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표(Typology)와 풍유(Allegory)
이인규
예표란 무엇인가?
예표의 사전적 정의는 “미리 알려주는 표징”을 뜻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 용어는 구약성경의 역사에 있는 사건, 사물, 또는 인물이 미리 신약성경의 실체를 암시하여 드러나 있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예표(오트, 사 8:18, 사 20:3), (모페드, 슥 3:8)라는 단어 외에 표상(튀포스, 롬 5:14), 그림자(스키아, 8:5, 골 2:17), 모형(휘포데이그마, 히 9:23)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예표에 대한 것을 “모형”이라고도 하는데, 모형(type)은 이전에 일어난 사건을 뜻하며, 원형(antitype)은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모형과 원형, 또는 예표와 실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 구약에서 나타난 신약의 예표들은 철저하게 역사에 근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광야의 불뱀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이다.(민21:6)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라고 말씀하셨는데, 놋뱀과 예수는 모두 높이 들렸으며,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생명을 얻은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게 된다.
2) 예표는 예언적 성격을 지니며, 그것은 메시야 시대에 성취된다.
3) 모형과 원형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일치점을 가져야 하며, 모형 자체가 중요한 사건이라기 보다는, 원형의 의미가 밝혀짐으로 종속적인 가치가 드러나야 한다
4) 예표는 구속사적인 의미로서 나타나야하며(고전10:1-11). 예표는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구약의 모든 예표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의 구원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눅24:25, 44 행3:24)
풍유적인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
교회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풍유적인 해석을 즐겨왔던 것은 사실이다.
초대교회의 클레멘스는 여호수아 2:18에 대한 주석을 달면서 라합에 자기 집 창에 매달은 붉은 줄이 예수님의 피를 예표한다고 설교하였다고 한다.
더 황당한 경우는 크리소스톰의 설교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헤롯이 베들레헴에서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찾아서 모두 죽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두 살 이하는 이위일체와 단일신론을 뜻하므로 멸하여야 한다고 설교했다는 것이다.(기초성경해석학, 바클레이 미켈슨, 국제신학연구소, 311쪽)
어거스틴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30-37)에 대해서 다친 사람은 아담을 싱징하고, 도둑은 마귀를 뜻하며,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사마리아인은 예수를 뜻한다고 해석하였다. 심지어 여관은 교회를, 여관 주인은 사도바울을 뜻한다고 해석하였다.(비유해석학, 크레그 블롬버그, 생명의말씀사, 39쪽)
박옥수 구원파에서도 이러한 해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 주었다는 구절을 기름은 성령이고 포도주는 기쁨이라고 해석을 한다. 더욱이 기름은 떠나지 않지만, 기쁨은 쉽게 떠나간다고 비유풀이를 한다.(거듭남의 비밀, 기쁜소식사, 박옥수, 255쪽)
이와 같은 초대교회 교부들의 성경해석에 대해서 우리는 풍유적(알레고리칼)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해석도 결코 쉽게 공감할 수 없으며,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내용으로서 풍유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고전10:1-4을 인용하면서 바울의 풍유적인 해석의 선례를 말하였는데, 이러한 바울의 해석이 풍유적인 해석인가 혹은 모형론적인 해석인가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가 있어왔다.
고전 10: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장의 본문과 같이 어떻게 광야에서 구름 아래와 바다 가운데 지나가는 사건을 세례로 비유할 수 있으며, 물이 난 반석을 그리스도로 비유할 수 있는가?
심지어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즈마엘과 이삭의 어머니인 하갈과 사라를 율법과 복음으로 비유한 것은 아무도 납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갈 4: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그렇다면 초대교회 교부들의 해석과 사도바울의 해석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일까? 그 두가지 해석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는데, 사도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쓴 저자라는 것이며, 즉 그 사도성에 기준이 있다. 다시 말하여 우리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 즉 성경의 저자가 직접 구약을 인용하여 그것이 예표라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만 인정하여야 한다.
이단들이 사용하는 성경해석에는 이러한 임의적인 모형론이 많다. 예를 들면 구원파 이요한 계열은 여자가 가루서말에 놓은 누룩을 삼위일체라고 해석한다. 여자가 가루서말에 넣은 누룩이 곧 삼위일체로서 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카톨릭의 어느 추기경은 오병이어의 사건이 도시락을 지참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도시락을 지참한 것이 과연 놀라운 기적이 되어서 성경에 기록되었을까?
최근에 성행하는 이단들 중에서 비유풀이를 가르치는 이단들은 이러한 해석이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언급할 필요도 없고, 그럴만한 가치도 없다.
특히 성경의 인물의 이름을 실제 자신들 교회의 특정한 사람의 이름으로 비유해석하는 이단들은 비판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며, 성경의 “동방”을 해뜨는 곳 한국이라고 해석하여, 이사야서에서 고레스를 뜻하는 “동방의 의인”을 교주로 해석하는 이단들이 우리나라에 수없이 많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코레쉬”라는 히브리어는 태양을 뜻하며 페르샤는 동방이라고 불리워졌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객관적인 일치점이 전혀 없으며, 또 아무도 동의하지도 않고, 공감하지도 않은 해석을 하는 이단들의 예표적인 주장과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주의하여야 하며, 그것을 영적인 해석이라고 칭하며 감추어진 진리라고 말하는 이단들을 각별히 조심하여야 한다. 물론 성경은 비유와 상징도 있고, 문자적인 서술도 있다. 비유와 상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문자적인 기록을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은 더욱 위험한 해석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예표와 성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의점을 살펴야만 한다
예표의 주의점
1) 구약의 예표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에서 예수와 사도들, 즉 성경의 기자들이 분명히 인용하는 것만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단들이 주로 사용하는 수법과 같이 사사로운 자의적인 성경해석으로 예표와 성취에 대한 정의를 단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하여 신약성경에서 모형으로 인정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 성경해석자가 마음대로 예표와 성취를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2) 본질적이며 핵심적인 내용과 부수적이며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여야 한다.
3) 이미 성취된 것과 성취되지 않은 것을 구분하여야 하며, 성경구절을 자의적으로 상징이나 비유로 해석할 수 없다.
참고도서
비유해석학, 크레그 블롬버그, 생명의말씀사
기초성경해석학, 바클레이 미켈슨, 국제신학연구소
성경해석학, 버나드 램, 생명의말씀사
성경해석학, 권성수, 총신대학교 출판부
성경연구의 진수, 아더 피어선, 생명의말씀사
IVP 신학사전, IV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