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종말론을 부추기는 한국교회(1)
이인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2-36)
1) 잘못된 해석
일부 세대주의에서는 마태복음 24장 본문의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이 독립한 1948년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교주 안상홍은 위 마태복음 본문에 대해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라는 구절의 “이 세대”를 40년으로 계산하여 1988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였고, 초대형교회 J 목사는 한 세대를 약 50년으로 계산하여 약 2000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였다가 이단시비에 몰렸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감리교의 대형교회 K 목사는 위 본문 무화과나무를 1948년 이스라엘 독립으로 해석하고 한 세대를 100년으로 계산하여 2048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였다. K 목사는 그 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 명백하므로 확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느 목사는 한 세대가 70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한국교회가 엉터리 성경해석을 하고 있느냐는 증거가 되어진다.
이단교회인 구원파는 이러한 주장을 아주 당연시하며 가르치며, 오랫동안 임박한 종말론을 가르쳐 왔다. 어디 구원파 뿐이겠는가? 소위 유명한 부흥목사라는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목사들이 계시록의 666을 은행카드, 컴퓨터, 바코드라고 가르쳐왔는데, 과연 그들은 지금도 은행카드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으며, 바코드가 없는 물건을 구매하는지 확인하고 싶다. 지금은 예전의 주장을 슬그머니 감추고, 666을 베리칩이라고 주장하는 목사들도 있다. 또 어느 목사는 열뿔이 유럽연합이라고 주장하다가 지금 27개국이 되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필자는 이런 황당한 해석을 가르치는 일부 목사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에서 신천지의 비유풀이같은 해석이 성행하고 있다고 본다. 무화과 잎사귀가 이스라엘 독립 1948년을 비유한다는 해석과 신천지의 비유풀이와 무엇이 다른가? 이제 한국교회는 소위 영해라고 불리는 알레고리적인 엉터리 성경 비유풀이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로 비유된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24:32의 본문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상징한다는 어떤 근거나 그 타당성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마 24장의 무화과의 잎사귀에 대한 내용은 문맥으로 볼 때에 자연적으로 그 징조를 알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자연적이며 기후적인 현상으로 가지가 연하여지고 앞사귀가 나면 곧 여름이 오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과연 주후 30년경의 제자들에게 1948년의 이스라엘 독립부터 계산하여 한 세대 안에 종말이 온다는 시간을 알려 주기 위하여 그런 비유법을 사용하셨을까?
예수님이 “이 세대(this generation)가 지나기 전에”라고 말한 것은 “이스라엘 독립 후부터 한 세대”라는 뜻이 결코 아니며, 그렇게 해석할 이유와 근거가 전혀 없다. 오히려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대화를 하는 그 시간부터 “이 세대”라고 보는 것이 문법적으로 옳다. 정통신학적인 해석적 견해에 의하면, 마태복음24장은 주후 70년에 있을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포함한 “예언의 성취”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2) 무화과
세대주의에서는 마 21:19의 무화과를 예로 들면서 이스라엘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마 21:19도 자세히 살피면 이스라엘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교인 유대교를 상징하는 것이다. 동일한 비유가 기록된 마가복음을 살펴보자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막 11:13-14)
참으로 이상한 내용이다.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있다고 하여 그 나무를 저주하시니 말이다. 만일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라 한다면, 저주를 하여도 그 의미가 분명히 전달되어질 터인데, 그 때가 아니기 때문에 잎사귀만 있는 무화과를 보고 책망하시며 저주를 하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내용이 되어진다.
이 지역의 무화과나무는 일년 중 거의 열달 이상이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3. 4월에는 잎사귀만이 나오지만, 이때에는 지난해의 가지에서 자란 아직 익지 않은 푸른 열매들이 달려 있다고 한다. 이 무화과들은 6-7월 중에 익게 되며 (참고: 사28:4. 처음 익은 무화과) 봄의 새 가지에서 자라나는 두번째 열매들은 8-9월에 익는다고 한다.(참고: 삿9:11. 늦무화과) 이것은 진짜 무화과보다 먼저 나오는 것으로 아랍어로 타퀴시(taqsh)라고 부른다고 한다. 결국 예수께서는 이 무화과 나무로부터 타퀴시를 찾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식적인 의미가 아니라, 무화과로 비유된 유대교에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무화과 열매를 맺는 때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항상 열매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는 성전을 정화하셨다. 그 다음날 예수의 제자들은 어제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나무가 말라 버린 것을 발견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형식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며, 예수를 믿는 영적 이스라엘인 기독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는 형식 종교 속에서 성전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본문은 열매가 없는 유대교를 비판하고 있지만, 기독교에서도 그 열매가 강조되고 있다. 성령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성령의 열매가 없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을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약성경에도 열매라는 단어가 수없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1:8-9)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3:8-9)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이스라엘 독립부터 시작하여 재림 날짜 계산을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왜 이러한 터무니없는 해석이 한국교회에 만연하여 시한부종말론자들이 들끓게 되었는가? 한국교회들은 일년에도 몇번씩 부흥회만 열고 있으며, 교인들의 숫자적 부흥만을 위한 이상한 양육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으면서도, 성경과 정통신학은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한부종말론 책이 발행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를 비유하신 이유는 말 그대로 비유일 뿐이며, 봄에 싹이 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듯이, 무화과나무에서 잎사귀가 나는 것을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듯이 재림에 관한 징조를 보면 때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3) 이스라엘의 멸망과 무화과나무
성경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성전을 보면서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2-3)
제자들의 질문은 “언제 성전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느냐?“라는 것이었고, 추가적으로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비유하신 것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나무가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워지듯이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아주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 독립이라고 주장하던 사람은 누가복음에 대해서 답변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눅 21:29-32)
게다가 누가복음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AD 70년 로마의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당시에 로마군인들은 성전에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성전 돌 하나까지 들추어 냈다고 한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눅 21:20-21)
마태복음 24장은 다니엘 선지자의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서 과거적인 의미로서 BC 168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통치하에서 겪었던 그리스도인들의 고난 사건을 유대인들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려는 의도로 말하고 있다. 성전에 제우신 상이 세워지고 돼지피가 뿌려졌으며,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사건을 기억하게 함으로서, AD 70년경 로마의 티투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는 구절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BC 168년의 사건을 기억하였을 것이며, 그와 같은 사건이 또 한 세대 안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 24:15-16)
실제로 이 말을 기억했던 유대인들은 벨라(Pella)라고 하는 산으로 도망하여 살아났으며, 성전으로 들어간 자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성경을 비유로 해석하기 좋아하는 일부 목사들은 본문의 “산”이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며, 마지막 때에는 교회를 가야만 살 수 있다고 해석한 적도 있었다.
실제 역사적인 사실에 의하면, 다니엘서가 예언한 ‘멸망의 가증한 것’은 BC 168년에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상을 세우고 그 제단에 부정하게 취급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던 사실이 유대역사에 있었다. 비록 외경이지만 마카비(상) 1:54-64과 마카비(하) 6:1-5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 사십 오년 기슬레우월 십 오일에 안티오쿠스왕은 번제 제단 위에 가증스러운 파멸의 우상을 세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유다의 근방 여러 도시에 이교제단을 세우고 집 대문 앞에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살라 버렸다. 율법서를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지키거나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왕명에 의해서 사형을 당하였다. 그들은 여러 도시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왕명을 위반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매달 잡아 들여 모질게 학대하였다. 매달 이십 오일에는 옛 제단 위에 새로 세운 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쳤다. 자기 아이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여자들은 법령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고 그 젖먹이들도 목을 매달아 죽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그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푼 사람까지 모두 죽였다. 그러나 이에 꺾이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스라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였고, 사실 그들은 그렇게 죽어 갔다. 크고 무서운 하느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마카비 상 1:54-64)
누가복음에는 이 사실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3-24)
4) 성경이 말하는 종말
마태복음 24장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말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성경은 그 날과 때를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데, 왜 그 종말의 시간을 자꾸 말하고 싶어하는가? 이단들은 이단이니까 그런 주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에는 종말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목사들이 왜 그것을 이상하게 해석하여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고 말해야만 가장 성경적이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2)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살후2:2)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5)
5) 한국교회는 성경을 올바로 가르치자
만약 한국교회가 성경을 올바로 가르쳤다면, 비유풀이를 가르치는 신천지, 정명석집단, 신옥주와 같은 이단들은 한국교회에 발도 디딛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 목사들은 “교회성장”이라는 외식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 성경 공부나 정통신학 공부, 이단예방대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단들이 (비록 엉터리 성경공부이지만) 성경공부를 통하여 숫자를 늘리고 있지 않는가?
이단들은 성경공부를 통하여 자기들의 숫자를 늘려가고 있을 때에, 정통교회라고 불리는 교회들은 신사도운동과 은사남용주의를 영입하여 신비주의, 열광주의에 빠지거나, 내적치유와 영성운동, 가계저주론이나 신귀신론등과 같은 무속적 신앙을 도입하여 기독교를 무속적인 종교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