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과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
이인규
최근 들어 소위 영성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신사도운동·빈야드운동 등의 신비주의적인 집회를 하는 교회들이 많이 늘고 있다. 이러한 성향의 집회들에 대해 걱정과 우려를 말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것도 사실이다.
성경에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에 “영성”이라는 용어는 수도사들의 육체를 가학하는 금욕주의나 고행을 뜻하는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있었고, 복음주의자들은 “영성”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같은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혹간 “영성”이라는 용어를 육체와 분리시켜서 내면적인 영의 훈련과 잠재력을 개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원론적인 잘못된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서는 일부 신비주의자들에 의해서, 은사남용주의를 뜻하기도 하고, 매우 유치한 표적과 기적을 뜻하는 용어로 전락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기적과 표적을 추구하는 신앙은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적과 표적을 추구하는 신앙은 구원을 받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즉 기적이 일어나면 모두 성령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견해는 옳지 못하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물론 성경에는 놀라운 기적과 표적이 있었으며 그러한 일에는 항상 하나님의 크신 의도와 목적이 있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적과 표적만을 추구하는 신앙적인 성향은 신비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것을 신앙의 목표로서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비난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정통교회에서 진리를 찾지 못하여 방황을 하다가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에 다니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는 이단들의 집회는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 그래서 기적과 표적을 위주로 행하는 집회는 최근에 많이 늘어나고 있으며, 많은 교인들이 몰려 든다.
특히 아주 저급하고 유치한 기적과 표적을 단지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모이는 예배나 집회는 불건전하고 잘못된 집회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굳건한 반석 위에 서지 못한, 말씀이 결여된 신앙은 그러한 표적과 기적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에 방황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과연 “말씀에 근거를 둔 신앙”과 “기적과 표적에 근거를 둔 신앙”은 어떻게 다른가? 말씀에 근거를 둔 굳건한 믿음은 분명히 구원을 받게 되지만, 기적과 표적에 근거를 둔 신앙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혹은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 날”이라는 심판의 날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하던 많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즉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기적을 행하여도 정작 예수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표적과 기적은 언제나 주님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가장 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이셨던 예수님과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막 8:12).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눅 11:29).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 1:2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물론 지금도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므로 오해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는 거짓선지자들의 기적과 표적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진다는 것을 잘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적과 표적에 의한 신앙은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며 그 분별은 신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신앙형태 역시 주님은 비판을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주의하여야 한다.
확실한 것을 택할 것인가 위험하고 불확실한 것을 택할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이 되어질 것이다. 성경은 자주 거짓선지자와 거짓 사도, 거짓 선생과 거짓 그리스도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으며, 그들이 기적과 이사를 보이며 미혹한다고 말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직접 전하던 구약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과 기사를 보여줬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 13:1~3).
과거뿐 아니라 궁극적인 장래에도 거짓 이적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적으로도 짐승과 귀신의 영이 거짓 이적을 행함으로 미혹함을 여러번을 반복하여 경고하고 있다.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계 13:12~14).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계 16:13~14).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계 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