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의인
이인규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이 말은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과 같다.
한 사람은 분리된 자, 경건한 자를 의미하는 바리새인(페루쉼=분리된 자)이었으며, 한 사람은 부정한 죄인이나 이방인의 취급을 받던 세리였다. 오늘날 유대교의 교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수립되고 보존되었다.
바리새인은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를 했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를 하였다. 즉 바리새인은 자신의 종교적 경건함을 통하여 스스로 의인임을 감사한 것이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기도를 하였다. 그가 멀리 서서 기도를 하였다는 것은 성전의 이방인의 뜰과 같은 별도의 장소나 혹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장소에서 기도를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리는 자기의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였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인을 자처하였지만, 세리는 하나님 앞에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며 자기를 낮추었던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 멧세지는 통상적인 의인의 개념을 뒤짚는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다음과 같은 멧세지를 얻을 수 있다.
1) 종교적인 경건이 곧 칭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2) 칭의에 대한 교리적인 보편성은 장차 예수님의 심판과 다를 수도 있다.
3) 스스로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자칭하는 자가 전정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4) 진정으로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가 의인이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이며 믿음의 선배들인 루터와 캘빈과 웨슬레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다. 위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루터와 캘빈과 웨슬레의 두드러진 차이점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루터는 칭의를 강조하였고, 캘빈은 중생을 강조하였으며, 웨슬레는 성화를 강조하였다는 차이점일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오해를 할 필요가 없다. 루터가 칭의만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며, 캘빈은 중생만을 구원의 조건으로, 웨슬레는 성화만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 중에서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옳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교리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다양한 신앙적 교훈을 취할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의 기준은 어느 특정한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경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적인 문제는 바로 죄였으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
인간은 누구나 다 죄 아래에 있으므로,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now)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who are in Christ Jesus)에게는 결코 정죄함(condemnation)이 없나니.”(롬8:1)
본문에서 주의깊게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첫째, 그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점과 둘째,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 죄가 있으되 예수를 믿는 자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말은, 죄책(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진다. ‘정죄함’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카타크리마’는 유죄선언을 의미한다.
내가 10년 전에 예수를 믿었다고 하여 정죄함이 없다는 뜻도 아니며, 내가 10년 뒤에 예수를 믿을 것이기 때문에 정죄함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기 때문에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위 성경본문과 같이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나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나는 현재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그 믿음이 진정한 것인지(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지)를 하나님에게 판단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예수그리스도 안에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서신문에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의 용어의 개념을 보다 깊이 알기 위하여, 일련의 헬라어에 대해서 주목하여야 한다. 헬라어 ‘디카이오오’(의롭다하다, 바르게 하다), ‘디카이오마’(의롭다함, 심판), ‘디카이오시스’(무죄선언)라는 용어는 주로 헬라의 법정용어로 사용되어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칭의는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며, 실제로 의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하심이라는 법적 무죄선언을 통하여 의인으로 여기신다는 뜻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하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우리 죄가 사하심을 받고, 가리우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차를 운전하다가 인명피해의 사고를 내었다고 가정하자. 사고를 내어 구속된 가해자가 그 피해자 측과 다행히 합의가 되어 보상을 하고 풀려났다고 가정하자. 가해자는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보상을 통하여 무죄선언을 받고 석방되어진 것이다. 그는 보상을 함으로서 법적으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실질적인 죄가 남아 있다.
이것이 칭의의 단계이다. 즉 칭의는 법적 신분적 변화를 의미한다.
즉 칭의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향해 무죄선언하시는 사법적인 행위를 말한다.
“아담 안”에서의 정죄의 관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의 관계로 전환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나의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에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 물론 형식적인 믿음이나 거짓믿음의 경우에도 의롭다함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칭의는 구원의 종료가 아니라 구원의 시작이다. 만약 칭의가 구원의 종료라면 구원의 서정에서 칭의 이후의 과정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칭의는 우리가 실제적인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법적이며 신분적인 의인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구원에 대해서 이미 받은 구원, 현재 걷고 있는 구원, 궁극적으로 받을 구원의 세가지 시제를 말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칭의가 도중에 취소되지 않으며 칭의가 구원에서 부족한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판정과 하나님의 심판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특히 거의 모든 이단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았으며, 144,0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하나님의 구원과는 다를 것이다.
칭의의 주어는 하나님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 자신은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와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며, 그 실제적인 경우가 바로 제일 위에서 인용한 성경본문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경우가 된다. 내가 어느 교단에 있으므로, 내가 어떤 종교생활을 하므로, 내가 어떤 직분에 있으므로….등등에서 나오는 칭의는 실제적이며 내면적인 의인의 개념과 아무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하면 칭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칭의의 과정 안에 있다는 자기 스스로의 단정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다.
물론 칭의를 부족한 구원의 과정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칭의는 전적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자력으로 완전한 의인이 됨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값없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 불러 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2:5)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4:18)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4)
혹간은 자신이 스스로 단정하는 칭의를 구원의 종료로 간주하고 성화를 구원의 과정에서 배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자신을 구원하고 심판하는 것이며 소위 구원파의 구원관과 다름이 없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죄의 소욕을 따르지 말라고 도처에서 경고하며 권면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된다면, 성령의 인도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4-16)
칭의와 성화는 같은 과정이 아님과 동시에 명확하게 분리되지도 않는다. 성경은 성도들의 성화적인 과정을 부정하거나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구절이 단 한 개도 없다. 우리가 육체로 있는 한, 우리는 항상 우리의 내면 속에 죄의 법과 성령의 법, 두가지를 함께 갖고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한 투쟁의 과정이 곧 성화라는 과정이다.
우리는 성화에 대해서 “우리가 생전에 완전히 성화되지 못하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말하는 주장은 분명히 잘못이지만,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성화와 무관하다”라고 말하는 주장은 더욱 잘못이다. 즉 율법주의도 잘못이지만, 도덕폐기론은 더욱 나쁜 것이다. 우리는 두가지의 극단적으로 흐르는 주장을 주의하여야 한다. 전자는 행위구원론이라고 불리며, 후자는 도덕폐기론이라고 불리우는데, 한국교회는 모두 이단적인 주장으로 간주한다.
바울같은 거듭난 사람도 육신의 법, 죄의 법이 함께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바울과 같은 사도도 온전한 의인이 된 것은 아니며, 그 역시 믿음으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은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3)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20)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이며, 성화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함께 이루어가야 하는 인간의 책임이다. 칭의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도덕폐기론이 될 수 있고, 성화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다보면 행위구원론이 될 수 있다.
칭의는 이미 받은 과거적인 시제의 구원(Already)을 강조하게 되고, 성화는 현재 걷고 있는 구원의 시제와 장차 받을 장래 시제의 구원(Not but yet)을 강조하게 된다.
예수를 믿고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화를 부정하지 않으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그것을 열매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자칭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칭 의인이라고 말하지만, 그 열매가 그리스도인의 것이 아닌 사람들이 없지 않다.
우리들 중에서 누가 “나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 예정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여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의 구원은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
진정으로 자신에게 질문과 시험을 하여보고, 진심으로 답변을 하여보자. 내가 과연 예수를 진심으로 믿고 있는가? 우리는 교단이나 교리가 아니라, 나의 믿음으로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리가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