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저주론의 비판 (정훈택교수)

  • 6월 16, 2016

                                                             가계저주론의 비판

 

                                                                             정훈택 교수(총신대신대원 신약학)

 

요즈음 한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윤호의 책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서울: 베다니, 1999)에 대하여 {교회와 신앙} 1999년 8월 호에 김철홍이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한 바 있다. 이 글은 내용상의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김철홍의 비판에서 빠진 내용 내지 미흡한 내용을 주로 지적하고자 한다.

 

이윤호의 가계 저주/치유론은 한 마디로 논리와 내용이 엉성할 뿐 아니라 작은 책 한 권 안에서도 한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자주 혼란을 불러일으키며 서로 충돌하고 있다. 따라서 정리하는 것도 쉽지 않고 비판도 혼란에 빠져들기 쉽다.

주된 그의 주장은 성경을 인용/사용하기는 하지만 성경적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반박하는 것이며 수정하거나 보충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일생을 헌신하며 외친 ‘하나 뿐인 복음’에 상처를 내고 신약성경이 알려주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영혼을 구한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 미신적 사고와 결합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기독교의 미신화 내지 미신의 기독교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결론은 비슷한 제목이나 비슷한 내용의 다른 책, 다른 논문에도 적용된다. 즉 메릴린 히키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서울: 베다니, 1997)나 데렉 프린스의 {축복이냐 저주냐 당신이 선택하라}(서울: 베다니 1999)도 이윤호의 책과 같은 ‘다른 복음’을 소개하고 있다.

 

이윤호의 주장

이윤호는 저주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어 가면 저주의 다양한 의미가 퍽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첫째, 남이 못되기를 비는 말이나 행동으로서의 저주,
둘째, 그 결과로 나타나는 나쁜 상태로서의 저주,
셋째, 그런 상태가 가계를 타고 흘러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과 내지 영향력으로서의 저주,
넷째,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만들어 내는 힘으로서의 저주.


그러나 그는 명확한 구분 없이 ‘저주’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문맥에 따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래에 그의 주장을 정리해 본다.

죄와 저주는 한 사람에게서 자녀에게로, 그리고 그의 손자, 그의 후손에게로 여러 가지 통로로 대물림된다. 따라서 특정 가계, 특정 가문에 특정한 죄와 저주가 한 가문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유전되는 죄와 저주는 성경이 말하는 첫 사람, 아담의 것에서부터 그 가계의 족보를 구성하는 모든 선조들의 죄와 저주들이다.

저주에만 초점을 맞추어 보면, 유전되어 후손들에게 나타나는 저주는 하나님의 저주만이 아니다. 사탄의 저주, 타인의 저주, 본인의 저주 등 모든 저주를 다 포함한다. 죄와 저주가 가계를 통해 상속되는 것은 가계에 거짓의 영, 사탄이 침입했기 때문이다.


“사탄은 죄와 저주를 통해 당신의 삶과 가계를 노략질하고 파괴시키려고 한다”(63쪽).

“가계의 저주는 사탄의 역사이다”(153쪽).


가계에 저주가 들어오는 원인으로 그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특별한 네 가지 죄(우상숭배, 성적범죄, 불효, 불의와 학대)와 피해를 입은 조상들의 악한 감정(= 恨?), 사탄에게 한 헌신, 개인의 맹세, 타인 및 자신에 대한 욕설 및 불평을 꼽았다.

죄와 저주가 가계를 따라 흐르는 통로는 유전인자, 부모를 모방함, 죄의 결과, 악한 영들, 혼의 결속이다. 그의 주장을 따를 경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누구나 이 통로들 중 적어도 하나 이상은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저주로 오염되어 있지 않은 가계는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저주, 즉 저주받음과 관련하여 그가 언급한 것은 한 마디로 삶의 해악적 요소 모두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단순히 가계저주론을 주장할 뿐 아니라, 가계치유를 적극 권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죄와 그 결과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는 주장, 은혜시대의 신자들은 저주와 무관하다는 주장, 신자들은 조상의 죄와 저주로부터 이미 해방되었다는 주장,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는 주장을 기독교인들이 최우선적으로 깨트려야 할 고정관념이라고 불렀다.

그는 또한 가계를 타고 흘러 내려오는 죄와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들과 기도문들도 제시했다. 가계치유의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고백하면서도(136쪽) 무엇보다 먼저 가계치유를 성경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접적 증거와 임상실험의 결과가 이 주장의 근거이다.


가계의 영적 뿌리를 추적하고, 개인의 삶과 가계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주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자신의 가계에 적용하고, 가계에 저주와 악영향을 가져온 조상을 용서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는 순종의 결단을 내리고, 가계를 침입한 사탄을 축출하고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찬양하며 자신과 자신의 가계를 축복하는 것이 가계치유의 방법론들이다.

그가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요대상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물론 가계저주론과 가계치유론은 모든 가계에나 다 적용된다. 그러나 “신자들은 세상도 다 아는 진리를 모르고 있다”(32쪽). 그래서 그는 이 진리를 모르고 있거나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는 신자들과 교회에 알리기 위하여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였다. 성경적 증거를 제시하려고 무리한 노력을 하기도 했다.


저자 이윤호는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 즉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헌신적인 봉사활동에도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에 붙들린 삶을 간절히 기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때로는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각종 질병과 사고에 시달리는 원인을 알려주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장해물들을 제거함으로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하신 축복과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할 많은 신자들이 저주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71쪽).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실패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202쪽)고 그는 자신의 글을 마무리했다.
이윤호는 자신을 비참한 상태에 살고 있는 신자들의 전도자로, 자신의 연구 및 실험 결과를 신자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으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어쩌면 긍정적으로 평가해봄직도 한 그의 이 개인적 관심과 열심이 그의 잘못된 가계저주론 및 가계치유론의 기초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1. 미신적, 샤머니즘적 저주론

이윤호의 저주론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가계저주론도 성경적인 얘기가 되지 못한다. 그의 저주론, 가계저주론의 뿌리는 다른 곳에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정령숭배사상과 물신론 등 한국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미신적 샤머니즘과 비슷한 이야기를 그는 기독교적 개념으로 각색해 놓은 것이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가 사용하는 저주란 단어의 다양한 의미를 좀 더 설명해 본다. 


저주란 무엇인가? 저주는 남이 안되거나 망하기를 바라고 비는 것이다. 주로 말과 관계되어 있다. 이윤호는 효력을 나타내는 저주의 다양한 주체를 인정했다. 하나님의 저주, 사탄의 저주, 다른 사람의 저주, 자기 자신의 저주, 맹세나 심지어 무심코 뱉어내는 한탄과 자조도 저주의 역할을 한다.

모든 저주는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니고 있다. 저주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다”(47쪽). 조상이 특정한 죄를 범한 적이 있다면 “하나님의 정한 영적 원리에 따라 당사자 자신들 뿐만 아니라 후손이 저주를 받는다”(98쪽). 저주가 그 자체로 효력을 나타내는 것을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영적 원리라고 불렀다.

가끔 저주의 결과가 유전되는 것과 저주 자체가 전달되는 것을 구별하기도 하지만 이런 구별은 그에게 별 의미가 없다. 그는 모두를 저주받은 상태란 의미의 저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저주 자체가 효력을 지닌다고 보았기 때문에 저주의 결과가 유전되는 것이나 저주 자체가 전달되어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저주의 효력을 말할 때 그는 특별히 악한 영들을 동원했다. 조상들이 당한 상처 및 참상에 대한 조상들의 나쁜 감정도 후손에게 전달된다. 악한 영들이 침입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사탄에게 헌신한 조상을 가진 후손들은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되고 그 부정적 영향력이 후손들의 삶에 나타난다(102쪽).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저주를 이루어지게 하는 주체는 사탄 혹은 악한 영이 된다.

“사탄은 죄와 저주를 통해 당신의 삶과 가계를 노략질하고 파괴시키려고 한다”(63쪽).


이윤호의 또 다른 관점은 저주를 개인의 삶에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는 힘으로 말하는 것이다. 가계를 타고 흘러 내려오는 저주는 하나님의 복을 차단하고, 여러 종류의 재앙이 한 가정에 반복적으로 발생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그 증상을 여러 종류로 제시한 후 친절한 각주를 달아 놓았다. 즉 누가 그가 언급한 증상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증상에 시달릴 때, 성급하게 저주 아래 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여러 개의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거나 하나가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저주의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힘을 사탄의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람을 사탄과 연결시키는 매개물체가 있고 사탄의 능력은 그 어떤 특정 물건 안에 존재할 수도 있다(181쪽). 그래서 그는 예를 들어 “마약의 영”, “간음의 영” 등의 용어를 주저하지 않고 사용했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모든 불행, 사고, 병, 즉 삶의 부정적이고 해악적인 현상들에는 그것을 사람에게 실어 나르는 악한 영이 존재한다.


이윤호는 자신의 가계저주론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가계저주론으로 가기 이전에 성경에 사용된 저주란 단어를 파악하는 데도 그는 실패했다. 성경에서 저주는 이윤호가 말하는 것만큼 다양하거나 풍성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선 성경에서 저주의 주체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사탄의 저주는 있지도 않다. 사람 사이의 저주는 윤리적 차원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즉 남에게 악한 말을 하거나,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나도록 소원하는 것을 말한다.

저주가 현실에 이루어지는 면에서 살펴보면 하나님의 저주만이 효력이 있다.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의 축복의 반대어이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말씀하시는 것 혹은 그 결과를 축복이라고 부른다. 사람에게 나쁜 일, 괴로운 일이 일어나도록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저주이다. 하나님은 무턱대고 저주하시는 법이 없고 사람의 행실, 율법준수의 여부에 따라 벌로서 저주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거나 의도하시면 무엇이나 그대로 된다.

만일 저주의 주체가 사람인 경우 저주가 절로 효력을 나타내는 법은 없다. 하나님은 세상을 직접 다스리시며 사람들이 저주하거나 축복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으신다. 즉 사람들의 저주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경우처럼 저주를 들어주셔서 그가 저주한 대상에게 그대로 해주실 때에만 사람의 저주는 효력이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저주를 들어주지 않으시면 아무에게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의 저주는 그 동작자가 하나님으로 바뀔 때 하나님의 저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억만 저주는 욕설이나 마찬가지로 허공을 때리고 흩어지는 소리, 음의 파장일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아무에게도 저주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위정자나 권세자들, 부자 등과 같이 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원한을 사기 쉬운 그런 사람에게는 – 앙갚음할 다른 방법이 없어서 – 사람들은 숨어서 저주라도 퍼붓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특별한 명령으로 금하셨다. 가난한 자, 힘없는 자, 혹은 불구자 등 자기보다 못하기 때문에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상대라도 하나님은 마음대로 저주하는 것을 금하셨다.

사람들에게 저주를 금하신 것은 저주가 그 자체로 효력을 나타내어 세상이 저주로 가득하고 인간사회가 저주로 망가질 것을 염려하셔서가 아니라, 저주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저주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한 저주는 마음속의 불만과 악을 입으로 뱉어 내버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저주하는 사람만 계속 망가질 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저주는 움직이는 힘이 아니다. 사탄이 사용하는 삶의 파괴력과 해악력을 가진 사탄의 무기도 아니다. 아무렇게나 떠다니다가 저주받은 사람이 저주를 받을 만한 형편이 되면 쏜살같이 그의 삶을 갈아먹기 시작하는 그런 무인격적인 저주란 성경이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세상을 사탄에게 맡기지도 않으시고 사탄의 저주가 활개치도록 방관하지도 않으신다. 세상은 마귀들의 왕국이 아니라 사람들이 타락한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발 깔개이다. 하나님은 만군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시다. 이것은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 어디서나 동일하게 외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성경에서 저주의 효력을 만들어내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사람을 저주하실 수도 있고 사람의 저주를 받아 실현되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아무나 아무 때나 마구 저주하시거나 누구의 저주든지 성취되도록 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성경적 저주론에서 내려지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성경에서 저주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한 단면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시요 그 안의 모든 것을 직접 다스리시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고 이 면에서 지금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이윤호의 책에 설명된 성경의 예를 들어서 그가 어떻게 성경을 잘못 분석하고 있는지 확인해보자.
하나님의 최초의 저주는 뱀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브와 아담에게로 이어졌다. 저주를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내용 그대로 되었다.
이 기록에서 하나님께서 저주가 대물림되는 그런 영적 질서를 세우셔서 그 저주의 힘으로 뱀에게 여자와 남자에게 그리고 땅에 계속 같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이 최초의 저주 사건은 이윤호의 저주론을 지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계저주론을 찾으려 했다면 이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저주야말로 그의 가계저주론의 한 부분을 가장 잘 지원하는 구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담에게 내린 저주가 끝까지 이어져 가고 있다는 식으로 이 부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번째 비판에서 다룰 것이다.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한 경우를 보자. 이윤호는 이 때의 사건이 그의 학설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잠시 후 “하나님께서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 9:26)는 말로 설명된다. 노아는 가나안을 향한 자신의 저주가 그냥 효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주는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니거나 결과를 만들어내는 무슨 힘이 아니다. 이 구절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윤호처럼 저주가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노아에게서 곧바로 가나안과 그의 후손에게로 넘어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노아의 저주를 들어주신다면 가나안은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었을 것이다. 저주가 현실이 되게 하시는 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서 – 이윤호는 이 구절을 설명하지 않지만 – 사람의 저주와 하나님의 저주 사이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축복하시며 누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그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누가 그를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저주하시겠다”(창 12:3)고 단언하셨다. 누구의 저주가 더 효력이 있겠는가? 물론 아브라함을 향한 다른 사람의 저주는 그냥 소리로 끝날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저주를 받아 아브라함을 저주하시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리브가와 야곱 사이의 대화를 이윤호는 마치 리브가가 한 말(저주) 때문에 20년 동안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본문을 읽어보면 저주란 단어는 다만 추측의 말 중에 나올 뿐이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다가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르며 그 저주는 내게 돌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염려는 기우였다. 이삭은 속아넘어갔고 야곱을 축복했다(창 27:27-29). 그리고 이 축복은 그대로 고정되고 말았다(창 28:1). 이삭은 야곱을 저주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윤호의 설명처럼 어머니에게 흘러갈 저주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예상대로 야곱이 저주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삭의 저주를 야곱에게 이루어지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저주의 자동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말해야 한다. 또 정말 그 저주가 리브가에게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성경적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야곱의 생애와 관련하여 이 사건에서 퍼부은 저주가 없기 때문에 저주에 관해서는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 이윤호는 이 부분의 해석에서도 과도하게 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이 이 때 저주가 아니라 축복한 것이 어떻게 야곱에게 이루어졌는가를 본문은 계속 보여준다. 야곱이 이삭의 축복처럼 거부가 되어 돌아온 것은 축복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야곱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복주시며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에 인생을 주관하는 다른 세력은 없다. 리브가가 다시 아들 야곱을 만나기까지 20년 동안 고독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이것이 그녀에게 돌아온 저주였다는 것은 이윤호의 해석일 뿐이다. 본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지만 리브가는 더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돌아올 재회의 날을 기다리며 기쁨과 기대의 세월을 보냈을 수도 있다.

 

신자가 저주 아래 살 수 있음을 증언한다고 이윤호가 설명하는 신명기 28:16-68을 보자. 신명기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을 직접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신약시대의 주장이지만 우선 이윤호와 그가 인용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우리 시대에도 적용되는 말씀들로 한 번 분석해보자.

그렇게 하더라도 이 말씀은 이윤호의 글과는 다르다. 그것은 단순한 저주목록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력이나 힘으로서의 저주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윤호는 신명기 28장 20절에서부터 거의 매 절마다 기록되어 있는 저주를 현실이 되게 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고의로 빠트리고 그 결과만을 열거하고 분석해 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저주가 절로 움직이는 힘인 것처럼 설명하지만 성경은 그런 저주를 알지 못한다. 참고로 몇 절만 인용해본다: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여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신 28:20하~24상).

 

끝까지 읽어 내려가도 이윤호의 힘이나 세력으로서의 저주 개념은 신명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니 성경의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저주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축복도 마찬가지이다. 축복을 받는 법을 하나님께서 별도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축복하신다.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인 것이다.

신약의 빛으로 구약성경을 읽으면 이윤호의 설명은 더 엉망이 되고 만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을 설명하면서 십계명은 아직도 유효하며 수준이 훨씬 더 높아졌다고 썼다. 따라서 저주가 기록되어 있는 제2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며 따라서 저주가 신약시대의 신자들에게도 효력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129쪽). 또 “그리스도께서 …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묘한 방법으로 설명하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저주가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성경적인 저주 개념을 자신이 이해하는 힘과 세력으로서의 저주로 바꾸어 이해한 때문에 생긴 자신만의 엉뚱한 해석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저주 개념을 사용하면 용서함을 받은 신자들도 저주 아래 살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용서하신 사람들을 하나님이 계속 저주하신다’. 말 자체가 우스꽝스럽지만 저주란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이윤호의 주장은 이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민수기 5장에 보면 의심의 소제에 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 아내가 음행의 의심을 살 때 아내를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소제를 드리고 의심의 소제물을 마시게 하는 계명이다. 이 규례가 마치 저주의 자동적 효력을 보장하는 것처럼 많이 사용되지만 음행을 한 아내가 물을 마셔 이상이 생기는 것은 저주나 마력의 결과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고 네 배로 붓게 하시는” 것이다(민 5:21).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저주를 들어주지 않으시면 저주는 아무것도 아니다. 남이 저주한다고 해서 나에게 저주가 임하지는 않는다. 저주는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저주한다고 해서 나의 원대로 하나님께서 내게 저주를 내리시지 않는다. 맹세와 욕설과 한탄과 자조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시면 그것은 그냥 말일 뿐이다. 인간세상의 뜻 없는 넋두리로 허공을 울리고 사라지고 만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오, 자신의 뜻대로 인간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저주하는 것을 금하셨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사람을 저주한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주지 않으실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시는 한 사람의 저주는 아무런 효력이 없고 결국 그의 입만 버리는 것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 경우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은 한 우물에서 두 가지 물이 나오는 것처럼 모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도들은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에게라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셨다.

그의 책 92쪽에서 “하나님께서는 유전적 복과 저주의 법칙을 선포하시고 기록으로 남겼다”고 이윤호는 주장하지만 그는 이 말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가 인용한 구절은 저주의 자체 효력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으로서의 저주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인용한 구절들을 살펴보라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갚으시는” 분은 다름 아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89쪽). 계속 동작자 즉 저주의 주체인 하나님의 이름이 그가 인용한 모든 구절에 수록되어 있다.

 

이윤호는 저주란 단어에 집착한 나머지 이 저주의 주체를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가 이런 식으로 성경을 오해 및 오용하게 된 것은 성경의 저주 개념을 배우려 하지 않고 그가 다른 곳에서 배운 다른 사상의 저주 개념을 성경에 억지로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성경이 가르치는 저주가 무엇인지 배우려는 자세로 본문을 대했다면 본문이 명확하게 보여주는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게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고 그는 자신이 인용한 이 성경 구절들이 하나님의 사역인 저주와 그 저주의 약속에 관한 말씀임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었을 것이다.

물론 이 구절에는 가계에 관한 말씀이 있다. 그러나 이윤호의 가계저주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 구절이 가계저주론의 자료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저주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비의 죄를 자손들에게 갚으신다는 하나님의 경고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저주하심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윤호가 말하는 하나님 없이 살아 활동하는 저주가 가계를 타고 흘러 내려간다는 주장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이 문제는 가계저주론에서 더 자세하게 비판하겠다.

 

성경의 모든 구절을 다 살펴보고 싶지만 어느 구절에 가 보아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윤호의 저주론은 저주를 하나님의 사역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별도의 영적 질서로 이해함으로써 잘못된 길로 가고 말았다. 가계를 그냥 떠돌아다니는 저주나 축복을 성경은 알지 못한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되려면 저주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님을 증명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영적 질서에 내 맡기신 채 방관하고 계심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 세상은 온갖 잡신과 온갖 혼령과 온갖 물신의 놀이터가 되고 인간은 그 노리개가 되며 그것들을 피하거나 쫓아내는 식으로 일생을 그렇게 살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성경의 신앙도 아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이 그런 식으로 살았다. 물론 아직도 이런 술래잡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정령숭배나 물신론이나 부적과 같은 얘기들을 터무니없는 소리들로 배격했었는데 이윤호의 책은 오히려 성경의 개념을 바꾸어 가면서까지 그들의 얘기를 성경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성경의 대 주제는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요 섭리자로 알려주는 것이다. 그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죄의 짐을 지게 하신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한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중보자는 예수님뿐이시다.

천사는 그 사이에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천사들이 있음을 간간이 알려주면서도 천사숭배를 금했다. 사탄의 세계란 무엇인가? 성경은 사탄의 존재에 대해서 가끔 말하면서도 사탄학이나 마귀론을 뽑아낼 만큼 많은 자료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정립되고 나면 사탄의 힘이란 무시해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보내신 분이 자신의 백성을 방치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마구 사탄의 약탈 물이 되도록 하지는 않으신다. 불신자의 세상이나 신자의 세상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아직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비를 뿌려주시고,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모두에게 해가 돋게 하신다”(마 5:47).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인가? 이윤호의 글은 이런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가 아니라 사탄과 온갖 귀신들로 가득 차고 각종 영들이 가계를 드나들며 인생을 넘보고 질병과 사고와 고통과 무질서 등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괴롭히는 귀신의 세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그려주는 세계상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천사숭배가 금지된 것처럼 사탄으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도 불필요한 것이다. 저주란 더더욱 사람들이 두려워할 무엇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 까지 사랑하신 사람들을 다시 저주하지는 않으신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셨고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그 예수님에게 다 쏟아 부으심으로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최후의 저주는 이제 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만 관계되어 나타난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주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게 해주는 교회와 성령의 도구가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과 관련된 저주도 함께 나온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저주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윤호의 저주론은 이런 성경의 저주론과는 너무너무 거리가 멀다. 그것은 복음의 전도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다른 사상이다. 잘못된 저주론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의 여기 저기서 몇 구절을 인용하여 적당하게 설명한다고 기독교적 저주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저주를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해하면서도 가계저주론이 가능할까? 미리 말하지만 저주를 하나님의 사역으로만 바로 이해했어도 가계저주론 및 가계치유론을 고안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윤호의 책은 저주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사탄의 활동, 사탄의 무기로 둔갑시켰다. 이런 면을 지적하며 그가 기독교를 미신화하고 있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또 그는 인간이나 사탄의 저주를 – 하나님 없이 그 자체로 효력이 있다고 함으로써 –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면을 지적하며 그가 미신을 기독교화하고 있다고 하면 역시 심하다고 할 수 있을까?

기독교가 애당초 이윤호가 말하는 이런 저주, 사탄과의 싸움이라면 복음의 전도자들이 그렇게 잘 살아가고 있는 이방종교의 영역에서 또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대립하며 피흘리기까지 싸울 필요나 이유가 있었을까? 이윤호의 주장은 이상한 저주론을 도입함으로써 이와 같은 기독교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현세적, 인본주의적, 물질주의적 축복관과 저주론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을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내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한 지혜와 지식의 산물임을 잊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회개와 용서를 베푸시기 위하여 참으시고 구원의 길을 마련하셔서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런 세상,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세상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윤호의 또 다른 한 가지 과오를 지적할 수 있다. 

이윤호의 가계저주론 및 가계치유론에는 그의 책 어디에서도 토론되지 않은 하나의 전제가 깊이 깔려 있다. 짧게 말해보면 그것은 모든 질병과 사고와 실패, 가난 등은 나쁜 것 곧 저주요 건강과 안전과 성공과 부는 좋은 것, 곧 축복이다라는 다분히 말초 신경적인 전제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사는 풍요로운 성도의 삶이란 것은 질병과 사고와 실패에 시달리지 않는 평화로운 삶 정도를 말한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로 고통을 당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도 여전히 저주 아래 있다는 단순한 설명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축복관 내지 저주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인간의 축복으로 그리고 무엇을 인간에게 내리시는 저주로 규정하셨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인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발견한 진정한 축복, 진정한 신적 벌과 저주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기록으로 남겼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혹은 사람에게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현상적, 현세적, 인본주의적, 물질주의적인 관점에서 복과 저주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에게 대개 좋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과 사람들의 행복은 자주 같은 용어 같은 현상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윤호가 전제한 그 모든 좋은 것을 성경이 항상 하나님의 축복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저주는 대개 사람에게 불행, 고난, 병, 사고 등으로 예고되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한다. 축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저주와 인간의 불행의 용어들이 종종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윤호가 열거한 인간의 모든 불행을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저주와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행복이다’는 분명 성경적이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를 바꾼 등식 즉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축복이다’는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인간의 불행이다’는 분명히 성경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의 저주이다’는 등식은 성경적이 아니다.
성경적 축복관과 저주관을 관찰할 때 잊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과 인생 사이에는 이런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관점보다 더 중요한 주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짧은 인생살이 가운데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배우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며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관점을 첨가하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을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믿으며 그의 주권 밑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세적, 물질적 축복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이 거룩한 관계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현0세적, 물질적 저주는 사람에게 이 거룩한 관계의 단절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즉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영적 축복, 진정한 영적 저주에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이윤호가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말하는 현세적, 물질적, 인본주의적 축복관과 저주관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이나 저주는 당연히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한 상태나 불행한 상태가 곧 하나님의 축복이나 저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성경적 축복과 저주를 관찰할 때 우리는 항상 인간적 상태보다는 그 상태를 만들어내는 원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 점을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그가 저주받은 상태 즉 가계를 타고 흐르는 저주와 관련된 현상으로 지적하는 것을 살펴보자. 그가 열거한 저주 목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굴욕, 무자식,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질병, 가정의 파괴, 가난, 멸망, 억압, 실패, 하나님의 싫어하심, 정신적 감정적 장애, 만성적 질병, 유전병, 불임, 유산, 가족 불화, 계속되는 재정적인 부족, 갑작스런 사고, 자살, 비극적/비정상적 죽음, 요절, 미침, 마음의 혼동이나 생각의 혼동, 떨리는 가슴과 걱정, 영혼의 비통이나 절망, 염병, 소모 혹은 낭비되는 병, 심한 열병, 염증, 낫지 않는 종기, 혹, 괴혈병, 개창, 가려움증, 눈멂, 무월경, 월경불순, 허약한 월경, 성불감증, 낭포, 암, 출산에 관계된 구조적 결함, 마약, 반항적인 문화, 수면 장애, 악몽에 시달림, 이유 없는 피곤증, 건망증, 폭발적 분노, 암, 당뇨병, 관절염, 심장병, 신체적인 약점, 알코올중독, 성중독증, 일중독증, 도박, 폭력, 포르노. 이혼, 중혼, 객사, 단명, 사고사, 정신질환, 집단살상, 탈취, 배반, 반역, 모함, 윤간, 이단, 사교집단, 무당, 다른 사람이 못되는 것을 통쾌하게 생각함, 이혼, 각종 사고, 실패…

여기 인용한 것도 적지 않지만 남아 있는 것도 아직 엄청나다. 한 마디로 의사들이 알고 있는 모든 병명을 다 수록하고, 세상에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돌발 사고와 재난, 삶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사람에게 고통, 괴로움을 주는 것의 이름들을 다 새겨 놓으면 저주 목록이 일단 완성된다. 그리고 삶이 변해 가는 대로 계속 나타나는 삶의 부정적 요소들을 쌓아 가면 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는가? 하나님의 저주와 연결된 구절들 특히 신명기 28:16-68에 기초하여 다른 사람이 분석한 것을 현 시대에 맞도록 각색해 놓은 것도 있고 그가 첨가한 것도 있다.

이런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가계의 저주, 그리고 가계의 치유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면 저주가 깃들어 있지 않은 가문이 있을까? 그의 목록을 기준으로 삼아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어느 가문의 어느 한 사람도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 모든 가계에 가계치유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가 제안하는 방법을 따라 가계치유에 힘쓰면 위에 열거한 모든 현상들이 끝나고 아름답고 평온하게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만끽하는 삶이 시작될까? 그런 풍요로운 삶의 비밀이 이 때까지 감추어져 있다가 최근에 몇몇 사람에 의해 극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또 무슨 조화 혹은 무슨 하나님의 섭리일까?

이 질문들은 즉시 별도의 답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윤호가 제안한 가계저주론과 가계치유론은 이 때까지 교회가 알지 못하던 것이다. 물론 성경이 가르치는 저주나 치유의 가르침도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발견되는 삶의 해악적 요소들을 한 데 모아 저주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고 그것을 피하는 이상한 길을 연구하여 치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는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한 그의 기도문에 잠시 등장할 뿐이다. 자세히 보면 기도문도 대부분 사탄과 온갖 귀신들, 악령들, 병을 실어 나르고 사고를 몰고 오는 기이한 영들을 향하고 있다.

삶의 해악적 요소와 삶의 긍정적 요소를 구분하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다. 이윤호처럼 용감하게 삶의 해악적 요소들을 신의 저주나, 악령의 저주 아니면 귀신이 씐 것으로 말한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 길흉화복이 조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금도 한국에 수없이 살고 있다. 그들도 나름대로 화를 피하고 복을 얻는 비결을 익히며 살아간다.

삶의 해악적 요소를 저주나 흉이나 화로 부른다는 점에서 이윤호와 이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반대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에 관한 가르침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윤호의 가계저주론과 치유론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그의 목록 속에 하나님의 저주의 내용 및 그 결과를 인용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신랄하게 평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저주 내용과 그가 모아 놓은 저주 목록 사이에는 깊은 고랑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저주는 저주의 결과에 강조점이 있지 않다. 그 앞에 붙어 있는 조건 즉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사람에게 오게 하신다는 것 즉 저주의 주체와 그 주체의 사역이 강조점이다. 반면에 그가 모아 놓은 저주 목록에는 – 저주를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힘, 세력, 영향력으로 본 까닭에 – 저주의 결과, 현상, 증상 그리고 저주 자체의 효력 내지 힘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불행한 삶이 그 강조점이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 앞에서 잠시 지적했던 것인데 – 그의 저주 목록 속에 아담과 이브, 뱀과 땅에 내리신 하나님의 최초 저주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치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빠트릴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그가 가계저주론과 가계치유론을 함께 결합시켰기 때문에 이 첫번째 저주의 내용이 그에게 피할 수 없는 약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앞에서 대답 없이 던졌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윤호의 치유론을 따르면 정말 – 그가 말하는 –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하게 만끽하는 삶이 만들어질까? 그렇지 않다. 이 답을 우리는 아담과 이브에게 하신 저주의 관찰에서 쉽게 끌어낼 수 있다.

죄와 벌 혹은 죄와 하나님의 저주와의 관계가 가장 확실한 주제가 죽음이다. 성경은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왔고 모든 사람들이 죄가 있어 모두가 죽는다고 말한다(창 3:18; 롬 5:12). 이보다 더 확실한 저주의 결과가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이것은 이윤호의 학설, 죄와 저주가 유전인자를 통해 가계에 흘러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이윤호의 치유방법을 따를 때 죽음도 떠나보낼 수 있다는 것일까? 물론 그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제로 보지 않았다. 저주의 절단을 통해서 다른 것은 다 고쳐질 수 있다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어도 죽음이란 하나님의 저주가 끝났다고 말할 용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죄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이브에게 주신 해산의 고통과 남편을 사모함, 아담에게 주신 노동의 고통과 죽음은 죄와 저주, 조상과 후손 사이에 가장 강력한 결속력을 보여주는 것인데도 이윤호는 저주의 치유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그 저주는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최초의 저주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저주를 끊어낸다는 이윤호의 외침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모순이 있다. 그의 저주목록은 성경에서 다루는 저주의 핵심을 보지 못한 것이다. 가장 강력한 주제는 피하고, 고쳐질 만한 것들, 개선될 만한 것들만 거론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하고, 또 피할 만한 것만 수록해 놓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가계저주론과 가계치유론이 성경적이다 라고 말하는 독단은 어디서 왔는가?

무엇이 저주와 연결된 현상들인가를 말함에 있어서 그는 성경을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사람의 눈과 사람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람의 눈에 좋아 보이는 기준을 따라 저주와 축복을 구분하고 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한 삶과 물질적 풍요, 건강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혹은 옳다고 하는 것을 복으로, 사람의 눈에 싫어 보이는 것을 저주로 구분한 것이다. 지극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며 사람 중심의 기준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신학도 아니고 성경 신학도 아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교훈도 아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에서, 아니, 전 세계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들과 바라는 것들, 그리고 싫어하는 것들과 피하고 싶은 것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좋은 것은 선한 신이 혹은 하늘이 주신다고 믿었고 싫은 것은 귀신들이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우리의 좋은 것을 탐내고 빼앗아 가는 것이 한국에서 오랜 동안 알려진 귀신들의 장난이었다. 귀신들의 심술궂은 훼방의 결과 사람들에게 불행이 오고 재난이 온다고 믿었다.

 

이윤호의 저주론, 축복관은 한국의 전래 미신적 기복사상의 기준을 그대로 전제로 삼아 그 기초 위에 성경적 자료들과 이론들을 올려놓은 것이다. 성경적으로 시작했다면 저주의 첫번째 줄에 죽음을 놓아야 한다. 그리고 저주의 치유에서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은 누가 어떤 학설을 내어놓더라도 쉽게 극복되지 않고 끝까지 인생을 따라온다. 아무리 행복하고 풍요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린 삶을 산다고 고백해도 하나님의 저주에서 나온 죽음이 그를 부른다.

다른 모든 저주를 다 극복했다고 해도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는 치유론은 잘못된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가계를 타고 아니면 유전인자를 타고 내려온다고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인데도 이를 가계치유론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면 그건 성경적인 가계치유론이라고 볼 수 없다. 아니 그는 가계저주론도 가계치유론도 성경에서 증명하거나 성경에서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윤호의 치유론을 따른다고 해도 삶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인생은 변함이 없고 인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법도 그대로 남는다. 기독교인도 병에 걸린다.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한다. 실패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사고를 만나는가 하면,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도 쇠약해지고 결국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난다. 우리는 온갖 인생의 고비와 방해물들에 부딪히면서도 우주를 만드시고 사람을 빚으시고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거룩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의 축복과 인간의 행복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에도 당황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이윤호가 말하는 저주의 목록의 증상들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건강과 부와 풍요와 권세와 존경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백수나 되어 죽음을 곱게 맞이하는 불신자들도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거룩한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의 저주와 인간의 불행이 일치하지 않아도 성경적 관점에서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의 법칙과 인생의 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에서는 신자가 성공하는 것 못지 않게 불신자들이 성공한다. 신자가 건강한 것 못지 않게 불신자도 건강을 유지한다. 반대로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 병이나 고생, 사고가 별 차이 없이 발생한다. 사람들이 우주와 자연, 인생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요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그 질서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인생을 이해하는 것은 합리주의적인 신앙이 결코 아니다.

앞에서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을 굳이 또 인용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아직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비를 뿌려주시고,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모두에게 해가 돋게 하신다”(마 5:47). 의로운 욥이 범죄나 저주와 관계없는 고난을 당했다는 점도 잊지 말자. 이윤호가 저주항목에 포함시킨 그런 일들 중 죄와 저주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사례들을 성경에서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야고보가 붙잡혀 처형당했다. 헤롯 아그립바는 다시 베드로를 붙잡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이적적인 손길을 통하여 감옥에서 빠져 나왔다(행  12:1-10). 왜 야고보는 젊어서 죽어야 했고, 왜 베드로는 살아 나와야 했는가? 인간의 눈으로는 저주와 축복으로 구분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현상적, 현세적인 축복관 내지 저주관은 이 사건을 설명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을 부르시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셨으며 복음의 사역자가 되게 하셨던 하나님의 편에서 관찰하면 한 사람의 죽음과 한 사람의 삶은 아무런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 모두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으로 살다가 한 사람은 좀 빨리, 한 사람은 좀 늦게 이 세상을 떠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신앙은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의 산물인 질서와 법칙을 일시적으로 파괴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면만이 아니라, 이적이 꼭 필요하다고 긴박하게 요청해야 할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질서와 법칙을 지키신다면 어쩔 수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면을 포함하고 있다.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좋다고 하시는 것은 같지 않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우리가 불행, 저주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저주라고 부르신다면 이윤호의 저주론과 축복관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신앙의 경험도 그렇다. 꼭 필요하다고 숨막히게 기대하는 때에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달라지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나의 삶을 끌어가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끌어가신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고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기대하는 곳으로 세상을 끌어가시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이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성경의 신앙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인의 모습과 이윤호가 그려주는 신앙인의 모습의 예를 몇 가지만 비교해보자.
아프고 다치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다. 누구나 건강하게 평생 아니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병이 발생하고 다친다는 것은 저주받은 흔적은 아니다. 반대로 건강하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는 표시가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병을 남겨놓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되기도 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병을 그렇게 이해했다(고후 12:9).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며 자녀를 낳아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축복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남자나 여자나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마 19:12) 결혼하지 않아도 좋다는 바울 사도의 충고가 나오기도 한다(고전 7:8-11).

부가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부는 사람을 망치는 원흉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거나(마 6:24)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충고(딤전 6:10)가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복된 사람이라고 선언하기도 하셨다(눅 6:20).
이럼에도 불구하고 병, 사고, 부, 행복, 호상 등과 같은 사람의 지혜와 판단을 기준으로 축복과 저주를 구분한다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지고 왜곡된다. 혼란케 되고 기록되어 있는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마저 모호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죽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저주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보신다(시 116:15).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 세상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나르는 현세적인 수단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죽음을 기대하고 찬송할 수 있었다(고후 5:1-9).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예수님께서 자신을 향해 부탁하는 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을 따른다: “오늘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더 이상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가 아니라면 성도들이 죽음에 이르는 방법들 즉 병이나 사고 등도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더욱 이윤호처럼 삶을 망치는 다른 영향력이나 힘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으로 설명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이곳에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 우리의 눈에는 불행하게 보이는 죽음이 하나님 편에서는 정당한 방법의 죽음이다.

 

이 하나님의 방법과 인간의 기대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간격이 놓여 있을 때 바꾸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지혜와 사람의 기대이다. 즉 저주라고 부르기를 포기하고 우리 마음대로 축복이라고 규정하는 방법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축복의 결과와 저주의 결과, 축복과 저주의 한계를 성경적으로 그어놓지 않은 것이 이윤호의 주장에 치명적인 과오이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 떼어놓고 힘으로 아니면 영적 법칙으로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저주와 축복을 말함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무시하고 말았다.

성경은 현세적, 물질주의적, 육체적 복이나 저주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국적, 영적, 도덕적 복과 저주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현세적, 물질주의적, 육체적 복과 저주는 다만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바울 사도처럼 우리는 “사나 죽으나 우리가 다 주님의 것이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6장 8-10절처럼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니까….

 

억지만 쓴 가계저주론 및 가계치유론

이윤호는 그의 책에서 가계저주론 및 가계치유론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성경을 아는 사람이 조금만 신경을 써서 읽어보면 그의 주장은 억지만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오랜 연구 및 임상실험 결과를 이렇게 평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성경이 사용하는 저주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역의 하나인 저주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저주가 흘러간다는 표현조차 불가능하다. 그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말하려면 성경의 저주 개념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한 가계를 계속 벌하심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했어야 할 성경 구절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부각시키지 않고 엉뚱한 저주 개념을 집어넣었다.

 

2) 그는 죄와 저주, 죄의 전가와 저주의 전가를 혼동했다. 저주를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미치는 세력, 힘, 영향력 혹은 사탄의 도구 등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 이후에 계속 사람들이 이런저런 죄를 지었음을 성경을 사용하여 증명한 다음에 갑자기 “아담으로 인한 저주 역시 우리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었다”(46쪽)고 결론지었다.

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사람 안에 머무는 것이지만 저주는 하나님에게서 나와 사람들에게 결과를 만들어 놓을 뿐이다. 따라서 죄의 전가와 저주의 전가는 명확히 다르다. 하나님의 사역과 그 결과로서의 저주 및 저주받은 상태가 가계를 따라 이어져 감을 말하려 했다면 그는 다른 여러 가지 문제를 다 젖혀 두고 앞에서 말한 대로 최우선적으로 죽음이란 저주를 다루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점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이윤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죄의 전가와 하나님의 벌의 결과가 모두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진 교리 이상의 것이었는데 그는 이 점을 전혀 증명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자기 주장만 늘어놓았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죄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혼동하여 조상의 “죄와 저주”가 후손의 “죄와 저주”의 원인이 된다고 묶어 말하는 그의 주장에는 다른 엄청난 위험이 하나 도사리고 있다. 물론 그는 저주를 하나님의 영적 원리에서 나온 세력, 영향력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데 별 무리가 없었지만 저주를 하나님의 사역 행위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그의 말은 ‘후손이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다’를 뜻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드는 것이 되고 만다. 즉 죄 개념과 저주 개념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혼동을 해서는 안 된다.

 

3) 그의 저주 개념과 그의 증명방법을 따른다 해도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결과, 영향력, 힘으로서의 저주 개념, 죄 개념이 성경에서 가계를 통해 계승된다는 것을 그는 조금도 증명하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은 한 가계에 속한 조상과 한 후손이 비슷한 혹은 동일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다. 그것도 억지 해석을 통해서 겨우 그렇게 했다.

족보 속에서 가까운 두 세 사람,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세 사람이 동일한 죄를 지었음을 내 보이는 것이 저주가 가계를 타고 내려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인가? 이런 것이 가계저주론을 증명하는 방법이라면 한 가계에 적용하지 못할 죄, 저주가 있을까? 사람들의 성향이 대개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증명의 방법이 아니라 혼동의 방법이 된다. 또 동일한 죄를 짓는 사람들을 모아 이들은 같은 범죄 같은 저주 가계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찾아내자면 내세우지 못할 학설이 없다. 즉 그는 가계저주론을 먼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경에서 그 증거구절을 찾고자 애썼을 뿐이다. 성경에서 시작하면 그런 결론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계에서 같은 유형의 범죄를 모으는 것이 가계저주론의 증명이 된다고 고집한다면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범죄한 사람들의 기록을 한 번 다 정리해 보라. 만약 그렇게 한다면 가계저주론은 사라지고 온갖 유형의 범죄가 한 가계 안에서 발생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유형의 범죄가 가계와는 상관없이 여기 저기서 발생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의 책에 연결해 놓은 범죄 및 저주의 사슬은 극히 그 일부이다. 라합-다윗-솔로몬뿐이다. 그 앞에도 그 뒤에도 그는 아무 것도 덧붙이지 못했다. 아브라함-야곱에다가 덧붙일 무엇이 없었다. 노아-가나안에 무엇을 더 붙일 수 있는가? 다른 종류의 질문도 있다. 한 번 발생한 범죄가 족보를 따라 다른 후손에게서 또 나타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가계가 왜 그렇게 많은가? 그가 그려낸 범죄 및 저주 족보 안에서도 질문이 등장한다. 왜 바로 그 족보에 계속 같은 유형의 범죄가 이어지지 않는가? 신학은 확률 게임이 아니다. 그가 말한 대로 영적 법칙을 찾는 것이다. 한 가계에 특수한 죄와 그 죄에 대한 특수한 저주가 흘러들어 왔다면 그 가계에 속한 모두에게 같은 것이 나타나야 한다. 아니면 그 영적 법칙이 적용되지 말아야 할 개인적 이유가 모두에게 따로 있어야 한다. 이 점을 성경에서 증명할 수 있을까? 그는 이 영적 법칙을 성경에서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그 이유는 성경에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4) 가계저주론을 만들어 낸 것은 성경연구가 아니라 그의 임상실험이다. 임상실험으로 찾아내고 증명했다는 그의 기록을 읽어보면 임상실험에서 찾았다기 보다는 그에게 찾아온 사람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문득 떠오른 그의 직관에서 나왔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증명하는 방법이 아니라 그냥 고집하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의 조상 중에 비슷한 죄를 지은 사람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거나 그냥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한다면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것을 가리켜 그 사람이 만들어낸 혼자의 생각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가계저주론이 엉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적하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가 가계저주론을 증명한다고 사용한 증거구절들에 대한 검토이다. 그는 십계명의 한 구절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와 또 비슷한 몇 구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은 아비의 죄를 자손에게서 찾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구절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윤호는 극히 단편적이었다. 즉 그가 인용한 구절들은 그의 가계저주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이 말씀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아비의 죄를 자손에게까지 벌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살아 움직이는 저주를 통해 가계를 괴롭게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그렇게 하시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윤호의 가계저주론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삼사 대를 벌하신다”는 말씀은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과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 계명을 어김과 벌, 계명을 지킴과 은혜가 대조되고 있다. 한 사람에게 지킴과 어김, 그 결과인 삼사대의 벌과 천대의 은혜는 항상 선택의 문제로 주어진다. 한 번의 선택으로 운명이 결정되는 그런 하나님의 율법은 아니다. 지킴 후에 어김이 올 수도 있고, 어김이 있은 후에 지킴이 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삼사대의 벌과 천대의 은혜도 변동하는 개인의 지킴과 어김에 따라 그에게 다르게 적용된다. 두 가지가 선택의 문제로 주어졌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이 계명은 어느 한 세대에만 유효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세대에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계명은 늘 유효하게 적용된다. 한 개인이 하나님의 계명 앞에 늘 새로운 선택의 여지를 가지는 것처럼 후 세대도 새로운 그들의 선택의 기회를 가진다. 이윤호의 주장은 이 계명이 어느 한 세대에 적용되었다가 벌이 적용될 경우 삼사대가 지난 후에 다시 한 번, 은혜가 적용될 경우 천대(이윤호는 은유적 수자라고 부른다)가 지나서 다시 한 번 사람들 앞에 제시될 때에만 옳은 분석이 된다.

 

넷째,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이나 범죄한 세대가 회개하고 용서를 청할 때 벌을 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실 수도 있다. 즉 삼사대의 벌은 고정된 운명이 아니다. 이윤호가 인용한 구절을 통해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민 14:18을 인용하며 가계저주론을 증명하려 했지만 이 구절은 오히려 그의 주장을 반대하고 있다.

가나안 땅을 탐지한 정탐들의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공포에 사로잡혀 “애굽으로 돌아가자” 외치며 소동을 일으켰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 모세에게 그 백성 모두를 멸하시려 하셨다. 다급해진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민 14:17-19). 이윤호가 인용한 구절은 모세의 기도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 삼사대의 벌과 천대의 은혜에 의지해 용서를 빌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민 14:20)고 선언하신다.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가계저주론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삼사 대와 천대를 대조시키며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죄인을 벌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보다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세는 하나님의 천대의 은혜에 호소하며 삼사대의 처벌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다섯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수록된 몇몇 부모의 죄를 자녀들에게서 물으셨던 몇몇 실례를 들어 가계저주론을 입증하려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수록되어 있는 죄를 벌하시지 않고 용서하시며 오히려 은혜를 베푸셨던 실례들을 삭제하거나 적당하게 해명해야 할 것이다. 

가계저주론을 그것도 이윤호가 이해한 저주가 흘러 내려가는 그런 것을 성경에서 증명하거나 찾아낼 수는 없다. 신약성경에는 물론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구약적으로 찾으려 해도 물론 나타나지 않는다. 구약 성경에 특별하게 언급된 가계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아브라함의 가계가 있을 뿐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새겨져 있는 메시아의 가계가 있을 뿐이다.

신약시대로 오면 이제 어느 가계나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긍정적으로도 그렇고 부정적으로도 그렇다. 가족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나르거나 가로막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문도 민족과 혈통도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막거나 전하는 수단이 중요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신화와 족보에 몰두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온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딤전 1:4). 비슷한 말씀이 디도서 3:9에도 기록되어 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윤호의 결론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는가? 이윤호는 바울 사도의 충고와는 반대로 “가계의 영적 뿌리를 추적하라”고 권하고 있다. 영적 뿌리를 추적하는 것은 부모에게서 시작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그들의 죄와 저주를 찾으라는 것이다. 추적해 보았자 별 결과가 없을 것을 염려한 이윤호는 그런 것에 대해 “하나님께 물어보라”(154쪽)고 충고한다. 어디까지 가야 끝나는 지에 관하여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 그가 말한 이 순례는 아담에게까지 도달해야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울 사도의 충고와 싸우라는 것일까? 이윤호의 주장은 복음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성경을 따른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조상들이 어떤 죄를 지었고 어떤 삶을 살았든지 걱정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형벌을 다 받으시고 그 대신 우리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받으신다는 이 복음을 지금 당신이 받아들이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더 이상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이상한 복합기도문

비판 1을 준비하면서 이윤호의 가계저주론 및 가계치유론은 이미 그 뿌리가 잘라져 나갔고 2, 3으로 진행하지 않아도 충분함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성경 구절들 때문에 바른 이해를 위해 여기까지 비판을 끌어왔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발췌한 작은 주제까지 합친다면 비판해야 할 부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더 지적하고 싶다. 그가 독자들에게 사용하라고 작성하여 본문에 혹은 부록에 수록한 기도문이다.

그가 적어 놓은 기도문을 읽어 가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그는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독자더러 누구에게 기도하라는 것인가? 기도의 대상이 불분명하다. 첫줄 첫단어는 분명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알려준다. 그러나 읽어가다 보면 금방 호통이 나온다. 하나님을 향해 호통을 치라는 건가? 아니면 사탄을 향해 기도를 하라는 건가?

 

사탄을 향한 호통만 가득 적어놓은 문장 앞에 그는 이렇게 권한다: “이렇게 기도해 보라.” 내용을 보면 물론 도와달라는 그런 식의 기도는 아니다. 없어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것에 기도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마귀축출문이 더 좋은 이름이 아닐까?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마귀를 축출하는 명령어들을 마구 섞음으로 기도의 대상에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는 것일까? 이천여 년 동안 그 기도를 교회는 애용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해 왔다. 승리하신 주님의 십자가가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이윤호의 주장은 교회의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각 복음서의 끝 부분을 읽어 보라. 승리하신 예수님을 보여주며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주셨을 뿐이다. 우리는 그 복음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복음에는 덧붙일 것이 없다.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의 삶을 넘본다 하더라도 승리는 우리 주님의 것이다.

그 주님을 의지하며 사탄과 그 세력을 못 본 듯이 무시하면 잘못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사람들의 저주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가? 의를 행함으로 욕을 먹고 고난을 당하면 복되다고 하신 주님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