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행하여지는 이상한 종류의 기도를 보면서
이인규
물론 일부 이상한 교회나 단체들의 주장이지만, 적지 않은 곳에서 행하여지는 이상한 종류의 기도를 보면서, 과연 이들이 성경적이며 상식적인 기도를 하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든다.
이들이 주장하는 기도를 보면, 대적기도, 선포기도, 땅밟기기도, 관상기도, 중보기도, 예언기도, 동일시기도, 호흡기도등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부르짖는 기도”가 나타났고, “주여 천번 기도”라는 것이 등장하더니만, 얼마 전에는 “보혈기도”와 “기름부음 기도”라는 것도 등장하였는데, 성수를 뿌리고, 소금을 뿌리는 행위와 실제로 기름을 뿌리는 행위, 십자가를 땅에 묻는 행위까지 등장하였다. 목사의 머리 뒤에 오로라와 같은 후광이 나타나고 목사의 입에서 불이 나오며 칼이 날아왔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어떤 목사는 머리기도, 가슴기도, 배기도가 각각 다르다고 주장을 한다
먼저 기도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를 하는지 기독교 사전을 살펴보자.
“생활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하여 신자들이 취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한 형태를 말한다…. 이 기도는 신자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며, 그가 하나님께 대해서 믿는 바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내고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향상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아가페성경사전)
“성서는 기도로 가득차 있는데서, 그리스도교는 기도의 종교로도 말해진다. 성서에 있어서의 기도는 하나님과 그를 믿는 신자와의 교제(사귐), 대화를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은 신자(자녀)가 기도에 의해,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피조자로서의 스스로를 알도록 정해주셨다. 이 교제는, 본래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어서, 기도는 다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해 성립되고, 인간측에서는 무엇보다도, 환란(답답함) 중에서의 부르짖음으로써 드려진다. 이 부르짖음(호소)을 기조로 하여, 통회, 간구, 변명, 감사, 찬송이 내용으로 된다.” (디럭스바이블 성경사전)
“Prayer 하나님과 교제(교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다. 그렇지만 기도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고,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관계를 맺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기도를 자동으로 들으시는 것은 아니다.” (IVP 성경사전)
다시 말하면 기도란 신자(信者)가 하나님께 드리는 대화이고, 교제가 된다. 그리고 모든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는 것은 기도도 아니며, 하나님의 통치적인 주권을 자신이 선포하는 배도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신사도운동을 하는 어느 목사는 자신이 선포기도를 하여 광우병이 없어졌고, 자살의 영을 대적하였더니 자살이 없어졌으며, 여름에 폭설이 내려 산불이 꺼졌다고 주장한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병치유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어느 장로는 자신이 선포기도를 하였더니 그 날 집회에서 모기에 물린 사람이 없었다는 주장까지 한 적이 있었으며, 회개 기도를 하였더니 집에 있었던 벌레가 없어졌다는 목사도 있었다.
최근에 기독교의 기본적이며 건전한 신앙의 요소들이 파괴되고 변질되고 있으며, 기독교가 무속화, 미신화되고 있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곳을 보면 소위 영성훈련, 내적치유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회, 기도원 그리고 선교단체에서 일부 목사들이 이러한 기도를 아주 효험이 있는 기도라고 가르치며 선동하고 있다. 특히 신비주의와 신사도운동의 성향을 갖고 있는 단체나 교회의 목사들이 이러한 행위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질병과 사고와 불행을 비롯하여 심지어 가난조차도 모두 귀신과 악한 영 때문이라고 가르치면서 이러한 이상한 기도를 통하여 해결될 수 있다고 하면서 거액의 헌금을 요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여 성도들은 이러한 기도를 행하며 가르치는 단체나 교회가 있다면 그곳을 단호하게 거절하여야 한다. 성도들이 외면하면 이런 곳은 저절로 없어지게 될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도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적기도나 선포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여야 하며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하여도 그 자체를 비판할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에게 대적하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유일한 무기에 의존하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마귀를 묶거나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적기도나 선포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며 우리의 능력으로 대적을 하고 선포를 할 수 있는 명령문을 공포하는 내용이 아니다.
또한 가난의 영, 음란의 영, 불순종의 영, 사고의 영, 자살의 영, 도박의 영, 질병의 영… 모든 영의 이름까지 만들어서 그 영을 쫓아내야만 저주에서 풀린다고 가르친다. 종교의 영이라는 이름으로 정통신학을 비난하는 그들은 과연 어떤 영을 갖고 있는 것인가?
귀신축사는 명백하게 귀신이 들린 사람의 경우에만 필요한 것이며, 모든 질병과 모든범죄와 악, 가난과 사고나 불행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성령이 내주하는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귀신축사가 해당될 수 없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영적전쟁이란 우리 성도들을 미혹하는 마귀와 귀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대적하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결국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을 뜻한다. 어떤 선교단체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대신하여 마귀와 싸우고 공격하여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을 영적전쟁으로 착각하고 있어서 ‘신들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일 그 악한 영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 영 때문에 그러한 일들이 발생한다면, 모든 죄는 그 당사자의 타락과 불순종때문이 아니라, 그 영 때문이라는 우스운 결과가 되고만다.
또한 가난의 영을 쫓아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부자가 되어야만 하고, 질병의 영을 쫓아내면 모든 질병에서 고침을 받아야 하며, 사고나 불행을 당하지 않아야만 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고난과 고초를 당하였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들은 모두 악한 영에 사로잡혔단 말인가?
이러한 이상한 영들을 만들어서, 이러한 영들을 대적하고 선포하여 축사함으로서 이러한 문제점들이 모두 해결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극단적인 기복신앙, 소위 번영신학과도 연결되어 있다. 반대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행복, 건강, 축복을 포함하여 소위 ‘부의 이동’이라고 부르는 축복까지를 모두 하나님의 역사로 간주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대적하고 선포기도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선포하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성경은 이러한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를 찾을 수 없으며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라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주여 천번 기도”라는 것은 “주여”라는 외치는 소리를 천번 해야한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천번 암송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기도는 마치 “주여”라는 이름을 부적이나 주술적인 효력을 갖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은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모두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 대상이 바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던 자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말씀하셨다.(마7:21-23)
중보기도라는 것은 성경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남을 위해 대신 하여주는 기도를 말한다. 이것을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신사도운동에서 주장하는 중보기도는 중보적예언기도라는 의미와 함께 오늘날도 사도나 선지자가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이며, 중보기도를 특별한 사람이 받는 은사라고 주장한다.
또 신사도운동 단체는 “동일시 기도”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지역에서 다른 사람이 대신 회개와 기도를 드리면 동일시하여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유명한 몇몇 선교단체에서는 그 지역으로 직접 가서 단기선교라는 명목으로 대적기도와 선포기도, 그리고 지역귀신을 쫓아내는 영적도해의 땅밟기기도를 하였다.
심지어 십자가를 땅에 묻어야 땅의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아파트에서는 화분에 십자가를 묻으라고 주장까지 하는 것을 필자는 직접 들었다.
또한 땅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성수나 소금을 뿌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일본에서는 유명한 선교단체에 관계되는 자가 기름을 직접 뿌려서 문화재를 훼손하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린 적도 있었다.
소위 “혼연”(Soul-tie)라고 하여, 나쁜 영혼과 묶이지 않도록 인형이나 악세서리, 그림, 그리고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이나 짐승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보혈의 기도라는 것도 그러한 종류이다. 두손을 마치 물을 뜬 것처럼 모아서 그 손안에 예수님의 피가 있다고 생각하고 마시는 모습을 하며 예수님의 피를 마시며 기도를 하면 응답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주술적인 효과를 갖는 어떤 영매의 물질로 생각하는 것 같다. 예수님의 피는 이미 2000년 전에 인류의 죄를 위하여 단번에 바쳐진 영원한 제사이다.
십자가에서 희생제사로 바쳐진 예수님의 피는 그 피 자체가 어떤 주술적인 효과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죽으심을 말한다. 또한 그 피는 단번에 바쳐진 한번의 제사였으며 반복되는 제사가 아니며 영원한 효과를 가진다.
우리 몸 안에 사단이 세운 견고한 진이 있으며 쓴뿌리가 있다는 주장도 그러한 단체나 목사들에게 나온 것이다. 예수를 믿어도 없어지지 않는 견고한 진이 어떤 양육프로그램이나 훈련을 통하여서만이 없어질 수 있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언급되는 “견고한 진”(고후10:4)은 실제로 그러한 진이 몸 안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견고한 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히 대적할 수 있다는 내용일 뿐이다. 또한 성경에서 “쓴 뿌리”(히12:15)는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범죄와 타락, 즉 우상숭배와 같은 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소위 내적치유와 영성훈련을 한다는 곳에서는 “견고한 진”을 우리 몸에 실제로 있는 사단의 본부로 간주하고, 쓴 뿌리는 나의 경험에서 발생한 트라우마로 간주한다. 어떤 단체에서는 심지어 이러한 주장을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우면 없어진다는 웃지 못할 주장까지 가르쳤다.
특히 영과 혼을 분리시킬 수 있어서 영을 어떤 훈련이나 교육을 통하여 극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단적인 이원론이다. 육체에는 죄가 거하고 사단이 거하며, 영은 성령이 거하고 죄가 없다는 주장도 이단적인 주장이다. 심지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곳도 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살아서 분리되지 않으며 육체와 영혼이 연합되어 한 몸을 이룬다. 사람은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이며, 오직 죽었을 때에만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진다. 야고보서는 “영혼이 없는 육체는 죽은 것”(약3:26)이라고 말한다.
어떤 영성훈련단체는 “영서”라는 것을 주장하는데 이상한 낙서를 써놓고 영이 글씨를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이 자기의 손으로 이상한 글을 쓰고 왜 그것을 영이 썼다고 주장하는가?
사람들은 “영성”이라는 단어 자체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마치 신비한 초능력을 할 수 있는 존재나 난해한 현상 자체를 영성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관상기도나 호흡기도는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상에 근거를 둔 잘못된 기도이다. 자신이 타종교의 참선과 같은 것에 몰입을 함으로서 어떤 경지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 곧 관상기도이며, 촛불을 수백개를 켜서 시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호흡기도에 대해서 어떤 목사는 들이 마시는 들숨에 성령이 들어오고 내 뱉는 날숨에 죄가 빠져나가며, 침과 가래, 대변과 하품을 통하여 악한 영이 빠져나간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어떤 목사는 기도를 할 때에 큰소리로 부르짖어야만 응답을 받을 수 있고, 큰소리로 꾸짖어야만 귀신이 쫓겨나간다고 가르친다. 이런 교육을 하는 교회에서는 기도시간에 성도들끼리 부르짖고 꾸짖는 큰 소리로 교회가 들썩 거린다. 도대체 이것이 성경적인 기도이며, 정상적인 기도인가? 더욱 이상한 내용은 큰 소리로 부르짖어야만 하며, 반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 중에 부르짖는 기도에 대한 부분적인 구절만을 인용하는 자체가 잘못된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성경에는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내용도 있고(마6:6), 묵상기도(시1:2, 도 있으며, 삼상1:13에서 한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입술만 움직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성경구절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그대로 적용을 하지 않는가? 성경에 울면서 기도한 것이 기록되어 있으니 10:1, 느1:4) 우리는 모두 울면서 기도를 하여야만 하는가? 베드로가 지붕 위에서 기도하였으니(행10:9) 우리도 지붕 위에 올라가 기도를 하여야 하는가?
교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한 처소라는 개념이 이제 사라지고 있다. 교회는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귀신과 마귀를 대적하여 저주를 함으로서 물질적인 복을 받고 건강을 찾으며 불행을 방지하는 그러한 곳이 아니다.
첫째 기도는 신자가 직접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둘째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는 것이지 우리가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시지는 않는다.
셋째 중보자는 어느 기도원이나 교회, 단체의 목사가 아니며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교통한다.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를 해 줄 수는 있지만, 중보기도는 도움이 되는 것이지만 더욱 효과가 큰 최선책이 되어지지 않는다. 특히 중보기도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뿐이다.
넷째 기도는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요구하는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댓가로 헌금이나 예물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시 51:17)
다섯 번째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귀신이나 마귀가 들어올 수 없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일 4: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 5:1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7)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살후 3:3)
조용한 시간에 조용한 장소를 찾아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자. 교회도 좋고, 집이어도 좋으며, 직장에서, 학교에서 기도를 드릴 수도 있다. 버스나 지하철이면 안될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은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라고 말한다.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으로 간구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무엇이 부족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