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성화의 관계
이인규
최근에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토론이 있는데, 이러한 토론을 함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러한 토론은 신앙인으로서 상당히 유익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간혹 자기 주장 외에는 무조건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배타적인 사람들이 있은데, 이런 사람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극단적인 주장을 피하여야만 합니다.
1) 칭의와 성화는 별개의 분리된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구원의 과정입니다. 특히 구원의 서정(소명, 믿음, 중생, 칭의, 성화등…)은 반드시 시간적인 순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를 뜻합니다. 웨슬레는 칭의를 성화의 시작이라고 보았으며, 캘빈은 칭의를 중생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2) 칭의의 주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사람이 칭의의 주어가 되면 안되며, 자기가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를 스스로 의인이라고 부르고, 그것으로 자기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파의 구원론과 같아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화가 필요없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구원파는 이미 받은 구원을 강조하며, 결국 도덕폐기론, 성화무용론을 주장합니다
3)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맞으며, 그러나 성화는 성령과 사람의 공동사역입니다.
4) 김세윤교수나 박영돈교수가 말하는 소위 칭의유보론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부정하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Already 뿐 아니라 not yet 의 관점을 함께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과거성뿐 아니라 현재성과 함께 미래적인 개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목회자의 타락과 범죄가 성행하는 이때에, 시대적인 상황으로 성화 강조론이 나타날 수 밖에 없지요. 웨슬레가 성화를 강조할 때에도 영국에서 타락과 범죄가 성행하던 때였습니다. 물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행함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행함이 의인이 조건이 되거나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않습니다. not yet 이라는 개념은 결코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5) 칭의는 법적으로 무죄석방을 뜻합니다. 즉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고 무죄를 선언하는 법적인 선언이 됩니다. 이 법적인 칭의가 구원을 받기에 부족하다거나,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주장도 곤란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칭의로 인하여 구원이 모두 종결되었다고 하여도 안됩니다. 항상 극단적인 주장을 피하여야 합니다.
6)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너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의인이 되었으며, 정죄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피구원자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하여야만 합니다. 주어와 주체의 입장이 뒤바뀌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피구원자인 사람의 입장에서 “나는 이미 의인이 되었으며 이미 구원을 받았고, 정죄받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도덕폐기론, 성화무용론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어떤 죄를 지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수없이 많은 성경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안되며, 죄에서 멀리 하라고 말합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