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과 칭의의 상관관계를 바로 알자
이인규
어느 목사가 쓴 글을 읽었는데, “김성로목사가 죽음과 부활을 분리하여 이원화시키고 있다”라고 말한다. 아마 그 분은 김성로목사의 주장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오히려 필자는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다.
오히려 정이철목사와 그 측근들이 죽음과 부활을 분리하여 이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성로목사는 그의 책 “부활”에서 죽음과 부활을 동전양면과 같다고 말한 바 있으며, 교회의 양육교재를 보면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것을 한마음교회가 세워진 목적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로목사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멧세지의 핵심이 무엇일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십자가 죽음까지만 믿지 말고 부활까지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과 부활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연속성의 연장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십자가 죽음까지만 믿으면 부활이 저절로 따라온다는 정이철목사와 그 일부 측근들의 주장이야말로 죽음과 부활을 분리시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정이철 목사와 일부 측근들은 십자가 죽음만 믿으면 부활은 부수적으로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부활을 복음에서 배제시키기 위하여 비난을 하다가 급기야는 부활이 칭의의 근거가 된다는 주장을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신학적인 무지에서 온 것이다.
이미 부활의 중요성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많이 소개하였기 때문에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존립 자체가 없다는 주장을 한 신학자들도 수없이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조직신학자들은 모두 부활이 칭의와 중생의 근간이 되어진다고 말하며, 부활이 복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이단적인 주장이 아니라, 정통신학적인 견해이며, 성경적인 견해이다.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이라는 책을 쓴 박영돈교수(고신대 교의학)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바울은 칭의를 십자가 뿐 아니라 부활에 근거해서 이해하였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린 속죄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어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칭의의 확증이다. 그래서 바울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고전15:17). 부활은 우리의 칭의뿐 아니라 예수의 칭의에 대한 확증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가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셨다(롬1:4; 딤전3:16).
십자가는 부활을 전제하며 부활은 십자가의 완성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로 결합되어 칭의의 온전한 법적 근거를 제공한다. 따라서 칭의의 근거는 우리 안에 전혀 없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한 의로움에 있다.(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기초한 칭의, 박영돈교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인 루이스벌콥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3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모든 요구에 응하셨다는데 대한 하나님의 선포이었다(빌2:9)
(2)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칭의와 중생과 최종부활을 상징하신 것이다(롬6:4-5, 9, 고전6:14, 15:20-22)
(3)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칭의와 중생과 부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롬4:25, 5:10, 엡1:20, 빌3:10, 벧전1:3) (기독교교리요약, 루이스벌콥, 소망사, 126쪽)
(3)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시 그들의 칭의와 중생 그리고 마지막 부활과 도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롬4:25, 5:10, 엡1:20, 빌3:10, 벧전1:3) (벌콥조직신학 하권, 71쪽)
권연경 교수가 목회와 신학에 “부활은 복음이다”에 기고한 글 일부이다.
우리가 부활의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된다면, 부활이 없는 칭의란 존재할 수 없다. 칭의를 죄 용서와 동일시하고, 이를 전적으로 십자가의 효과로 간주하는 통상적인 경향과는 달리, 바울은 칭의가 십자가뿐 아니라 부활 또한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예수 우리 주”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죽음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물론 이는 십자가 죽음이 죄 용서를 위해, 그리고 부활이 칭의를 위해 필요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죄 용서와 칭의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처럼, 십자가와 부활도 그러하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칭의에는 십자가뿐 아니라 부활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개혁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꼽히는 박윤선목사는 부활이 곧 예수가 메시야와 중보자가 되는 증표가 되며, 사죄와 칭의 의 완성과 보장이 되며, 우리 부활의 보증이며, 기독교의 기초가 된다고 말한다
– 바빙크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면 그의 부활은 그가 메시야이신 증표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표요, 그의 중보자 사역의 완성이요, 그의 높아지심의 방법이요, 우리의 받을 사죄와 칭의의 보장이요, 우리에게 주실 영적 축복과 은사의 근원이요,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요, 사도적 기독교의 기초이다.(개혁주의 교리학, 박윤선, 280쪽)
다음은 김준삼교수의 주장이다
– 셋째, 신자의 칭의, 중생, 부활의 수단으로 연결되어진다. (롬4:24-25,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것은 단순하게 문자대로 읽는다면 칭의는 부활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 우리들이 의롭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으심에 의해서 칭의가 일어나지 않고 부활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다른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의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칭의는 어디까지나 십자가의 죽으심에 있어서 획득되어진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만약 그리스도가 부활하시지 않았고 부활이란 사실이 우리들에게 제시되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믿는 근거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의롭게 되어지지 않는다.하나님은 우리들이 믿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시어, 그리고 부활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풍부하게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 부활되어졌다는 표현은 가능하겠다고 보겠다. 이 경우에 있어서 부활이란 성도의 칭의의 수단으로 연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교의신학, 기독론과 구원론, 김준삼, 도서출판 총신, 95-96쪽)
웨인그루뎀은 미국 일리노이즈의 Trinity Evangelical School의 조직신학교수로서, 그의 저서가 우리나라에 여러권 발행되었다. 웨인그루뎀도 루이스벌콥과 마찬가지로 부활이 우리의 중생과 칭의를 보장하여 주며, 우리의 부활을 보장하여 준다고 말한다.
– 부활 교리의 중요성
a.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중생을 보장해 준다: 벧전 1:3
b.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칭의를 보장한다: 롬 4:25
c.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도 완전한 부활의 육신을 받게될 것을 보장한다. 고전 6:14, 고후 4:14, 고전 15:20 (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167-170쪽)
게리 브레셔츠는 웨스턴신학대학의 신학교수이며 신학 연구 학과장이다. 또한 마크 드리스콜은 시애틀의 마스힐교회를 세운 목사로서 사도행전29장 교회개혁네트워크 대표이고 부활선교 신학협회를 설립한 목사이다.
– 성경은 종종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며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바로 그 권능의 성령을 누리는 것에 대해 말한다.그렇게 하면서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신자들에게 전달된 수많은 복과 유익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가 죄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단번에 영원히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아는 큰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성화 속에서 밖으로 표출되므로 우리는 더욱 거룩해지며 죄를 이기며 사는 법을 배워 가다가 언젠가 우리 자신이 부활할 때 모든 죄의 존재와 권능과 습관에서 해방되어 영원히 살게될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그 때문에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선언될 수 있는 칭의의 원천으로 일컬어진다.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 살아났다고 명백히 진술한다. (기독교 교리, 마크 드리스볼, 게리 브레셔스 공저, 부흥과개혁사, 400-401쪽)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 죽음만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가?
칭의는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을 말하며, 그 십자가는 죽음뿐 아니라 부활을 믿는 믿음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캘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은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몰랐던 사람들은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만을 언급할 때에는 항상 그의 부활에 속한 것을 포함하고 있음을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이와 동일한 제유법이 “부활“이란 말에도 적용되는데, 그의 죽음과는 별도로 말하게 될 때에는 언제든지, 특히 죽음에 관계된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그는 승리자의 상급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부활이요 생명“이 되기 위함이었고,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속임수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고전 15:17).(캘빈의 기독교강요 16장)
인격적이며 건전한 신학 토론은 신학적인 증거와 성경적인 증거를 제시하면서 논리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이철목사와 그 일부 측근들은 토론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며,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필자는 이단들과 수십년 간을 토론과 논쟁을 하여왔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무조건 인격적인 비난과 욕설부터 하고 있다. 심지어 기이협을 사탄 운운… 하며 합신 이대위를 모욕하는 글까지 있었다. 필자를 부활교인, 거짓이단연구가, 교활한 자, 회색인간, 이단옹호자, 이단에게 돈을 받고 지지하는 자, 이단, 교만한 평신도등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조차 힘들 지경이다. 과연 그들이 목사이며 거듭난 사람들인지 의심스럽다.
그러한 글을 접하는 순간 그들은 벌써 토론에서 패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글을 본 모든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글은 논리적인 내용을 찾을 수 없고 상대방을 모욕하고 비난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단이라는 용어를 마구 뱉은 그들에게 오히려 더욱 위험하고 심각한 내용이 계속 드러나고 있었다.
또한 토론은 신학적인 지식과 성경적인 지식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백전백패를 하고 만다. 입에서 나오는대로 자기 주장을 말하는 토론은 이미 패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무리한 변명을 늘어놓는 순간 이미 그들의 토론은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공감 자체가 없어진다.
토론은 성경적인 근거와 신학적인 근거가 중요한 것이다. 상대방에게 갖은 욕설과 비난으로 퍼붓고, 상대방을 거짓말로 조작하고 모함하여 많은 동조자를 만들려고 하는 방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이다.
캘빈은 기독교강요 16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6장 13.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다음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이다. 이것이 없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논한 모든 체계는 불완전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장사에서는 연약함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신앙은 그 완전한 힘을 얻기 위하여 이 모든 사실들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죽음을 통해 구원의 완성을 이룬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했고, 그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충족되었으며, 저주는 제거되고, 형벌은 완전히 치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심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벧전 1:3).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죽음을 이긴 승리자로 등장한 것처럼, 죽음을 이긴 우리 신앙의 승리 역시 그의 부활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다음 말이 그리스도 부활의 성격을 잘 표시해 준다.“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 말은 마치 그가 “죽으심으로 죄는 제거됐고 그의 부활로서 의는 다시 살아나 회복되었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만약 죽음에 굴복했다면, 그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겠는가? 또 만약 그가 이 싸움에서 졌다면, 어떻게 그가 우리를 위하여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요소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는 죄가 제거되고 죽음이 소멸되었으며, 그의 부활을 통해서는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되살아나 그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능력과 효력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부활의 덕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느니라“(롬 1:4)고 말하였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죽음까지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부활까지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과연 누가 진정한 복음을 말하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시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