 죄가 인류의 혈통 속으로 들어와 유전되고 있다는 죄의 혈통유전설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윤식 씨의 이와 같은 입장은 변찬린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다.
“이 말속에는 ‘씨앗 속임‘의 비밀(秘密)이 숨어있는 사실을 이날까지 아무도 탐지(探知)하지 못했다. 가인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출생한 아담의 씨가 아닌 마귀의 씨였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인은 뱀의 종자(宗子) 곧 하와가 밀통한 간부(姦夫)의 씨 불륜(不倫)의 열매였다. … 우리들 혈대(血代)와 혈맥(血脈)의 뿌리를 밝히는 족보(族譜) 속에는 얼마나 많은 다른 피가 혼종(混種)되여 흐르고 있는가.” “인류 역사 속에는 얼마나 많은 <씨앗 속임>의 사건들이 은폐되어 있었던가. 우리들 혈대(血代)와 육맥(肉脈)의 뿌리를 밝히는 족보(族譜) 속에는 얼마나 많은 다른 피가 혼종(混種)되어 흐르고 있는가. … 타락한 아담은 그 영(靈)이 어두워져 <도덕(道的) 잠>에 빠졌을 때 마귀의 하수인(下手人)인 뱀이 하와의 밀통(密通)하여 그 피밭에 마귀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뱀은 거짓 선지자의 암호(暗號)이다. … 가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한 열매가 아니고 <마귀로 말미암아 득남>한 열매였는데 하와는 아담에게 자기의 성적 범죄(性的 犯罪)를 숨기기 위하여 <씨앗 속임>의 고백(告白)을 하였고 타락하여 영이 어두워진 아담은 가인을 장자(長子)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범죄는 지금도 허다하게 존재하고 있다. 女人들이 남편 외(外)에 다른 정부(情夫)나 간부(姦夫)를 두고 있을 때 <씨앗 속임>의 밀사(密事)는 일어나는 것이다.”(변찬린, <聖經의 原理 中> 13쪽) “선악과를 초극하고 생명과를 따먹고 죄와 상관없는 하와가 되었으면 그녀는 <모든 산자의 어미>가 될 수 있었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密輸入한 通路가 되므로 죽음의 母胎를 통해 죽은 인류가 출생하게 되었다.”(변찬린, <聖經의 原理 下> 19쪽) |
위에서 보듯이 변찬린은 선악과 사건을 하와와 뱀의 성관계로 해석한 것이다. 하와와 뱀의 성관계를 통해 씨앗 속임이 일어났고 이렇게 하와를 통해 인류의 죄가 들어오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성경의 선악과 사건을 성적으로 설명, 해석한 것이었다. 따라서 변찬린 역시 박윤식 씨와 마찬가지로 선악과 사건을 하와와 뱀의 성관계로 해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박윤식 씨와 변찬린의 이 같은 해석은 김백문과 문선명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1) 김백문 (<기독교근본원리>(서울: 일성당, 1958))
“… 그래서 이제 여인 해와로서 유인된바 선악과적 범행이란 사신(蛇身)으로 나타난 악령과의 육체적 음행을 말하게 되는 것이니 즉 사신(蛇身)으로 직접적 육체성교(肉體性交)를 범행한데서 해와로서 여자의 처녀정조를 박탈당한 것도 컸으나 혈통(血統)에 미친 그 범죄성(罪惡性)은 곧 육체의 성욕감(性慾感)을 거기에서 받아가진 그것으로 창조본성(創造本性)의 사랑의 반대 성리(反對 性理)인 정욕의 육성(肉性)으로 악화(惡化)된 것이다.”(485쪽) |
2) 문선명 (<원리강론>(서울: 성화사,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1981))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그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피와 살이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사랑으로 선과를 따먹고 선의 피와 살을 받아 선의 혈통을 번식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사탄”을 중심한 악의 사랑으로 악과를 따먹고, 악의 피와 살을 받아 악의 혈통을 번식하여 죄악의 사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사탄‘(천사)을 중심한 사랑에 의하여, 서로 혈연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79-80쪽) |
위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김백문과 문선명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을 하와와 뱀의 성관계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란 성관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하와와 뱀의 성관계를 통해 씨앗 속임이 일어났고 이렇게 하와를 통해 인류의 죄가 그 후손의 피 속에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는 주장은 성경의 선악과 사건을 하와와 뱀의 성관계로 해석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김백문과 문선명이 “선악과적 범행“을 명시적으로 ‘뱀이 하와를 속여 육체적 성관계를 맺은 행위‘로 주장한 것과 유사하게 변찬린과 박윤식 씨도 선악과 사건을 성적관계로 해석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따라서 인류 타락에 대한 박윤식 씨의 해석은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의 신학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들 모두가 성경에 기록된 선악과 사건을 하와와 뱀의 성 관계로 해석한 것이다.
박윤식 씨의 설교 ‘씨앗 속임‘에 나타난 입장은 인류의 타락을 철저히 성 관계와 이 성관계에 기초한 혈통 관계로 설명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영적이든 육적이든 어떤 경우라도 개혁신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요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3. 에덴동산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의 역사성을 거부함
박윤식 씨는 에덴동산의 역사성을 거부하고 있다. 에덴동산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는가?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산임을 알 수가 있죠? 그런데 사 52장1절 말씀 보니까 죄 속에서 헤매다가 예수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으로 성령의 세례 충만 받아 성결의 은총을 받은 여러분들의 심령이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이 오시갔어? 안 오시갔어? (오셔요) 창 3장에 하나님이 동방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오셨다 갔지요. 이게 실지 있는 에덴동산이 아니야. 인도에 에덴동산이 있겠다 하여 가 봐도 없고 중동 지방에도 에덴동산은 이 세상에 없읍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곳이 세상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 낙원이고 천국이야. 미신같이 믿지마. 예수 천당 아니야 말씀을 믿고 알아야 돼. |
흥미롭게도 박윤식 씨는 본 교수회가 발표한 10가지 사항 모두를 부인했으면서도 에덴동산에 관해서는 이것이 자신의 말임을 인정하였다. 에덴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에덴동산이 지구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한 말이라는 변명과 함께.(각주 27: “우리가 부인하는 것은, 에덴동산이 지금 인도, 중동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현재적 역사성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현재의 위치를 알기 어렵다는 얘기). 사탄의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고 타락하여 에덴동산에 쫓겨난 우리가 더 이상 잃어버린 과거의 에덴동산을 그리워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지금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는 영적인 의미에서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의 은총을 입은 기쁘고 즐거운 성도들의 심령이 에덴동산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의 영적 의미를 우리 심령에 적용시켜 강조한 말씀이다.”(서북노회,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원로 목사의 이단성 여부에 관한 보고서‘, 15쪽))
그렇지만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에덴이 위치했던 역사적 현장을 찾을 수 없다는 것과 에덴동산이 실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역사 속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지만 현재 찾을 수 없다고 해서 에덴동산이 실재한 동산이 아니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그가 이해한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 낙원이고 천국‘이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박윤식 씨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각주 28: <십 단계 말씀 공부>, 14쪽)을 주장한다. 똑 같은 원리를 에덴에도 적용한다. 박윤식 씨는 에덴을 영적 상징적으로 해석하며 십 단계 말씀 공부에서 하와와 아담의 타락 사건을 “기쁘고 즐겁던 마음, 즉 에덴을 잃었으니 고통의 광야로 쫓겨난 것으로 비유“(각주 29: <십 단계 말씀 공부>, 10쪽)하였다.
실제로 대성교회(현 평강제일교회)에서는 십 단계 말씀 공부 시간을 통해 ‘에덴동산‘, ‘선악과‘, ‘생명나무‘가 비유라고 가르친다.(각주 30: 홍순분, 십 단계 말씀공부 ‘타락‘, 녹취록) 인간의 심령을 에덴으로 풀어가는 것은 박윤식 씨의 사상에서 반복하여 나타난다.(각주 31: 1995년 이후는 에덴이라는 말 대신 천국이라는 말을 대체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1996년 1월 28일 <평강의 소식>에는 신학지식을 소개하는 ‘귀에 담아 둡시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 믿다가 죽으면 무조건 천국가는 줄 착각하면 안 된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것은 마음이 천국화(天國化)된 자가 죽었을 때 천국 가는 것이다.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다. 말씀 자체가 하나님(요 1장1절)인데 몰라보기 때문에 말씀 자체를 씨로 비유(마 13장18~19절) 씨가 떨어져 생명역사 이루어지고 하늘나라 아들들, 즉 좋은 씨(마 13장38절)가 되는 역사.”) 십 단계 말씀 공부 “초림”에서도 박윤식 씨는 에덴동산을 마음으로 풀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아담이 거하던 에덴동산, 기쁘고 즐겁던 그 마음이 떠나고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악이 자리 잡게 되었다.(에덴이 황야로 바뀜)”(각주 32: 십 단계 말씀공부, ‘초림‘ 23쪽)
이처럼 에덴을 상징적으로 풀어가는 박윤식 씨의 해석과 주장은 통일교 계통인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상권 ‘제 4절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나‘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많은 신학자들과 성경 고고학자들이 에덴동산의 소재를 규명하려다 실패하였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창세기 2장에 근거하여 에덴동산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발원하는 그 어디에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 에덴동산의 소재는 어딘가? 또 그 현주소는 어딘가? … 한 마디로 잘라 말해서 에덴동산은 땅에 있는 과수원이 아니다. 에덴동산은 하늘 차원에 있는 도덕 과수원이다. …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었다는 의미는 무슨 뜻일까? 이는 아담이 구도하는 모습을 시적(詩的) 메타포어(隱喩)로 나타낸 문학적 표현이었다. 생명나무가 있는 낙원은 땅의 차원이 아닌 하늘 차원임을 알 수 있다. 에덴동산은 낙원이며 동시에 셋째 하늘인 것이다. 이 비밀을 모르고 기독교는 이날까지 에덴동산이 중동지방의 어느 황야(奧地)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암호를 해독 못했으니 다른 문제가 어떻게 풀릴 수 있겠는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함정(陷穽) 때문에 에덴동산을 지상에 있는 낙원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각주 33: 변찬린, <성경의 원리> 상권, 71~74쪽) |
창세기에 기술된 에덴은 실제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공 속에 존재했던 동산이었다. 현재 우리가 이 지구상 어느 곳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에덴의 역사성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에덴동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개혁신학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비 성경적 가르침이다.
4. 자신이 “말씀의 아버지, 동방의 아버지, 말씀의 주인“이라 말한다
박윤식 씨는 지금을 성약시대라고 부르며 셈족의 후손, 그것도 동방에 동방의 육천년을 안은 아버지가 오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달픈 동방에 오신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 박윤식 씨는 자신이 직접 엮은 <말씀의 승리가>에서 동방에 말씀이 나타날 것이고 그가 셈의 후손 황인종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전 교파를 하나의 세계로 통할 수 있는 교리이면서 이 땅위에 핵심으로 세워질 수 있는 하나의 근본진리를 통한 말씀이 나타나지 않으면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찾으시려는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끝 날에 뜻을 대한 성도여! 곤충도 빛을 찾아 모이거든 하물며 성도에게 있어서랴. 마지막 이 말씀에 섭리자의 눈물을 보았던가? 한 민족이여! 끝날 뜻은 “셈”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는가? 왜 그런가?(창세기 9장26~27절) 그리하여 제일 선민인 이스라엘도 ‘셈‘의 후손이었고 예수님도 백인종이나 흑인종으로 태여 나시지 않 고 황인종으로 태어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끝날 특수 사명을 셈의 후예 곧 황 인종을 통하여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 뜻이다. (이사야 59장19절, 24장15절, 41장25절, 43장5절, 46장11절 다니엘 11장43~44절, 묵시록 7장2절) 오랫동안 깊이 잠들었던 동양의 한 민족이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사 6장1절) 우리나라 이름 중의 하나 즉 조선(朝鮮)은 외국 사람들이 일컫는 대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다. 이 조선이란 국호 역시 우리나라 민족의 사명을 나타내는 말이니 곧 세계만방에 빛을 발할 사명이 있다는 말이다. 창세기 1장3절~묵시록 22장5절까지는 빛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하나님이 한국민족에게 임마누엘 되셔서 그 빛을 세계 여러 민족에게 비취게 하실 것이다.(시 4편6절) 그리하여 우리 한민족은 그 영광의 빛을 받아 어두운 세계에 반사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합 3장3~4절)”(각주 34: 박윤식, <말씀의 승리가>(일석장로교회 전도부), 7~8쪽) |
셈의 후손으로 동방에 아버지가 오실 것이라고 말한다. <말씀의 승리가> 29장 ‘동방의 아버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달픈 동방에 오신 아버지 |
‘동방에 오신 아버지‘는 ‘말씀 아버지‘를 말한다. 박윤식 씨는 자신이 가르치는 말씀이 성경 말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말씀은 ‘동방에 오신 아버지‘, ‘말씀 아버지‘를 뜻한다. 말씀의 승리가 22장 ‘아버지의 이름 권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지금은 아버지 이름 가지고서 어느 누구 믿고 순종만하면 |
셈의 후예 곧 황인종을 통하여 오시는 ‘아버지‘, 그가 누구인가? 분명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도 초림의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박윤식 씨 자신인 것이다.
대성교회는 이단 시비가 일자 1991년 2월 목회와 신학에 대성교회 교인들이 부르는 아버지는 평범한 인간관계 속에서 부르는 아버지 일 뿐이라며 변명했지만 대성교회에서 아버지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각주 36: 1983년 박윤식 씨는 ‘말씀의 아버지, 동방의 아버지, 말씀의 주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니라(고전 4장14~15절),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대하여도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장19절)[라고 말하고] 바울은 목자적 입장을 가정적 용어를 통해서 교인을 자녀 같이 사랑하는 바울적 뜻이요, 말씀 자체는(요 1장1절) 예수 그리스도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의 믿음의 아버지였다.”(박윤식 답변서)
<말씀의 승리가>의 ‘제야의 아버지를 맞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동문을 열다 서문을 열다. 1963년의 마지막 밤이다. 고달픈 동방 이제 영광의 날이 올찌니 (각주 37: 박윤식, <말씀의 승리가>, 12~13쪽. 1996년 3월 31일 <평강의 소식>에 실린 대학선교회 문준혁이 기고한 글 ‘하나를 찾아서‘는 위 박윤식 씨의 가사 내용에 담긴 중심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나를 찾아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그를 찾는 분이 계십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나님께서는 6천[년] 역사 속에서 오직 그 하나를 찾기 위해 영원히 변치 않는 한 뜻으로 일해 오셨다. 많은 인간들의 불신과 배신 …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핍박 속에서도 홀로 눈물지으시며 그 하나를 애타게 찾으셨다. 누가 이런 심정을 이해하고 이런 사랑을 알아 줄 것인가? 누가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하나를 찾아 나설 것인가? 하나를 귀해[히] 여기시고 하나에게 나타내시는 그 뜻이 누구에게 살아 있는가? 지난 한해 대학선교회를 돌아보면 은혜 가운데 풍성한 말씀을 받아 성장한 한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받은 말씀의 터 위에서 우리의 분량 등을 채워 나가라는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열매가 없음을 한탄하시는 그 눈물을 보았다. 또 전체의 마침이 될 한 사람을 찾으라는 말씀을 받았다.” 여기 전체의 마침이 될 한 사람이 누구인가?) |
‘고달픈 동방 이 기슭에 외로이 오신 아버지‘가 과연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고 가르치셨던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이 동방에 외로이 오셨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면 ‘고달픈 동방 이 기슭에 외로이 오신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
대성교회에서 발행한 기관지 <대성> 7호(80. 7.25) 3면에는 “말씀이 인격화한 사람, 인격이 말씀화된 사람, 인격화된 신앙, 신앙화 된 인격의 사람이 역사 위에 걸어와서 밝히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때입니다“(각주 38: <대성> 7호(80. 7. 25), 3쪽)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겠는가?(각주 39: 평강제일교회 교인들은 박윤식 씨를 참 아버지, 선의 아버지, 말씀 아버지로 따르며, 성경에서 말씀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대성교회 당회장을 지낸 김 모 목사의 말에 따르면 박윤식 씨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사람이 200명 쯤 되며 전교인의 20% 쯤은 박윤식 씨를 말씀 아버지 재림 예수로 열렬히 믿고 있다“(정정조, (1980년 10월 25일 <大聲>, 7면)고 한다.) ‘역사 위에 걸어온 한 사람이며 말씀이 인격화된 한 사람‘이 2000년 전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초림 예수를 가리키는 것인가?(각주 40: 대성교회에서 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995년 4월 22일 자 대학선교회가 발간하는 <휍시바>에는 회장 박희창이 ‘때를 바로 아는 지혜‘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성경의 때는 어떤 시간적 개념이 아닌 구속사적 사건이나 그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을 지칭한다. … 그 의미를 확대하여, 때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아는 영적 분별력을 말한다. … 이제 우리는 아버지 격의 말씀이 우리 앞에 섰을 때, 그 말씀의 능력을 믿어 드리고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 앞에 선 ‘아버지 격의 말씀‘이 누구를 말하겠는가? 탁명환 사건이 난 이후에도 대성교회 안에는 여전히 우리 앞에 선 ‘아버지 격의 말씀‘이 존재하고 있고, 그가 가르쳐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성경에는 구약의 때, 신약의 때, 성약의 때 등 세 가지의 때가 있는데 구약과 신약의 때에는 ‘은유와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성약의 때에는 동방에 외로이 오신 아버지를 통하여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이다.(각주 41: ‘성약‘의 때는 김백문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며, 이후 통일교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다. 통일교에서는 1994년부터 성약시대에 진입한 것으로 보고 1994년 성약시대 원년으로 보고 있다.) 박윤식 씨는 이렇게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높이며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삼위 일체 하나님만을 내세우는 개혁신학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 성경적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5. 말씀과 진리를 구분한다: “주님은 말씀의 실체요 진리는 주님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참(眞理)”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다. 그런데 박윤식 씨는 말씀과 진리를 구별하며 말씀은 생명이라고 강조하고 진리는 참이라고 하나 결국 사망이라고 한다. 그에게 진리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진리를 통해 말씀에 이른다고 보고, 진리 단계에 머무르지 말고 말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진리 단계를 떠나서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박윤식 씨가 과연 말씀과 진리를 구분하고 있는가는 박윤식 씨 자신이 밝힌 답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1983년 10월 박윤식 씨는 말씀과 진리를 구분한다는 비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말씀과 진리 |
그의 답변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도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는 것이 명백하다. 박윤식 씨는 “주님은 말씀의 실체요 진리는 주님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참(眞理)”이라고 주장하나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며, 진리 자체이시다. 박윤식 씨는 진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진리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진리의 양면성 즉 그 중요성과 한계가 동시에 노출된다.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고 ‘진리‘만으로는 부족하고 진리 단계를 넘어 말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진리를 넘어 ‘말씀‘을 생명을 낳는 좋은 의미로 사용하여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의 성취를 평가 절하한다.(각주 43: 1982년 <대성>에 실린 레슬링 출신 박성모 전도사의 간증의 글에서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 1991년 목회와 신학에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말하는 ‘진리‘란 “세속적 인위적 진리를 말한다“(각주 44: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 <목회와 신학> (1991년 2월), 64쪽)고 변명했지만 십 단계 말씀 공부나 기타 자료를 참고할 때 사실로 보기 힘들다.
최근 들어 여러 자료를 통해 박윤식 씨와 대성교회가 진리와 말씀을 구분한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 모함이라고 주장하나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첫째 기관지 <대성>에 실린 대성교회 박성모 전도사의 증언이고 둘째는 대성교회 대학선교회 교재에 실린 관련 내용이다. 1982년 <대성>에 ‘나는 하나님의 실수작일까?’라는 신앙 간증문에서 박성모는 이렇게 고백한다:
지난 여름 어느 날이었읍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낯선 테이프가 하나 있어 들어 보았습니다. 거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제 머리에 불꽃을 튀었습니다. 그거야 말로 지금까지 제가 찾고 찾았던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성교회 전도사님이 가르치신 성경공부 내용을 녹음한 것을 아내가 빌어다 놓았던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며칠 후 그 전도사님을 모셔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읍니다. 가르치시는 말씀은 번개 치듯 가슴에 쾅쾅 부딪쳐 왔읍니다. 그날은 진리와 말씀에 대한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의아하기 짝이 없었읍니다. 저는 지금까지 진리와 말씀을 구별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또 어디서 그런 가르침을 받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마음을 써서 귀를 기울였읍니다. 한참 만에 “아! 진리는 그 어떤 실체를 가르치는 참된 소개의 말이지 그 진리가 소개하는 실체 자체는 아니구나“하는 깨달음이 있읍니다. … 성경은 ‘진리‘를 ‘참‘이라고 해석하고 있었읍니다.(요1 4장6절, 요3장21절) 그러니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과 생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참되다고 소개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제게는 정말 큰 깨달음이 아닐 수 없었읍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저는 대성교회를 찾게 되었읍니다.(각주 45: 박성모, 나의 간증 ‘나는 하나님의 실수 작일까?’ <대성>(1982년 12월 30일)) |
이처럼 진리와 말씀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은 1980년대 초 이단 시비가 발생했을 때만 그렇게 가르쳤는가? 아니다. 그 후에도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하는 것이 평강제일교회 안에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평강제일교회로 교회 명을 바꾼 뒤에 출간된 자료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1995년 이후에 출간된 평강제일교회 대학생선교회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말씀의 단계>(The Steps to the Word)에 있는 ‘진리와 말씀‘ 주제에 도표로 다음과 같이 표시되어 있다.
진리: 땅의 것(요 3:12) 진리: 어두움(=예표, 비유) (마 13장34절, 요 16장12절, 25절) 진리: (누룩으로) 발표시킨 빵 진리: 어린 아이의 일(히 5: 11, 6: 1) 진리: 젖 진리: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 진리: 떡(마 4장4절) |
위 도표에서 보여주듯이 박윤식 씨와 평강제일교회는 여전히 진리와 말씀을 구별하고 진리를 ‘땅의 것‘, ‘(누룩으로) 발표시킨 빵‘, ‘어린 아이의 일‘, ‘젖‘,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 ‘떡‘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의 것‘으로 ‘자유케 하는 세계‘, ‘빛의 세계‘, ‘사실(또는 본체 자체)’, ‘누룩 없는 발표시키지 않은 빵‘, ‘어른의 일‘, ‘단단한 음식‘, ‘의에 대한 가르침(악으로부터 선을 구별)’, ‘포도주(하나님의 말씀)’라고 한다.
다음 <말씀의 단계>에 나타난 글이 보여주듯 평강제일교회는 예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의미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이해하는 의미와 상당히 다르다.
“진리는 말씀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다만 말씀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진리 관계에만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가 되었다. 그는 말씀 자체로써 빛과 생명의 본체이다. 그러나 본질에서 생명과 말씀의 진정한 형상인 그는 이스라엘의 몰이해와 불신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요 3장12절, 6장60절) 결국 그는 진리의 수준으로 낮아졌다. 그리고 이 진리로 하나님의 뜻을 주려고 했다. 이것은 그의 일이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삼단계로 나뉘어졌음을 의미한다.(요 17장17절, 14장6절) 진리의 단계로 떨어진 예수는, 비유와 상징으로 하나님의 뜻을 주었다. 그리고 이것들이 아니고는 그는 그것을 줄 수 없었다. 즉 그 말씀은 땅에 감추인 보화처럼 되었으며 이 숨겨진 보화가 드러나게 되는 말씀의 때가 남겨졌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말세)가 그 말씀의 때이다. 인자가 이 시대에 상징이나 비유가 아닌 드러난 말씀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뜻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그가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온전한 말씀이 인자를 통해 선포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이 완성될 것이다.(각주 46: <말씀의 단계>(The Step to the Word)(서울: 평강제일교회 대학선교회, 1995), 17쪽) |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고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두 사실[진리와 말씀]의 결론은 생명 자체인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붙잡아야만 한다.”(각주 47: <말씀의 단계> 16쪽) 진리의 수준으로 떨어진 예수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땅에 와서 비유와 상징으로만 하나님의 뜻을 주어 “말씀이 땅에 감추인 보화처럼 되었으며 이 숨겨진 보화가 드러나게 되는 말씀의 때가 남겨졌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말세)가 그 말씀의 때“(각주 48: <말씀의 단계> 17쪽)라는 것이다.
초림 주 예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억울하게 죽은 것이고, 사탄이 모르게 십자가의 피 속에 말씀을 묻어 두셨는데 말세에 그것이 드러낼 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의 승리가>에 나타나듯 ‘말씀‘을 받은 끝 날의 아버지이다. 그렇다면 그가 과연 누구이겠는가.(각주 49: 그는 1980년 6월 8일 고전 10장 1~13절의 말씀을 가지고 행한 ‘말씀이 인격화 한 사람‘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말세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의 때입니다. … 말씀이 인격화한 사람, 인격이 말씀화된 사람, 인격화된 신앙, 신앙화된 인격의 사람, 이 역사 위에 걸어와서 밝히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어서 빨리 그 말세를 잘 만납시다. 만나서 어둠을 끝장냅시다. 만나야 이 나라 이 민족이 새 역사의 아침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꼭 말세를 잘 만납시다.” 여기서 말하는 ‘말씀이 인격화한 사람‘이 누구인지 설교에서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말씀이 인격화한 사람‘은 초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미 초림하신 그 예수를 가리켜 이 역사 위에 걸어와서 밝히 나타나기를 고대한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를 만나야 이 나라 이 민족이 새 역사의 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박윤식 씨와 대성교회는 ‘말씀을 받을 기회‘(각주 50: 박윤식, ‘생각과 기회‘, <평강의 소식>(1995. 10. 22))를 놓치지 말고 붙잡을 것, ‘말씀을 만난 사람‘(각주 51: <평강의 소식> 1996년 3월 31일. 여기서 이희정이라는 한 여자 성도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온전한 마침을 이루어야 한다“며 “전체의 마침이 될 하나를 찾는 역사로 내 안에서 잃었던 말씀을 찾는 생의 전환점“을 가질 것을 권한다.)이 될 것을 촉구하였고 그리고 평강제일교회 교인들은 ‘그 말씀‘을 영접할 때 마지막 남아 있는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각주 52: 1993년 4월에 발행된 대성교회 기관지 <참 평안>에는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래서 안식일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막 2장28절).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므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히브리서 4장3~11절에서는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안식이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다윗의 예언처럼 ‘어느 날‘ 안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 말씀을 다 영접하여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
6. “인간이 신성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박윤식 씨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떠나고 사탄의 영이 들어와 사탄의 집이 되고 말았다“(각주 53: <십 단계 말씀 공부>, 46쪽)고 주장한다. 아담을 떠난 거룩한 영은 들어갈 곳이 없어 수면에 운행하시는데, 잃어버린 영을 다시 찾아 주기 위해 제사를 허락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인하여 Ad[아담]의 마음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靈이 떠나고 사탄의 靈이 들어와 사탄에 집이 되고 말았다. 아담을 떠난 (말씀) 거룩한 영은 들어 갈 곳이 없어서 수면에 운행함. 즉 人의 心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떠도는 상태. |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사탄의 영이 들어왔고, 아담을 떠난 거룩한 영이 들어갈 곳이 없어서 수면에 운행한다는 주장이나 잃어버린 영을 다시 찾아 주기 위해 제사법을 주셨다는 주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며 개혁신학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각주 55: <십 단계 말씀 공부>, ‘십자가의 피‘ 62쪽. 박윤식 씨는 할례에 대해서도 이렇게 주장한다. “할례를 받으라! (자신에 더러운 죄를 내어 보내는 의미로 신체의 일부를 쪼개어 피를 대신 내어 보냄)”)
박윤식 씨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서 잃어버린 그 영“을 찾아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면 인간이 신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서 잃어버린 그 영을 찾게 되면 본래 상태의 회복이니 하나님의 형상 즉 신성을 가지게 된다.”(각주 56: <십 단계 말씀 공부>, ‘종교란‘, 1쪽) |
이와 같은 주장은 개혁주의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최근 부활 후 영화된 인간의 상태를 두고 한 말이라고 변호하지만 그렇더라도 역시 인간은 피조물일 뿐이다. 인간은 피조물로 결코 신성을 소유할 수 없다. 신성(divine nature)은 오직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다.
7. 둘째 아담 예수님이 구원 사역을 “이루지 못하셨기 때문에 재림 예수님을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
(박윤식 씨는 ‘월경에서 탈출하자‘는 설교를 통해 자신이 주장했던 것을 1991년 <목회와 신학>에 기고한 답변서를 통해 스스로 다시 주장하고 있다. 월경은 에덴에서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보고, ‘타락한 인간, 즉 여인에게서 난 자는 모두 월경을 따라서 태어났기에 혈통과 육신으로 난 자‘(각주 57: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 <목회와 신학>(1991년 2월), 67쪽. 여기에 실린 글은 대성교회 측에서 직접 작성한 답변서이다.), 즉 ‘육신의 자식들‘로 이해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처, 사라,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월경을 통해 출생하지 않은 경우는 사단의 씨가 아닌 거룩한 씨라고 본다. 그러므로 “월경하는 여인에게서 난 육신의 자식들인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다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만 약속의 자녀로서 하늘나라의 유업을 받게 된다“(각주 58: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 68쪽)고 가르쳤다.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것을 아브라함의 첫 아내 사라,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의 잉태와 동일시하며 월경 없이 출생한 자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이 두 사람의 출생은 두 가지 측면에서 다르다.(각주 59: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 67쪽) 첫째, 앞의 두 경우 성경은 남녀 관계에서 출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지 않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동정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담의 원죄를 이어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앞의 두 사람의 경우는 원죄를 이어 받은 죄인의 탄생이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의 탄생은 원죄가 없으신 탄생이었다. 월경을 통해 낳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판단하는 것은 그 접근 방법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다.)
박윤식 씨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을 통해 구속이 성취된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기정사실로 예정되어 있던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고난의 주만 알고 있다. 피 흘려야 구원 받고 피 흘리심이 없으면 구원 못 받는다고 하고 있다. J(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오시고 죽으시기 위해서만 오셨다면 낳자마자 헤롯이 2살 이하 다 죽이려 할 때에 무엇하러 애굽으로 도망갔나? 죽으시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유다는 상 주어야 한다. 그런데 J(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고 하셨고 이 잔을 내게서 면케 해달라고 하고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셨을까? 바로 믿고 바로 구원 받기 위해 십자가에 도가 망하지 않아야 한다. 망한다는 말은 말씀을 못 깨닫기 때문에 말씀을 못 깨달으면 십자가의 도가 망한다.”(각주 60: <십 단계 말씀 공부>, 80쪽) |
죽으시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왜 그가 애굽으로 도망갔으며, 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겠느냐고 박윤식 씨는 반문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기정사실이라면 이에 일조한 갸롯 유다는 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윤식 씨를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의 원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따라서 재림 예수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Ad[아담]이 (우리 자신) 타락하여 잃은 θ[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둘째 Ad[아담](J[예수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 하시고 보내셨으나 무지하고 교만함 때문에 이루지 못하시고 다시 재림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을 λ[말씀]하셨다.”(각주 61: <십 단계 말씀 공부> ‘초림‘, 33쪽) |
박윤식 씨의 이러한 견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구원을 위한 충분한 것으로 설명하는 개혁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며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즉 기독론과 구원론에 박윤식 씨는 치명적인 하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8. 예수님이 “말씀으로 죄를 사해주려고 했으나 믿지 않으므로 십자가를 지셨다“고 주장
박윤식 씨는 구속의 사역을 예수님이 “말씀으로 죄를 사해줄려고 했으나 믿지 않으므로 십자가를 지셨다“(각주 62: <십 단계 말씀 공부> ‘십자가의 피‘, 86쪽)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십자가상에서 피 속에 이 말씀을 넣어[숨겨] 이 땅에 다 쏟으셨다(각주 63: <십 단계 말씀 공부>)는 것이다:
“피는 껍질이므로 그 속에 영을 취해야 된다. 온 인류를 살릴 수 있는 λ(말씀)이 들어 있기에 보배 피다. λ(말씀)으로 죄를 사해 줄려고 했으나 믿지 않으므로 ϯ(십자가)를 지셨다. … J(예수님)께서 이 λ(말씀)을 주어서 그 당시 이루려 하였는데 안 믿어 주므로 ϯ(십자가)상에서 피 속에 이 λ(말씀)을 넣어 이 땅에 다 쏟으셨다.(사탄을 속임)”(각주 64: <십 단계 말씀 공부>)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대속의 죽으심이다. 단번에 죽으심으로 죄인 되었던 우리가 구원을 힘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것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다. 본래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성육신의 목적이 아니라는 주장은 개혁신학에서 수용할 수 없다. 더구나 말씀으로 죄를 사해 줄려고 했으나 믿지 않아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된다. 예수님이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거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인류의 죄가 용서 받음으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피의 대속을 그 피 속에 말씀을 넣어(각주 65: <말씀의 단계> 21쪽. 여기에서 “그의 말씀은 그의 피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가 보배 피라고 본다. “그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에 예수는 아무도 모르게 그의 말씀을 그의 피에 감추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골고다의 고난의 길을 갔다“(Ibid., 22쪽)고 주장한다.) 이 땅에 쏟으셨다는 주장은 개혁신학과 근본적으로 배치된다.
박윤식 씨는 예수님께서 공생 3년 동안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12제자를 선택하여 가르치신 것을 무시하고 “그의 12제자들은 그[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지 못했다“(각주 66: <말씀의 단계> 14쪽)며 이렇게 주장한다:
“J(예수)님은 사생활 30년 공생활 3년 동안 한 사람도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십자가에 달리셨다.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인간에 대한 갈증을 나타냈다.”(각주 67: <십 단계 말씀 공부> 92쪽) |
이처럼 박윤식 씨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구원의 교리를 곡해하고 있다.
9. 신자를 생령의 씨알이라고 함
박윤식 씨는 1985년 기독신문에 게재된 광고를 통해 “본인이 섬기는 대성교회에는 다른 교리나,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용어나, 다른 구주관이 없으며“라고 밝혔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박윤식 씨는 말씀을 받은 이를 생령이라고 하며, 그를 따르는 이들을 생령의 씨알이며 말씀의 씨알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80년대 초를 전후해서 많이 사용했는데 1982년 2월 27일에 행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자‘라는 설교에서 그는 교인들을 향해 “생령의 씨알 여러분, 주 안에서 안녕하십니까?”(각주 68: 구체적인 예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자‘, <대성> 1982년 2월 27일이다.)라고 불렀다. 대성교회에서는 말씀을 믿는 사람을 다 생령이 된다고 본다.
설교만 아니라 대성교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대성>에도 그 같은 용어가 등장했다.(각주 69: ‘역사와 오늘, 그들의 얼굴을 읽는 눈알은 어디 있느냐‘, <대성> 9회 1980년 9월 25일.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성 교회 말씀의 씨알들도 720명이 1980년 9월 8일부터 12일까지 4박 5일 동안,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괴목리에 소재한 장안산(장안산) 산상에서 금식기도와 철야할 때, 모진 비바람(태풍 ‘오키드‘)과 싸워가며 국가와 민족, 나 자신을 위해 깨어 있는 눈알 되기 위해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응답받아 생령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말씀의 씨알, 생령이라는 말을 주목한다. 장안산에 간 이들은 모두 말씀공부를 충분히 마친 이들이다. 박윤식 씨가 3년 6개월 7일 동안의 고투 속에 특별한 은혜를 받은 곳에 올라가 외적 환경과 싸워 ‘생령‘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1982년 11월 25일 발행된 <대성>에는 “생령의 씨알들은 … 생령의 씨알 여러분 … 생령의 씨알의 사명 …“(각주 70: 박윤식,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백성 추격하는 자가 없다‘, <대성> 1982년 11월 25일. “생령의 씨알들은, 온갖 숨기운 것들이 백일천하에 드러나고, 심은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는 그날만을 간절히 사모합시다. 오늘의 이 혹독한 어둠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확실히 절망적이고 부정적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령의 씨알들은, ‘어두운 가운데서 빛이 비취리라(고후 4장6절)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습니다. 생령의 씨알 여러분, 대한민국에 대한 놀라운 비죤을 가슴에 안고, 이 민족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이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부르짖는 역사가 밝아오는 그날까지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 생령의 씨알들의 사명은 이것뿐입니다. 이 나라의 아들들에게 대한민국의 참 얼굴을 보여주는 것, 마침 내 온 백성이 민족부활의 비죤을 가지고 제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게 하는 이것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복스러운 한 족속, 대한민국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막, 셈 족속임을 기억합시다.(창 9장26~27절)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든지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장43절)고 주께서 친히 말씀했으니, 대한민국이 열매 맺는 백성이 될 것을 믿습니다.” 1981년과 1982은 박윤식 씨가 문선명의 계보 이단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상·중·하를 거의 그대로 인용 ‘씨앗 속임‘을 비롯한 일련의 설교를 하고 있을 때이다.)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온다. 교인들에게 한 말인 것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1991년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서 창세기 2장7절에 근거 “생령(a living soul)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산 인간이라는 뜻“(각주 71: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 <목회와 신학>(1991년 2월), 65쪽)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구태여 왜 성도들을 향해 생령의 씨알이라고 부르는가. 십 단계 말씀 공부에서는 생령(말씀)이라고 표시되어 있어 구원을 완성할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생령의 씨알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이 성경적이냐는 사실을 논외로 치더라도 생령이라는 용어 자체를 기성교회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1983년 기독신문의 광고를 통해 ‘다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 거짓임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IV. 심층 분석: ‘씨앗 속임‘ 설교의 문제점
지금까지 우리는 박윤식 씨의 신학사상의 잘못된 측면들을 일반적 관점에서 제시하여 왔다. 이제부터는 범위를 좁혀 그의 대표적인 문제의 설교 ‘씨앗 속임‘(1981.7.5)에 대한 심층 분석을 시도한 뒤에 이 분석 결과들을 통해 박윤식 씨의 신학사상의 전체 구도가 무엇인지를 밝힐 것이다.
박윤식 씨의 사상은 ‘씨앗 속임‘이란 설교에서 나타나듯이 매우 강력한 성적 주제(Sex Motif)에 의해 채색된 사상이다. 이러한 성 주제는 어쩌다가 간헐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직, 간접으로 영향을 받았던 계보상의 인물들에게서 기원된 것으로서 그의 전체 신학의 체계를 풀 수 있는 열쇠와도 같다.(각주 72: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의 본론 부분에서 어느 정도 상세하게 비교 분석할 것이다.)
‘씨앗 속임‘ 설교에 나타난 성적 해석은 변찬린의 저술 <성경의 원리>에서 나온 것으로 박윤식 씨 자신이 받았다는 ‘말씀의 비밀‘의 핵심에 놓여 있고, 그것을 깨닫느냐의 여부에 따라 사람들의 ‘인생관, 성경관, 우주관‘이 달라질(<씨앗 속임> 녹취록, 35쪽) 정도로 박윤식 씨의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다.
1. 자신만이 특별계시인 ‘말씀의 비밀‘을 받았다고 함
박윤식 씨는 자신의 설교 중에서 자신에게만 임한 특별계시로서 ‘말씀의 비밀‘을 강조한다: “여러분 오늘 귀담아 듣는 가운데 창조 이후로 오늘까지 이 말씀의 비밀은 전세계에 공개되지 않은 것을 제가 잠깐 말씀을 공개하겠습니다. 잘 들으세요“(5쪽).
그는 자신이 말한 이 ‘말씀의 비밀‘이 이단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음을 직감했는지 설교 중에서 “대성교회 박윤식 목사가 말했다는 말 하지 마세요. 왜 그러느냐, 여러분들이 좀 위험한 사람들이야, 조금만 말하면 쓸데없이 나팔 불고 말이지, 괜히 이단자 만들고 말이야“(8쪽; 20쪽)라고 입단속을 시키고 있다. 그가 말하는 ‘말씀의 비밀‘은 다른 곳에서 ‘비밀, 암호‘(12, 19쪽)라는 말로도 표현이 되는데, 마귀도 비밀 암호를 가지고 신자들을 속이고, 하나님도 비밀 암호를 가지고 마귀를 속이는 형태의 비의적 내용을 담고 있다.(각주 73: 예를 들면, “그래서 예수님이 날 때에 마리아 뱃속에서 장난질했어, 못 했어? 마귀 새끼들이 했어, 못 했어요? 못 했지, 알 턱이 있나, 비밀인데, 성령의 비밀인데“(17쪽); “마귀의 비밀은 남녀관계를 통해서 씨를 뿌리지마는 하나님의 씨 뿌리는 것은 남자 필요 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뿌렸다는 것을 믿어지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19쪽).) 박윤식 씨는 이런 비밀의 말씀은 “주석에도 없는“ 내용이라고 함으로써 ‘비밀의 말씀‘을 깨달은 자신의 권위를 부각시킨다. 왜냐하면 그는 이 “비밀의 말씀을 알 때 인생관, 성경관, 우주관이 달라진다“(35쪽)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창세 이래로 감추어진 ‘비밀의 말씀‘을 자신만이 알려준다는 박윤식 씨의 주장은 ‘진리‘와 ‘말씀‘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그의 해석방식에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혹자는 ‘진리‘란 개념은 성경 저자들이 사용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세상의 종교나 철학, 현자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진리 주장들을 가리킨다고 하겠지만, 박윤식 씨의 설교나 강의교재들을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단순히 그런 식의 개념 구분이 아니라 그의 전 신학사상을 주도하는 ‘비의적‘(秘意的) 해석구도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박윤식 씨는 ‘진리와 말씀‘을 어떤 식으로 구분하며, 또 어떻게 그것이 그의 전 신학사상을 주도하는 해석학적 중심 열쇠인가? 1983년 10월에 박윤식 씨가 합동 보수 측 총회에 보낸 ‘답변서‘에서 그는 “주님은 말씀의 실체요 진리는 주님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참(眞理)이다“(각주 74: 박윤식, ‘총회질의서에 대한 답변‘(1983.10), 4의 (1) ‘말씀과 진리‘ 부분을 참조할 것.) 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또 “비유대로 있을 때는 진리요 해명했을 때는 말씀이다“라고 하면서 이런 식으로 구분한 것은 성경의 “표면적 의미(즉 진리)와 그 문자가 뜻하는 이면적인 의미(즉 말씀)가 있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평강제일교회 대학선교회에서 만든 영문 말씀공부 교재 <말씀의 단계>(The Step to the Word)에도 ‘진리와 말씀‘이란 부분을 담고 있는데, 이 교재에서 진리는 ‘땅의 것‘, ‘어두움(=예표, 비유)’,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 등으로 묘사되고, 반면에 말씀은 ‘하늘의 것‘, ‘빛의 세계‘, ‘어른의 일‘ 등으로 묘사된다. 같은 책에는 “진리는 말씀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다만 말씀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진리 관계에만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17쪽)고 기술한다. 동일한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말씀의 진정한 형상‘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불신앙적 거부로 인해 “결국 그는 진리의 수준으로 낮아졌고“, “진리의 단계로 떨어진 예수는 비유와 상징으로 하나님의 뜻을 주었다“는 진술도 나온다. 하지만 같은 책은 계속하기를 “말씀은 땅에 감추인 보화처럼 되었으며 이 숨겨진 보화가 드러나게 되는 말씀의 때가 남겨졌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말세)가 그 말씀의 때이다“(17쪽)라고 강조한다.
감추어진 이 ‘말씀의 비밀‘이 드러나게 될 말세의 때는 언제이고 누가 그것을 알릴 것인가? 우리는 이미 박윤식 씨의 설교 <씨앗 속임>에서 “여러분 오늘 귀담아 듣는 가운데 창조 이후로 오늘까지 이 말씀의 비밀은 전 세계에 공개되지 않은 것을 제가 잠깐 말씀을 공개하겠습니다“(녹취록 5쪽)고 한 발언을 주목한 바 있다. 만일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진리의 수준으로 떨어져서 기껏 하나님의 뜻을 ‘비유와 상징‘으로 알려줄 뿐이었다면, 마지막 때 언제 ‘끝날의 말씀‘(각주 75: 박윤식, <승리가> 제4장 ‘끝까지 순종하리‘ 후렴구 참조)이 알려진다는 말인가?
자신이 만든 <말씀의 승리가>에는 ‘말씀 아버지‘에 대한 고양된 찬양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찬양곡의 서문에 나오는 박윤식 씨의 글을 보면 자신을 지시 ‘말씀 아버지‘로 신격화하는 진술들이 등장한다. <말씀의 승리가> 서문의 문맥은 ‘말씀 아버지‘가 박윤식 씨 자신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서문에서 그는 “기독교 전 교파를 하나의 세계로 통할 수 있는 교리이면서 이 땅에 핵심으로 세워질 수 있는 하나의 근본진리를 통한 말씀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전제하고, “끝날 특수사명을 셈의 후예 곧 황인종을 통하여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 뜻이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끝날 특수사명‘은 말씀의 비밀을 계시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고, 그러한 사명을 담당하는 자가 ‘빛은 동방으로부터‘라는 문구를 통해서 시사되어 있다. 빛이 임하는 ‘동방‘은 몇 단락 뒤에 ‘동양의 한민족‘ 또는 ‘조선‘으로 한국에 대한 지칭과 동일시되고 있다(서문 7~8쪽). 따라서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말씀 아버지‘는 동양의 빛으로 임한 박윤식 씨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흥미롭게도 박윤식 씨는 ‘총회질의서에 대한 답변‘에서 왜 자신이 ‘말씀의 아버지, 동방의 아버지, 말씀의 주인‘이란 식의 표현을 사용했는가라고 물었을 때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니라(고전 4장14~15절)’고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그가 그런 표현을 박윤식 씨 자신을 위해 사용한 것은 “목자적 입장을 가정적 용어를 통해서 교인을 자녀같이 사랑하는“ 뜻에서 자신을 “믿음의 아버지“로 부르게 했다고 밝힌 바 있다.(각주 76: 박윤식, ‘총회질의서에 대한 답변‘, 4의 (3)항의 진술 참조) 이로써 분명한 것은 박윤식 씨가 “말씀 아버지“란 표현을 자신에게 사용한 점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작사한 <말씀의 승리가>의 내용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을 “말씀의 아버지“라고 지칭하게 한 것은 단지 교인들을 사랑하는 목자적 입장에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의 승리가>의 가사 내용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림직한 고양된 찬양 가사를 박윤식 씨 자신에게 돌리고 있고 자신을 공개적으로 신격화시켜 찬양하게 만든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믿음의 아버지”로 묘사한 바는 있지만, 결코 박윤식 씨가 한 것처럼 고양된 언어로 자신을 찬양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여러 찬송시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려진 것들이다 (빌 2장5~11절; 골 1장15~20절 참조). <말씀의 승리가> 22장 “아버지의 이름 권세“란 가사를 한번 주목해 보자:
1. 지금은 아버지 이름 가지고서 어느 누구 믿고 순종만 하면 |
이것이 과연 “말씀 아버지“ 박윤식 씨를 위한 찬양곡이라면, 그는 분명히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올려놓는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자신을 “말씀 아버지“로 치켜세우면서 자신의 이름 하나만 가지면 “영원한 구원을 변화로 받네“라든가, 자신이 가는 곳마다 “만물들이 모두 무릎 꿇리라“고 찬양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말씀 아버지“인 자신을 믿고 울리는 기도만 하면 어떻게 “하늘과 지옥터가 무너질 것이“라고 노래 부르게 할 수 있겠는가?
2. ‘말씀의 비밀‘의 핵심은 마귀의 ‘씨앗 속임‘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함
‘씨앗 속임‘의 비밀은 주로 ‘가인‘의 출생 비밀과 연관되는데, 하와가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둘이 짜고 아담을 속여 하와의 육태 속에 ‘뱀의 씨‘(5쪽) 또는 마귀의 씨를 심어 잉태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적 주제가 매우 강한 이런 말씀의 비밀은 자신의 설교 전체 내용을 압도하고 있고, 자신이 고백한대로 마귀의 ‘씨앗 속임‘이란 전망 속에서 “인생관, 성경관, 우주관“(35쪽) 전체를 이해해야 함을 강력하게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마귀의 씨앗 속임의 메시지는 박윤식 씨의 전체 신학을 꿰는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3. 이런 씨앗 속임의 성적 해석은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의 것과 궤도를 같이 함
문제는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이렇게 성적 주제를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이다. 박윤식 씨 자신은 자신의 이런 성적 해석이 문선명에게서 왔다는 것을 부정한다.(각주 77: 이것은 1983년 6월 2일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박윤식 씨에게 보낸 ‘총회 질의서에 대한 답변‘에서 이를 부정하고 있다.) 그는 비록 자신의 말씀의 비밀이 장안산에서 “3년 6개월 7일“간 홀로 기도하는 중에 받은 것이라고 하지만(각주 78: 박윤식 씨가 1978년 월간 <신앙계> 5월호에서 자술한 내용), 그러한 비밀의 말씀 교리, 특별히 씨앗 속임의 설교는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 등의 교리에서 유사한 형태로 많이 발견된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변찬린 씨가 1983년 1월 18일자에 박윤식 씨에게 보낸 공개서한에 따르면, 후자의 설교내용이나 가르침 상당부분에서 변찬린 씨의 <성경의 원리>를 원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1982. 25-10.5까지 행한 박윤식 씨의 초기설교들이 변찬린 씨의 저술의 내용과 많은 부분에서 중복된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흥미롭게도 박윤식 씨는 1983년 6월 2일자 합동 보수 측 총회장이 자신에게 보낸 ‘총회 질의서에 대한 답변‘에서 자신의 가르침이 변찬린 씨의 저술에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박윤식 목사의 성경풀이와 변찬린 씨의 <성경의 원리>의 관계가 없는가?
다소 인용했음.”
변찬린이란 인물이 한 때 문선명 집단의 중심인물이었고 문선명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인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박윤식 씨의 가르침은 문선명, 변찬린의 신학사상의 아류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박윤식 씨의 ‘씨앗 속임‘ 설교의 핵심 내용을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의 저술에 등장하는 유사한 내용의 진술들과 상호 비교해 보면 그가 어떤 신학사상의 계보에 속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박윤식 씨의 ‘씨앗 속임‘의 신학적 주제는 철저하게 변찬린에게서 가져온 것이 명백하다.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 그리고 박윤식 씨의 다음 진술이나 발언들을 주목해 보라:
① 김백문, <基督敎根本原理>(서울: 東亞出版社工務部, 1958), 478쪽, 특히 485쪽
“그래서 이제 여인 해와로서 유인된바 선악과적 범행이란 사신(蛇身)으로 나타난 악령과의 육체적(肉體的) 음행(淫行)을 말하게 되는 일이니 즉 사신(蛇身)으로 직접적 육체성교(肉體性交)를 범행한데서 해와로서 여자의 처녀정조를 박탈당한 것도 컸으나 혈통(血統)에 미친 그 죄악성은 곧 육체(肉體)의 성욕감(性慾感)을 거기에서 받아가진 그것으로 창조본성의 사랑의 반대(反對) 성리(性理)인 정욕의 육성(肉性)으로 악화케 되었던 것이다.” |
② 문선명, <原理講論>(서울: 成和社, 1981), 80~81쪽.
“우리는 성서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여, 죄의 뿌리는 인간시조가 과실을 따먹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뱀으로 표시된 천사와 불륜(不倫)한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은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선의 혈통을 번식하지 못하고, <사단>의 악의 혈통을 번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미루어서, 인간의 죄의 뿌리가 음란(淫亂)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명백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죄의 뿌리가 혈연적(血緣的) 관계(關係)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원죄(原罪)는 자자손손에게 유전(遺傳)되어 왔다.” |
③ 변찬린, <聖經의 原理 中>(서울: 圖書出版 大河, 1980), 13쪽.
“이 말속에는 <씨앗 속임>의 비밀(秘密)이 숨어있는 사실을 이날까지 아무도 탐지(探知)하지 못했다. 가인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출생한 아담의 씨가 아닌 마귀의 씨였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인은 뱀의 종자(種子) 곧 하와가 밀통한 간부(姦夫)의 씨 불륜(不倫)의 열매였다. … 우리들 혈대(血代)와 혈맥(血脈)의 뿌리를 밝히는 족보(族譜) 속에는 얼마나 많은 다른 피가 혼종(混種)되여 흐르고 있는가.” “인류 역사 속에는 얼마나 많은 ‘씨앗 속임‘의 사건들이 은폐되어 있었던가. 우리들 혈대(血代)와 육맥(肉脈)의 뿌리를 밝히는 족보(族譜) 속에는 얼마나 많은 다른 피가 혼종(混種)되어 흐르고 있는가. … 타락한 아담은 그 영(靈)이 어두워져 <道的 잠>에 빠졌을 때 마귀의 하수인(下手人)인 뱀이 하와의 밀통(密通)하여 그 피밭에 마귀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뱀은 거짓 선지자의 암호(暗號)이다. … 가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한 열매가 아니고 ‘마귀로 말미암아 득남‘한 열매였는데 하와는 아담에게 자기의 성적범죄(性的犯罪)를 숨기기 위하여 ‘씨앗 속임‘의 고백(告白)을 하였고 타락하여 영이 어두워진 아담은 가인을 장자(長子)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범죄는 지금도 허다하게 존재하고 있다. 여인(女人)들이 남편 외(外)에 다른 정부(情夫)나 간부(姦夫)를 두고 있을 때 ‘씨앗 속임‘의 밀사(密事)는 일어나는 것이다.” |
④ 박윤식, ‘씨앗 속임‘ 설교녹취록 (1981.7.5, 학산합동속기사무소: 2005.6.10), 5, 18쪽.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너희 아들 낳게 해 줬다 했으면야 ‘아멘!’ 믿어야 할 텐데 아, 요놈의 여자가 살짝 속였거든. 그러니까 말씀의 영이 떠난 아담은 민충이같이 자기 씨인 줄 알고서 ‘그래, 하나님의 허락으로 말미암아 낳지‘ 알았어요?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는 아담이 속아 넘어가고, 또 여자 자신도 어둠의 권세 사단한테 속아 넘어가고, 그러니깐 낳고 보니까 전부 뱀 알[아이], 뱀의 씨들만 낳았다 그 말입니다“(5쪽); “이런 더러운 이 여자의 피 속에는 다른 씨들이 많이 흐르고 있어. 그러기 땜에 안심이 안 돼.”(18쪽) |
인류의 타락의 뿌리를 하와와 뱀의 성관계에서 비롯된 더러워진 피가 그녀의 후손인 인류에게 혈통적으로 유전된데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은 전도관 창시자 박태선 장로의 여러 설교나 주장들 속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각주 79: 김영무, 김구철, <이단과 사이비> (아가페문화사, 2004), 148쪽.)
김영무와 김구철에 따르면, 인류의 죄악이 하와와 뱀의 간음행위를 통해 혈통적으로 후대에 유전된다는 죄의 혈통유전론 사상을 추종하는 자들은 한국의 이단들 중에서 최대 계보를 이루고 있으며, 박윤식 씨의 ‘씨앗 속임‘ 설교 내용은 이런 의미에서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 박태선 등의 신학 사상에 직, 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아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4. 씨앗 속임의 비밀의 내용은 성경의 인간 창조론을 파괴하는 내용임
씨앗 속임의 비밀 내용은 하와가 남편인 아담 모르게 뱀(또는 마귀)과의 간음행각(육적 또는 영적인)을 통해서 씨앗 속임을 행하여 “뱀 알[아이], 뱀의 씨들“을 낳았다는 내용인데, 이런 씨앗 속임의 해석 패턴이 신구약 전체를 해석하는 중심 열쇠 역할을 한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문제점을 질문 형식으로 풀어가 보자:
첫째, 씨앗 속임에서 하와가 누구를 속였는가?
박윤식 씨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요놈의 여자가 살짝 속였거든. 그러니까 말씀의 영이 떠난 아담은 민충이같이 자기 씨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아담이 속아 넘어가고…“(5쪽) ‘씨앗 속임‘의 주체는 여기서 ‘하와‘ 자신인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인 아담을 의도적으로 속여 아담의 씨가 아닌 “뱀의 씨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둘째, 하와 자신과 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와가 의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아담을 속여 “뱀알, 뱀의 씨들을“ 생산했다면, 사전에 하와와 뱀 사이에 간음 행각이 있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하와가 뱀과의 아무런 관계없이 “뱀의 씨“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씨“는 그 씨를 뿌린 자가 있으며, 하와의 육태에 그 씨를 뿌린 자가 뱀(타락한 천사)이고 하와와 뱀 사이에서 “뱀의 씨“가 출생했다면 하와와 뱀 사이의 간음 행각은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그런데 같은 문장 속에서 이런 진술도 한다: 아담은 하와에게 속아 넘어간 반면, “또 여자 자신도 어둠의 권세 사단한테 속아 넘어가고…“(5쪽), 그렇다면 하와가 남편을 “살짝 속인“ 행위는 사단의 꼬임에 속아 넘어간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와는 자신의 남편인 아담을 속이고 다른 씨를 낳게 된 것이다. 아담을 속이는 하와의 의도성은 창세기 4장 1절에 있는 하와의 고백,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했다“는 구절을 자신의 씨앗 속임을 위장하기 위해서 하와 자신이 선수를 치며 행한 거짓말로 해석한데서도 확인된다(5~7쪽).
셋째, “뱀“은 파충류 뱀인가 마귀를 상징하는 언어인가?
박윤식 씨는 “뱀“, “뱀 알[아이], 뱀씨들“이란 말은 사용하지만, 그것은 사단을 상징하는 언어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뱀을 단순히 파충류 동물로 보지 않고 <거짓 선지자>를 상징하는 암호적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뱀은 <거짓 선지자>의 암호다. 뱀은 거짓선지자의 암호, 암호(그의 이러한 사상 자체는 변찬린의 저술에서 나온 것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뱀은 거짓말을 통해서, ‘거짓‘을 통해서 ‘다른 씨‘를 심어준다 적으세요.”(12쪽) 박윤식 씨는 이런 상징적인 해석을 예수께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서도 확인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거 알기 때문에 그 당시에 목사, 장로들, 유사들을 보고 ‘독사 새끼들아! 뱀 새끼들아!’ 논두렁에 다니는 뱀보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가인의 후예들보고 말씀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30쪽)
넷째, 하와는 그러면 어떤 관계를 통해서 “뱀알, 뱀씨들”을 낳을 수 있었는가?
박윤식 씨의 ‘씨앗 속임‘ 설교의 전체 문맥과 또한 그가 직접 의존하고 있는 변찬린의 저술 <성경의 원리>의 관련 주장들을 살펴볼 때 뱀과 하와의 간음행위는 육적인 성관계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그가 예로 들고 있는 설교 예화들이 거의 모두 부당한 육신적인 성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가인의 출생도 어차피 영적인 출생이 아니고 하와가 남편을 속여 낳은 육신의 출생이며, 둘째로, 박윤식 씨 자신 스스로 육신적인 의미의 출생을 시사하면서 “이 피밭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아닙니까? 육신으로 말할 때 말이지요. 피밭이라는 것은 여자가 태를 두고 말하는 거 아니오. 예? 열 달이 돼서 나와야 새끼가 아니라 그 남자의 호르몬 자체가 벌써 그게 그 나라의 아들들입니다. … 그러니까 씨앗 속임들 하지 말라고, 이제, 이런 비밀을 알 때에 씨앗 속임할 놈 하나도 없어.”(7쪽) 셋째로, 박윤식 씨가 자신의 설교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드는 예화 가운데 할머니들의 “새치기”에 관한 진술도 육적인 출생 과정을 말하는 실례들이다. 이런 요소들은 하와가 육적인 의미에서 성적인 관계를 맺어 “뱀 알[아이], 뱀씨들“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다.
뒤에서 상세하게 지적하겠지만, 박윤식 씨는 “씨앗 속임“, “여자의 피“, “피밭“, “월경“ 등과 같은 아주 강한 성 관계 술어들을 끌어다 사용하는데 이것은 죄가 피를 통해 후대에 흘러내려간다는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의 “죄악의 혈통유전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뱀의 씨, 가인의 후예인 인류의 피 속에는 더러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박윤식 씨는 이미 더러운 씨가 여자의 피 속에 흐른다고 강조하면서 여인의 월경에서 탈출하자고 강조하는 데, 뱀으로 상징되는 거짓선지자와 실제적인 육신적 간통행위를 통해 하와의 몸속에 더러운 씨가 하와의 피 속에 흘러들어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와가 아담을 “살짝 속이고“ 뱀의 유혹에 빠져 간음을 행함으로써 “뱀알, 뱀의 씨들“을 생산하게 되었는데, 박윤식 씨는 자신의 설교 중에서 “뱀은 ‘거짓선지자‘의 암호다“(12쪽)라고 주장한다. 그는 분명히 뱀이 씨앗 속임 전략을 통해서 하와를 유혹하여 간음을 행하고 그녀의 “육태“ 속에 자기 씨를 심어놓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구태여 가인이 아담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데는 가인이 마귀를 상징하는 어떤 ‘거짓선지자‘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와가 낳은 가인은 영적 존재가 아니라 육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씨앗 속임‘ 설교에 나오는 관련 진술들을 근거로 해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다:
(1) 뱀은 거짓선지자의 암호이다.
(2) 가인은 하와의 육태를 통해 태어난 뱀의 씨이다.
(3) 가인은 아담의 자손이 아니다.
(4) 그렇다면 가인은 거짓선지자로 상징되는 어떤 존재와 육신적인 성관계를 통해 태어난 거짓선지자의 씨이다.
흥미로운 한 가지 사실은 박윤식 씨가 자신의 ‘씨앗 속임‘ 설교에서 그렇게도 많이 인용하고 의존했던 변찬린의 저술 중에서 개진되는 천사론이다. 변찬린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가 곧 지혜천사임을 암시“(각주 80: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77쪽.)한다고 전제하고, “이런 지혜천사가 아름다우므로 교만해졌고 영화로우므로 지혜를 더럽혀 사단 마귀가 되었다“(각주 81: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77쪽.)고 주장한다.
변찬린은 타락하여 마귀가 된 지혜천사가 뱀을 통하여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뱀의 꼬임에 빠져 따먹은 선악과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각주 82: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80쪽. 박윤식 씨도 그의 ‘씨앗 속임‘ 설교에서 변찬린의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넘겨받고 있다(녹취록, 12쪽).)을 가리킨다.
그러면 사단과 뱀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변찬린에 따르면, “용은 타락한 지혜천사이고 뱀은 지혜천사의 하수인의 암호이다. 영적 존재인 사단 마귀는 하늘의 존재인데 이 마귀의 지령을 받고 ‘거짓 예수‘, ‘거짓 영‘, ‘거짓 복음‘을 밀수입한 지상의 존재가 곧 뱀인 것이다.”(각주 83: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87쪽. 그는 “뱀이 복음서에는 바리새인 같은 거짓 선지자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고 본다.) “지혜천사는 뱀과 공모하여 하와를 유혹하고“(각주 84: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89쪽.) 뱀과 간음하여 가인을 낳게 만들었다. 그런데 파충류에 불과한 뱀이 인간 하와와 육적인 간음 행위를 할 수가 있었을까? 변찬린의 천사론을 들여다보면 이 질문은 쉽게 풀릴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타락한 천사들도 “사람“이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천사들은 “영화된 존재이지만 타락으로 퇴화되어 사람에게 나타날 때에는 肉化되어“(각주 85: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310쪽.)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천사들은 영으로 수렴된 존재이지만 그들이 인간에게 나타날 때 잠시 肉化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三次元 세계에서 四次元 세계로 나가면 그 몸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四次元 세계의 존재가 三次元 세계로 오면 없던 몸이 금방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렴이란 三次元 세계에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짐을 말한다.(각주 86: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312쪽.) |
상기 인용구가 분명히 시사하듯이, 천사들이 인간 세계와 접촉할 때 이렇게 ‘수렴‘이라는 ‘육화‘(肉化)의 과정을 거쳐 나타난다. 만일 뱀으로 불리는 타락한 천사가 사단과 공모하여 하와를 꾀려고 그녀에게 접근했다면, 뱀은 사람의 모습으로 육화된 ‘거짓 선지자‘(각주 87: 박윤식, ‘씨앗 속임‘ 설교 녹취록, 12쪽: “뱀은 ‘거짓 선지자‘의 암호다.”)로 접근했을 것이다.
더욱이, 변찬린은 ‘기독교적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아담 이전 시대뿐만 아니라 아담 자신의 시대에도 많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각주 88: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66쪽: “인류학이나 고생물학이나 고고학적인 견지에서는 인간의 발생연대는 1백만 년 전까지 소급된다. … 그들은 생물학적 내지 인류학적 의미의 ‘사람‘이라 할 수 있어도 성경적 의미의 사람은 아니었다. 바로 이 점이 아담을 이해하는 핵인 것이다. 아담 이전에 존재한 원시인들은 생물학적인 의미의 인간이었고 아담은 성경적 의미에서의 인간이었다. 성경적 의미의 ‘사람=아담‘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찾아가는 문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의미의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한 존재가 곧 ‘사람‘으로 등장한다.”(66쪽)
흥미로운 것은 박윤식 씨 자신도 변찬린의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입었던지 성경공부 시간에 “아담 때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아담을 그분의 씨로 선택하셨다“(고재분 전도사의 필기노트, 1974.7.20)는 유사한 주장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담 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그의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신의 씨로 선택하던 당시에는 아담과 하와밖에 없었을 터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미 변찬린의 기독교 진화론의 전제 속에서 한 발언일 수밖에 없다.) 박윤식 씨 자신도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신의 씨로 선택하셨을 당시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각주 89: 고재분 전도사의 설교 필기노트 (1974.7.20) 참조.)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것은 박윤식 씨가 변찬린의 기독교 진화론의 시각 속에서 자기 교인들에게 성경 공부를 가르쳤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따라서 아담 시대에 뱀이 ‘거짓 선지자‘로 육화되어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꼬이고 그녀와 간음하여 “뱀알, 뱀씨들“을 낳았다면, 뱀과 하와의 간음 행위는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된 마귀와의 육체적인 성관계를 함축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윤식 씨가 많이 의존하는 변찬린의 진술들도 육적인 성관계를 도처에서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와가 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임신 고백은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속에는 ‘씨앗 속임‘의 비밀이 숨어있는 사실을 이날까지 아무도 탐지하지 못하였다. 가인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출생한 아담의 씨가 아닌 마귀의 씨였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인은 뱀의 종자 곧 하와가 밀통한 간부의 씨 불륜의 열매였다. 본래 ‘잉태의 비밀‘은 여인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인류 역사 속에는 얼마나 많은 ‘씨앗 속임‘의 사건들이 은폐되어 있었던가. 우리들 혈대(血代)와 혈맥(血脈)의 뿌리를 밝히는 족보속에는 얼마나 많은 다른 피가 混種되여 흐르고 있는가. … 하나님이 ‘로고스의 씨‘를 뿌리는 피밭은 여인의 태(胎)이다. 그런데 이 밭에 마귀도 은밀하게 ‘살인자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타락한 아담은 그 영이 어두워져 ‘도적(道的) 잠‘에 빠졌을 때 마귀의 하수인인 뱀이 하와와 밀통(密通)하여 그 피밭에 마귀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뱀은 거짓 선지자의 암호이다. 뱀은 밀교(密敎)의 아비이다.(각주 90: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13~14쪽.) |
위에서 직접 인용한 변찬린의 저서 <성경의 원리>의 진술들은 박윤식 씨의 ‘씨앗 속임‘이란 설교 내용과 얼마나 빼다 박을 정도로 유사한가? 변찬린은 뱀과 하와의 관계를 의심할 여지도 없이 “성적 범죄“(性的犯罪)(<성경의 원리 中>, 15쪽)로 규정하고 있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가인은 “뱀의 종자(種子) 곧 하와가 밀통(密通)한 간부(姦夫)의 씨 불륜(不倫)의 열매였다“(상게서, 13쪽)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인류의 “혈대(血代)와 혈맥(血脈)의 뿌리를 밝히는 족보(族譜) 속에는 얼마나 많은 다른 피가 혼종(混種)되여 흐르고 있는가“(상게서, 13쪽)고 자문한다. 이것은 박윤식 씨가 뱀의 더러운 피가 하와와의 육적인 간음행위를 통해서 인류의 후손 대대에 혈통적으로 유전되어 흘러내려가고 있다는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의 성적 해석을 그대로 넘겨받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다섯째, 그렇다면 가인은 과연 아담의 후손인가?
씨앗 속임이라는 마귀의 비밀 작전의 전망에서 보면 분명하게 가인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뱀알, 뱀씨들“이다. 논리적으로 그런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와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아담을 “살짝 속임“으로써(5쪽) 아담의 자식이 아닌 뱀 새끼들 또는 사단의 자식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박윤식 씨는 아담을 가리켜 가인을 자기 씨인 줄로만 아는 “민충이“로 묘사한 바 있다. 하와는 비록 가인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했다“(창 4장1절)고 고백했지만, 이것은 의도적인 속임수 진술일 뿐이다. 만일 가인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낳은 자식 같으면은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일을 해야 될 텐데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정말 방해하고 별 지랄들 다 했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벌써 씨가 달라“(6쪽)고 한 박윤식 씨 자신의 말이 가인은 아담의 참 씨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준다.
물론 박윤식 씨는 자신의 ‘씨앗 속임‘이란 설교에서 아담과 하와는 부부관계의 기회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한다: “자, 이것 보세요.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분명히 한자리 같이 했지요?”(녹취록 5쪽) 하지만 박윤식 씨는 계속해서 하와가 잉태한 뒤에 선수를 치며 남편 아담에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했다“고 씨앗 속임 작전을 했고, 아담은 민충이와 같이 하와와 한번 잠자리를 같이 한 것에 속아 하와가 낳은 씨를 자기 씨인 줄로 속아 넘어갔다고 했기 때문에 위의 인용구가 가인이 하와와 아담과의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통해서 출생한 아담의 자손임을 입증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와는 이미 뱀과 간음행각을 벌여 다른 씨를 갖게 되었고 하와는 이를 위장하기 위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했다“는 씨앗 속임을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각주 92: ) ‘씨앗 속임‘ 설교에서 우리는 가인이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박윤식 씨의 주장은 성경의 인간 창조론과 타락론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5. ‘씨앗 속임‘의 메시지는 성경의 구원론을 심각하게 왜곡시킴
“마귀의 비밀은 남녀관계를 통해서 씨를 뿌린다“(19쪽)는 박윤식 씨의 진술은 성경의 구원론에 심각한 왜곡현상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첫째, 박윤식 씨의 구원론은 근본적으로 성적 모티브가 강한 ‘씨앗 속임‘ 이론에 의해 채색되어 있는 구원론이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비밀의 말씀에 “무서운 말씀의 세계가 깃들어 있다“(20쪽)고 하면서 씨앗 속임을 통해 성경의 구원역사 전체를 풀어가는 자신의 비의적인 말씀 해석을 다 말했다가는 “대번 이단 소리 듣게?”(20쪽)라고 염려하는 발언을 한다. 이것은 자신도 자신의 교훈이 정통교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식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둘째, 박윤식 씨의 구원론은 창세기 인간 타락 이야기를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의 계보를 잇는 성적 해석 구원론이다: “이거 봐요. 예수의 십자가 피는 여자 피라는 게 아니라 피밭을 통해서, 여자의 피밭을 통해서 아들, 딸 낳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십자가 피가, 알았지요? 바로 말씀으로 낳는, 아들, 딸을 낳는 그 공장이다. 신령한 배다 그 뜻입니다“(26쪽). 박윤식 씨가 자신의 설교에서 “여자의 피“, 여자의 “육태“, “피밭“ 등과 같은 술어들을 강하게 의존하는 것은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과 같이 “죄악의 혈통유전론“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설교 중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진술을 하기도 한다: “이런 더러운 이 여자의 피 속에는 다른 씨들이 많이 흐르고 있어. 그러기 땜에 안심이 안 돼“(18쪽). 이렇게 문선명과 변찬린은 죄악이 피를 통해 유전한다는 “죄악혈통유전론“을 공유하지만, 뱀의 씨 가인의 혈통 속에 흐르고 있는 더러운 피에서 벗어나는 방식에 있어서는 그들 간에 서로 다른 점도 존재한다. 그러한 성적으로 해석한 구원론은 성경의 메시지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마귀의 씨앗 속임의 작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역속임수의 작전이라고 해석한다: “이래야 마귀가 속아서 씨를 심지 못하지, 사람을 통해 씨를 또 심기 시작하면은 또 마귀가 속여서 하와를 속이듯이 또 먹게끔 하는 거야.”(25쪽) 박윤식 씨는 자신의 씨앗 속임의 주제를 가지고 신구약 전체의 비밀을 푸는 핵심 열쇠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사단과 하나님, 악신과 선신의 대결구조인 헬라의 고대 이원론적 발상과 일치한다. 문선명, 변찬린, 박윤식 씨는 사단과 하나님의 이 대결구도 속에서 “거짓말“ 또는 “속임수“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마귀도 자기 씨를 퍼뜨리기 위해서 하와를 속였듯이, 하나님도 마귀가 장난질하지 못하기 위해 그를 속이는 작전을 편다. 그래서 그는 “비밀“ 또는 “암호“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자신의 비밀의 말씀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하는데 다 이와 관련이 있다. 과연 이런 “속임수“ 교리, 그것에 근거한 “비밀“ 교리 또는 “암호“ 교리가 성경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오직 통일교 출신 이단인 변찬린에게서 온 것이 명백할 뿐이다. 더욱이, 마귀가 씨앗 속임이라는 장난을 할까봐 마귀를 속이기 위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직접 자신의 씨를 심는다는(18쪽) 박윤식 씨의 구원론은 성경의 메시지를 왜곡한 것이다.
넷째, 박윤식 씨의 구원론은 그의 또 다른 설교, “여인의 월경의 입장에서 탈출하자“(1981. 11.2)는 슬로건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여인의 월경을 통해서 낳는 방식에서 탈출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왜 박윤식 씨는 여인의 월경의 피, 여자의 피를 혐오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피를 통한 후손에게 흘러내려간다고 생각하는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의 “죄악혈통유전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더러운 이 여자의 피 속에는 다른 씨들이 많이 흐르고 있어. 그러기 때문에 안심이 안 돼.”(18쪽) 즉 여자의 피 속에서 흐르는 더러운 씨가 심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인의 월경에서 탈출하는 것이 박윤식 씨의 구원론의 핵심인 것이다.
다섯째, 박윤식 씨의 구원론은 인간의 타락의 본질을 하와와 뱀 사이의 간음행위인 씨앗 속임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 모두가 하나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을 함으로 범죄하였다는 성경의 본래 교훈을 심각하게 희석시키거나 훼손하고 있다.
여섯째, 박윤식 씨의 십자가 신학도 이러한 속임수 교리에 연결되어 해설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에서 죽게 하시고 그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근본 의도는 “마귀가 속아서 씨를 심지 못하게“(25쪽) 하려는 것이다. 박윤식 씨는 남녀가 “한 번 붙으므로(성관계를 하므로) 하나 낳을“ 때마다 마귀가 몰래 자기 씨를 심지만, 하나님은 마귀의 “장난질“(17쪽)을 막기 위해서 역속임 전략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 궤변을 말하기도 한다: “너 죽음으로 말미암아, 너 믿기만 하면 씨가 두루룩, 두루룩 쏟아지게 할게. 걱정하지 말고 믿어! 이래야 마귀가 속아서 씨를 심지 못하지. 사람을 통해 씨를 또 심기 시작하면은 또 마귀가 속여서 하와를 속이듯이 또 먹게끔 하는 거야.”(25쪽) 이런 어처구니없는 십자가 신학은 도대체 성경 어디에서 나오는 말인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통일교 출신 변찬린에게서 온 것이 분명하다.
박윤식 씨의 십자가 신학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비밀의 말씀이 “십자가 핏속에“(녹취록 18쪽) 감추어 있다는 그의 진술이다.(각주 93: 다른 녹취록 버전에는 “거저 피속에 생명이 있어 그건 몇 껍질 더 벗겨야 됩니다“라는 진술이 있지만 평강제일교회 측이 학산합동속기사무소에서 작성하여 총신 교수회에 배포한 녹취록에는 빠져있다. 왜 이 내용이 후자의 버전 속에 빠져 있는지를 더 확인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을 박윤식 씨는 밝히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지낸다고 할 만큼 자신의 가장 독자적이면서도 밝히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된 비의적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비슷한 주장이 교수회에 배포된 <십단계말씀공부> 자료집, 115쪽을 참조하라.) 과연 십자가 핏속에 감춘 비밀은 어떤 것일까? 그는 청중들을 이해시키려면 더 많은 비밀 이야기를 풀어 헤쳐야 하는데 이 깊은 말씀을 밝히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서 늘 울고 지낸다고 안타까워한다. 십자가 핏속에 감추인 “비밀의 말씀“이 도대체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박윤식 씨 스스로 밝히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알 길은 없지만, 박윤식 씨의 다른 진술들을 통해 그의 의중의 뜻을 찾아 볼 수 있다.
박윤식 씨는 다른 말씀공부 자료에서 이 부분에 대해 해설한 바가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말씀의 비밀을 십자가 핏속에 묻어 사단으로 하여금 모르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십단계말씀공부>에서 “십자가의 피“에 관한 강의노트 자료 71쪽에 보면, “피는 보이는 것이므로 영원성이 없고 그 속에 보이지 않는 λ(말씀)은 영원무궁하다“고 하면서 “λ(말씀)이 피와 더불어 땅에 감추었으니 = 보혈 (성경을 캐는 도구) 보화를 캐는 자를 만나러 오신다(마 13:44-)”라고 주장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같은 자료 72쪽에는 “+(십자가)의 피는 우리가 그 속에 숨은 뜻을 밝히 알 때까지 보화를 싸고 있는 보자기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앞의 진술들을 종합해 보면, 십자가의 피 자체는 영원성이 없고 그 속의 말씀이 영원할 뿐이며 따라서 십자가의 피는 그 속에 있는 말씀의 비밀을 밝혀 알릴 때까지는 말씀의 보화를 싸고 있는 보자기 또는 수단 역할 밖에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십 단계 말씀공부> 자료 71쪽을 보면 이미 박윤식 씨는 “예수의 λ = 영, 생명“이라고 등식화한 적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는 십자가 핏속에 감추인 “생명의 말씀“을 밝힐 존재가 누구인가 라고 묻게 될 수밖에 없다. ‘씨앗 속임‘ 설교에서 박윤식 씨는 이미 “창조 이후로 오늘까지 이 말씀의 비밀은 전 세계에 공개되지 않은 것을 제가 잠깐 말씀을 공개하겠습니다“(녹취록 5쪽)에서 밝힌 바 있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십자가의 핏속에 감추인 생명과 영의 말씀을 공개하고 밝힐 사람은 박윤식 씨 자신이라고 쉽게 도출할 수 있다.
왜 이 말씀을 하필이면 십자가의 핏속에 감추었을까? 이것은, 같은 ‘씨앗 속임‘ 설교의 녹취록 내용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사단을 장난질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임수 전략의 일환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마귀가 속아서 씨를 심지 못하지.”(녹취록 25쪽) 문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 핏속에 생명의 비밀 말씀을 묻어두어 사단이 모르게 속였다면, 이것을 밝힐 수 있는 존재가 왜 예수님이 아니고 박윤식 씨 자신임을 강하게 시사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평강제일교회 대학생선교회에서 만든 영문성경공부 교재 <말씀의 단계>(The Step to the Word)에 따르면, “진리의 단계로 떨어진 예수는 비유와 상징으로 하나님의 뜻을 주었다. 그리고 이것들이 아니고서는 그는 그것을 줄 수 없었다“(17쪽)는 진술이 등장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동일한 영문성경교재는 부연설명을 하기를, “즉 그 말씀은 땅에 감추인 보화처럼 되었으며 이 숨겨진 보화가 드러나게 되는 말씀의 때가 남겨졌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말세)가 그 말씀의 때이다“라고 주장한다. 십자가의 핏속에 감추인 비밀의 말씀을 드러나게 될 “마지막 때“가 남겨졌다면, 그것은 창세 이후로 아무도 밝힌 적이 없는 “말씀의 비밀“을 ‘씨앗 속임‘ 설교를 통해서 잠간 공개하는 박윤식 씨 자신의 때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각주 94: 박윤식, ‘씨앗 속임‘ 설교녹취록(1981.7.5, 학산합동속기사무소: 2005.6.10), 5쪽.) 예수께서 세상에 와서 “비유와 상징“만 말하고 십자가 피 속에 묻은 “말씀의 비밀“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끝 날에 박윤식 씨는 이 비밀한 말씀의 세계를 공개하는 유일한 말씀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은 자는 영원히 영육 간에 죽지 않고 구원을 변화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각주 95: 박윤식, <말씀의 승리가>, 22장 “아버지의 이름 권세“의 가사 참조.)
그의 이러한 십자가 신학 또는 비밀의 말씀 신학은 개혁신학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비성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로, 사단을 속이기 위해서 생명의 말씀을 십자가 핏속에 묻어두었다는 것도 성경의 자명한 십자가의 대속교리를 부정하고 왜곡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십자가 사건은 그 속에 감추인 비밀의 말씀이 알려질 때까지 감싸고 있는 ‘보자기’ 역할만 하는 것인가?
둘째로, 십자가를 통한 대속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피 속에 보화처럼 감추인 말씀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도 성경의 십자가 신학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이 진리의 수준으로 낮아져서 비유와 상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자 했을 뿐 십자가 핏속에 감추인 비밀의 말씀을 드러낸 자는 자신뿐이라고 시사하는 것은 기독론적인 심각한 오류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주 예수님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시키는 비성경적인 발상이다.
6. 소결론
첫째, 박윤식 씨의 씨앗 속임 교리는 기본적으로 창세기의 인간 타락기사를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거부하고 성적 개념으로 해석한 비성경적인 교리로서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의 성적 해석의 이어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둘째, 박윤식 씨의 십자가 신학도 이러한 왜곡된 성적 해석에 의해 철저하게 채색되어 있다.
셋째, 박윤식 씨의 구원론 신학은 마귀의 씨앗 속임 전략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역속임 전략을 전제하고 있고, 그러한 속임수 전략의 일환으로 십자가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넷째, 박윤식 씨는 성경을 기본적으로 암호 문서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마귀의 씨앗 속임 전략을 핵심토대로 하는 “비밀의 말씀“ 해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는 성경의 일차적이고 자명한 문자적 의미를 의도적으로 훼손하고 그 뒤에 숨어있다고 여겨지는 “말씀의 비밀“을 자의적으로 끌어냄으로써 성경의 메시지의 자명한 의미를 왜곡하거나 버리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다섯째, 이런 잘못된 해석 방식은 박윤식 씨 자신만이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임하지 않은 특별한 “말씀의 비밀“을 받았다고 하는 계시론적 오류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비밀의 말씀이 어떤 주석에도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극대화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풀어헤치는 비의적 말씀에 맹종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는 비의적(秘意的) 해석구도와도 내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박윤식 씨는 예수께서 “진리의 수준으로 낮아져서“ 기껏 “비유와 상징“으로 하나님의 뜻을 말했지만 불신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하였고, 반면에 마지막 때에 자신이 진리의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헤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고 자신을 “말씀의 아버지“로 치켜세울 수 있는 토대를 놓고 있다.
여섯째, ‘씨앗 속임‘이라는 해괴한 이론을 통해서 박윤식 씨는 가인을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뱀의 씨로 간주함으로써 인간 창조론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맺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박윤식 씨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우리가 다룬 자료들은 ‘씨앗 속임‘을 비롯한 그의 설교, <십 단계 말씀연구>, <말씀의 단계>(The Step to the Word), 대성교회에서 발행된 관련자료 그리고 답변서 등이었다. 그 결과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그의 가르침이 우리 교단이 지향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배치되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째, 박윤식 씨의 ‘씨앗 속임‘ 사상은 가인을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뱀이 하와를 속여 성적인 혈연관계를 맺음으로 생산한 “뱀의 씨“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인류 대다수가 가인의 더러운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난 마귀의 후손들로 간주함으로써 성경의 창조론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또한 에덴동산이 창조 후 이 지상의 시공 속에 있었음을 거부한 것은 성경의 근본 가르침과 위배된다. 에덴에서의 타락사건, 선악과 사건은 상징이 아니라 역사 속에 일어난 실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창세기가 가르치는 대로 가인은 뱀의 씨가 아니라 하와와 아담 사이에서 출생한 아담의 후손이며, 타락한 인류 전체도 모두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다.
둘째, 박윤식 씨의 인죄론은 성경 및 개혁주의 신학과 배치된다. 그의 ‘씨앗 속임‘에 나타난 에덴에서의 타락 사건을 뱀과 하와의 성관계로 해석하여 가인이 잉태되었다는 것이나, 에덴에서의 선악과를 따 먹은 사건을 상징적으로 이해하여 하와와 뱀과의 성관계로 풀어가려는 성경 해석이나, 이렇게 뱀과의 성적인 혈연관계를 통해 더러운 피 또는 죄악이 후손들의 혈맥에 흘러들어와 그들에게 유전된다는 죄의 혈통유전설은 모두 성경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그의 ‘씨앗 속임‘ 교리는 기본적으로 창세기의 인간 타락기사를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따라 해석하기를 거부하고 기이한 성관계로 왜곡 해석한 비성경적인 교리로서 김백문, 문선명, 변찬린의 성적 해석과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 하는 것이 분명하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죄인을 위한 대속의 사건‘으로, 또 ‘구속을 완성하신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이루지 못한“ 실패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십자가의 근본 사상을 왜곡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핏속에 비밀의 말씀이 감추어져 땅에 쏟아진 것이 마귀가 장난질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속임수 전략의 일환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말씀의 보화를 싸고 있는 보자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며 구속의 사건을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그의 구원론은 마귀의 씨앗 속임 전략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역속임 전략으로 개혁신학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넷째, 이런 잘못된 해석 방식은 박윤식 씨 자신만이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임하지 않은 특별한 “말씀의 비밀“을 받았다고 하는 계시론적 오류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비밀의 말씀은 어떤 주석에도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극대화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풀어헤치는 비의적 말씀에 맹종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는 비의적(秘意的) 해석구도와도 연관되어 있는데 박윤식 씨는 예수께서 “진리의 수준으로 낮아져서“ 기껏 “비유와 상징“으로 하나님의 뜻을 말했지만 불신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하였고, 반면에 마지막 때에 자신이 진리의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헤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고 자신을 “말씀 아버지“로 치켜세울 수 있는 토대를 놓고 있다.
말씀과 진리를 분리하여 진리 단계에 머물지 말고 말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는 것은 말씀이 성육신하여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인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왜곡하는 것이다.
다섯째, 자신이 가르치는 말씀이 지리산에서 3년 6개월 7일 동안 기도를 통해 직접 받은 계시라는 주장은 개혁주의 성경관(계시관)과 어긋난다. 그가 받았다는 말씀 자체도 상당수가 변찬린의 <성령의 원리>에서 거의 그대로 끌어온 것이다.(각주 96: 1983년 1월 18일 변찬린이 박윤식 씨에게 보낸 경고문 참조.
변찬린은 박윤식 씨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본인이 피와 땀과 눈물과 아픔 가운데 집필한 <성경의 원리>를 귀하가 함부로 도용, 표절하여 오용 남용을 하면서 3년 6개월 7일 동안 산에서 기도하다 받은 진리라고 속여 온 사실을 알고 있으니 하루 속히 신앙의 양심을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를 충고합니다. 또 우리는 서로가 단 한 번도 만나 본 사이가 없는 사이인데 본인이 귀하에게서 성경을 배웠다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혹세무민하고 양들을 오도하면서 귀하의 노트로 본인이 ‘성경의 원리‘를 썼다고 거꾸로 뒤집어 씌워, 있지도 않은 사건을 날조하여 허무맹랑한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하니 오늘 이후 또 다시 이런 거짓 선전으로 본인을 헐뜯고 중상 모략한다면 본인은 한국의 신앙계 언론계 법조계를 통해 흑백을 거리고 진위를 분별토록 하겠으니 깊이 자성하여 스스로 자멸하는 어리석은 일이 없도록 엄중 경고 합니다. 끝으로 교계의 대표와 언론계의 기자를 초청하여 대성교회 교인과 여러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서 본인과 귀하의 공개신앙토론(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을 제의하니 본인을 상대할 자신과 실력과 용기가 있다면 응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날까지 <성경의 원리>를 도용하고 알지도 못하는 본인을 모략한 사실에 대하여는 예수의 사랑 안에서 용서하고 불문에 붙이겠으나 오늘 이후 또 다시 지난날과 같은 망언을 되풀이 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으니 명심하기 바랍니다. 1983년 1월 18일 변찬린“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박윤식 씨는 답변이 없었다고 한다. 변찬린은 하권 서문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성경의 원리> 상중권이 출판된 이후 곳곳에서 도적들이 나타나 이 책을 도용하며 오용한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심지어 어떤 목사들은 이 책의 내용을 자기가 산에서 기도하다가 계시 받았다고 선전하고 있다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변찬린, <성경의 원리 하>, 3쪽.) 이는 박윤식 씨를 비롯한 자신의 작품을 표절하는 이들을 겨냥한 것임이 분명하다.(변찬린, <성경의 원리 하> 서문.) 실제로 확인한 결과 박윤식 씨의 상당 설교가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상·중·하>에서 빌려온 것이다. 단순한 참고 차원을 넘어 문맥과 용어와 내용이 너무 유사하여 표절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박윤식 씨는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를 다소 인용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설교 상당 부분이 문선명 계보 이단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와 거의 같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여섯째, 대성교회 박윤식 씨의 <말씀의 승리가>, 설교와 <십 단계 말씀 공부>, 그리고 <말씀의 단계>(The Step to the Word)에 나타나는 박윤식 씨 자신을 암시하는 <말씀 아버지>, 인간이 신성을 가진다는 주장, 그리스도인들을 “생령의 씨알“이라고 부르는 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사해주시려고 했으나 반대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주장은 개혁신학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비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박윤식 씨의 가르침은 개혁주의 관점에서 볼 때 창조론, 인죄론, 기독론, 십자가 신학, 구원론, 계시관에 있어서 비성경적이며, 그 가르침에 있어서 이단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