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교회

  • 9월 14, 2020

예배란 무엇인가?

           

 

이인규

 

                             

 

예전에 올렸던 글들을 정리하고 요약하여 다시 올립니다 

                                            

 

1) 예배

2) 미사

3) 교회가 필요없는가?

                                                                    

 

1) 예배

                                                                       

예배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worship)라고 합니다.

그 정확한 개념은 “존경을 나타내다” 혹은 “최상의 가치를 돌리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존경을 나타내는 경건과 의식을 뜻하며,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근에 코로나로 인하여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교회 탄압이 아니라, 코로나 확산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취지에서 온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수가라는 곳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다음과 같은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의 장소를 그리심산에서 드려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으로 알았으므로,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누가 옳은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를 얼핏 보면, 여인과 예수님이 서로 동문서답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예배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하나님이 축복하신 그리심 산이 옳은가(신11:29) 혹은 선택한 장소, 예루살렘이 옳은가(신12:5)에 대해서 여인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소에 대해서 전혀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예배를 드리는 방법, 즉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말은 <in spirit and in truth> 라고 영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예배의 방법이 중요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예배의 광역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참예배의 실상이 오기 전까지, 우리에게 그림자적인 예표로서 예배의 형식과 패턴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여 구약의 장막 제사와 성전 제사는 우리가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를 직접적으로 말하여 주지는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그리스를 만났을 때에 그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았더라면, 이젠 신령과 진정의 참 예배를 드릴 때가 되었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여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성전이라는 건물에서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곧 예배의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에만 예배를 드리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가치를 돌리는 크리스천의 삶 자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몸이 곧 성전이기에, 우리의 예배도 곧 우리의 전인적인 몸의 삶 전체가 예배의 장(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롬 12:1-5에서 언급되는 “영적(靈的) 예배”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경건적이며 의식적(儀式的)인 것을 포함하는 행위가 예배일까? 언어적으로 살펴보면 “영적”이란 말은 헬라어 “로기코스”라는 말인데 “합리적인, 논리적인, 이성적인”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영어로는 ‘Reasonable’이란 말로 사용됩니다. 롬12:1의 본문에서 “예배”란 헬라어로 “라트레이아”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조금 의미를 달리 해서 “봉사”(to serve)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킹제임스영어성경은 직역하여 reasonable service라고 번역하였고, NIV 영어성경은 의역하여 spiritual act of worship 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어원적으로도 예배란 “이성적 봉사”를 가르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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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헬라어적인 “영적 예배”란 성도들의 합리적인 봉사 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 인격을 다한 희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12:1)고 권면 합니다.

                                                                                          

 

혹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예배라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식(儀式)적인 예배의 필요가 없다는 소위 예배무용론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가 드리는 교회에서의 주일 예배가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초대교회부터 성도들은 정해진 날(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려왔으며, 공식예배란 중요한 것으로서 기독교인은 함께 모여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만 합니다. 단지 예배란 개념은 주일에 교회에서 드리는 개념에서 더욱 확장 내지는 연장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배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예배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고 꾸짖었으며, 사무엘 선지자는 성경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로 꾸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그 제사의 형식과 외면적인 형태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적인 자세와 마음을 보시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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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시51:17)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고 장소적이며 외면적인 의식으로만 치루어진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자를 찾지 아니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5:1)

                                                                                      

 

2) 미사

                                                                                         

 

우리가 주일에 드리는 “예배”(worship)를 카톨릭에서는 “미사”(mass)라고 합니다.

왜 그 명칭이 다를까요? 그리고 과연 명칭만이 다를 뿐인가요?

이 차이점을 공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카톨릭에서 “미사”라는 교회 용어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그 본래적인 의미는 “제사”를 뜻합니다. 즉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카톨릭의 미사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카톨릭의 미사와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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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카톨릭의 미사는 신부가 제사장이 되는 제사적인 의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를 재현합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에서는 만인제사장을 주장하며 예배란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가치로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의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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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카톨릭의 미사는 매주 성찬식을 갖는데, 카톨릭에서는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즉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상징설, 기념설 혹은 영적임재설을 주장하므로서, 떡과 포도주를 실제적인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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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카톨릭에서는 성찬식이라는 의식을 통하여 속죄를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성찬식은 은혜의 수단이기는 하지만, 오직 믿음으로서만 속죄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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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반으로 갈라졌습니다(마27:51, 막15:38, 눅23:45). 구약에서는 오직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누구든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 앞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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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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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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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제사는 이미 2000년 전에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이며, 예수님은 “다 이루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제사를 하나님은 온전히 받으셨기 때문에, 그 효과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즉 카톨릭의 주장과 같이,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어진다면, 또한 그 제사가 예수님 십자가의 반복된 희생제사의 재현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이 되어지며 또한 매우 중대한 잘못이 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희생제사는 단번에 드려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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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미사가 제사라고 주장하는 카톨릭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정의: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를 새롭게 하고 죽음에서 영원한 삶으로의 빠스카 신비의 재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그분의 몸과 피를 우리 인간에게 주신 최후만찬의 기념으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 자신을 제물로 하느님께 바치는 신약성서의 성찬을 재현하는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며 그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성찬의 잔치를 베푸는 미사는 교회 공동체가 바치는 흠숭의 극치이며,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찬미와 제사, 속죄, 은혜를 구하는 제사이기에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의 중심이며 원동력이 된다. 미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흠숭을 드리고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용서를 받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필요한 은혜를 받게 된다. 결국 미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이룩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오늘에 현존하게 하며 기념하기 위한 거룩한 제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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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어원과 역사. (1) 어원: 미사라는 용어는 라틴어 ‘Missa’를 한국어로 그 발음을 그대로 표기한 것으로 ‘mittere'(보내다, 파견하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원래 로마제국 시대에 법정에서 재판이 끝났다는 것을 선언할 때나, 또는 황제나 고관대작들을 알현할 때 알현이 ‘끝났음’을 알리는 ‘Ite missa est’라는 말에 근거한다. 이 말을 받아들여 교회는 거룩한 집회가 끝났음을 알리는 말로 사용하였고 후에는 신자들의 거룩한 집회 자체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초대교회에서는 미사를 ‘빵의 나눔’, 2-3세기에는 ‘감사기도’, ‘감사’, 4세기에는 ‘제사, 봉헌, 성무, 집회’ 등으로 불렀으며, 5세기부터 서방 라틴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를 재현하며 최후 만찬의 양식으로 그리스도 친히 당신 교회 안에 물려 준 가톨릭 교회의 유일한 만찬 제사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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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미사의 특성. 1. 제사: 미사는 십자가의 제사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몸”,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 “계약의 피” 등 빵과 포도주 잔을 주면서 하신 최후 만찬 때의 말씀의 의미와 배경은 단순한 일치나 기념의 식사가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의 제사를 의식화한 것이다. 따라서 미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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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는 성찬식에 대해서 “미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카톨릭의 제사를 “미사”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서방 라틴 교회부터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빵 나눔”, 2-3세기에는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미사”라는 말은 5세기부터 정착되기 시작하였는데, “폐회” 혹은 “집회의 해체”를 의미하는 라틴어 “미시오”(missio)에서 파생된 말로써 “파견” 또는 “떠나보냄”이라는 뜻이었는데, 이 단어가 정착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이 미사라는 용어는 미사 중에 받은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되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신비를 증거하는 자로 파견되어 간다는 의미가 부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어적인 어원을 말하는 것뿐이며, 실제적인 의미는 곧 “제사”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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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트공의회: 트렌트 회의는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미사에서 참되고 적절한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했다(Canons of Trent, Session XXII, Canon I). 트렌트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미사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참된, 적절한 속죄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고백한다”고 했다(제6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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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바티칸 회의도 동일하게 선언하기를, 미사는 “십자가의 제사가 계속되는 제사”이며 “미사의 제사에서 우리 주님은 제물로 죽임을 당하신다”고 했다(Eucharisticum Mysterium, Intro- duction C, Section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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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카톨릭은 아직도 제사라고 할까요?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들이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의 신부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교인들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만인제사장을 부정하는 비성경적인 제도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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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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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회가 필요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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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에서는 교회라는 장소가 없었으며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지금도 교회라는 장소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카할”로서 “회중의 모임”을 뜻하며,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에크(…로부터)와 클레오(부르다)라는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 “어느 장소로부터 불러내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교회는 “함께 불러내어 만나는 회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광야로 불러내셨기 때문에 “광야 교회”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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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행 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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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회는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한 개인과 구성원으로서의 유기체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봉사를 위한 영적은사가 있었고 조직을 위한 직분이 있었습니다. 또한 장소도 필요합니다.

성령이 임하였던 초대교회의 오순절에 그들은 같은 장소에 보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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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행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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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장소가 필요없으므로, 혼자서 집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무교회주의는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서로 함께 모이므로 교류가 없으면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니며, 양육을 받지 못하고 개인의 추측이 기준이 된다면 이단으로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회의 기능은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사도성의 4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외형적인 건물만을 중요시하는 유형적인 교회 중심의 체제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항상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극단적인 견해를 지양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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