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복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이인규
자신이 갖고 있는 견해와 주장에 대하여 의사를 전달할 때에 상대방이 오해를 하거나 알아듣지를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많은 분들이 그런 경험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인터넷 상으로 표현할 때에는 더욱 그러한 경우가 많다.
물론 필자가 구체적인 표현을 하지 못한 경우도 있겠고, 상대방이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상대방이 고의로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이단성에 대한 문제일 경우에는 고의적으로 상대방의 견해에 대해서 실제와 다른 사실로 매도를 하거나 조작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가 있다.
춘천 한마음교회의 김성로목사는 다른 교회와 달리 부활을 특별히 강조한다. 물론 부활을 강조한다고 하여 문제가 있다거나 이단이라고 말할 어떤 근거도 없다고 본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김성로목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불완전한 속죄사역이었다고 말한 것처럼 조작을 하거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며 조작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맹목적이며 감정적인 비난을 끝까지 옳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이단성을 만드는 사람들로서 양심에 화인을 받은 사람들로 보인다.
김성로목사는 십자가 죽음의 대속적인 의미를 축소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불완전한 사역이라고 말한 적도 없으며, 그러한 주장을 했다면 오히려 필자가 더 비판을 하였을 것이다. 김성로목사는 십자가 죽음의 의미에만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부활까지를 믿는 신앙을 갖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만 믿는 신앙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부활까지를 믿는 신앙을 갖자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부활절 전후에만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 죽음에 대한 설교가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에 모두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는 돌아가신 예수가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라는 사실을 누구든지 알고 있을 것이다.
적절하지 못하지만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공부를 잘 하는 고등학생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의 목적은 서울대학에 입학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인 안목으로 볼 때에는 그 학생은 서울대학에 입학하는 것과 동시에 서울대학을 졸업하여 좋은 직장을 갖는 것이 그가 공부를 하는 목적이며 성취가 될 것이다. 그가 비록 서울대학을 입학하였지만, 그가 만약에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면 그는 그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 것이 되고만다. 그 학생이 장차 서울대학의 졸업과 취업을 강조했다고 하여, 그가 입학을 부정하거나 입학의 의미를 축소한 것이 되는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던 예수가 만약에 부활하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속죄와 중생의 소망과 우리의 부활과 영생을 비롯하여 심지어 기독교 자체가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박윤선박사는 개혁주의 교리학 279-280쪽에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살지 못하셨다고 말한다면 죄악의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가 정복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승자가 그리스도가 아니고 사탄이라는 말이 성립된다.”라고 하였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으셨다는 부활신앙이 아니었다면 기독교회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 캘빈은 기독교 강요 2권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심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벧전 1:3).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죽음을 이긴 승리자로 등장한 것처럼, 죽음을 이긴 우리 신앙의 승리 역시 그의 부활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하였다.
캘빈은 또한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 말은 마치 그가 “죽으심으로 죄는 제거됐고 그의 부활로서 의는 다시 살아나 회복되었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만약 죽음에 굴복했다면, 그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겠는가? 또 만약 그가 이 싸움에서 졌다면, 어떻게 그가 우리를 위하여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였다.(기독교강요 2권 16장 13)
루이스벌콥은 조직신학 하권 74쪽에서 “오히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이 구성요소로서 구속사역의 본질, 따라서 복음사역의 본질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가장 큰 기초석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역은 만일 그것이 전적으로 유효적이었다면, 죽음이 아닌 생명에서 종결되어야만 하였다. 더 나아가 부활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성부의 인치심이었으며 그것은 수납(acceptance)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이었다.”라고 말하였다.
부활의 중요성과 복음의 성취에 대해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은 캘빈과 루이스벌콥과 박윤선박사를 비롯한 조직신학자들도 이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보아도, 부활을 강조하였다고 하여 십자가 죽음을 부정한 것이 된다는 주장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죽지 않고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가?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고전15:17), 거듭남의 소망이 없을 것이고(벧전1:3-4), 의롭다함도 없을 것이며(롬4:25) 우리의 부활도 없을 것이다(고전15:21-22, 롬8:11)
이것을 그들의 주장과 동일한 방법으로 반대로 표현하여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부활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며, 부활 자체를 부정하고, 십자가 죽음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하자. 더 알기 쉽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에 부활하지 못하였다고 가정하자…. 물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생각하기 싫은 일이 되겠지만, 기독교 자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성경도, 조직신학도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든지 알고 있다.
다시 말하여 부활은 복음의 성취이며 대속의 완성이며 구원의 과정이다. 변명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구속’과 ‘구속적’인 의미를 구별하는 주장을 하였는데, 필자는 부활은 구속의 성취도 되며, 구속적인 성취도 된다고 생각한다. 부활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과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일부 몇사람들이 김성로목사를 감정적으로 비난하기 위하여, 자신의 주장을 무조건 끝까지 옳다고 말하기 위하여, 오히려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심히 우려가 된다. 필자는 그들에게 이성을 잃지 말고 좀 정신을 좀 차리라고 말하고 싶다. 부활 복음이라는 용어를 비난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부활이 복음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하다 보니 신학적인 용어에서 몇가지 표현이 잘못되었던 점들이 몇개 발견되었다. 그러나 부활을 강조하려고 하는 그 의도와 의미를 이해한다면 오히려 도와주어야 하지 않는가? 부활을 강조한다고 하여 그것을 이단이라고 조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자체가 비극이다. 이단연구가도 아닌 사람들이 용어의 착각을 트집삼아서 이단으로 만들기 위한 무리한 매도와 조작이 눈에 뻔히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는 김성로목사는 십자가를 부정한 적도 없으며, 예수의 십자가 대속이 불완전한 제사였다고 말한 적도 없다. 또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두 번 지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으며, 삼위일체나 기독론을 부정한 적도 없고 구원론을 부정한 적도 없다.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이단연구가가 아닌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만약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이단연구가였다면 신학적인 용어를 착각한 사람들은 모두 이단이 되어야 하고, 모든 교회는 단어 하나 때문에 이단으로 조작이 되어야 하는 해괴망칙한 세상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