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믿음
이인규
1.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이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다.
율법은 의미상 아래와 같이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일반적으로 도덕적 율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지만, 재판적 율법과 의식적 율법은 폐기되거나 변역되었다고 말한다. 다만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하는 명칭은 아래와 같이 구체적으로 세가지의 개념을 분리시켜 다른 용어나 다른 의미로 분리하거나 구별하지는 않는다. 다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덕적 율법은폐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맞지만, 그런 율법을 지켜야만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1) 도덕적 율법…………….출 20:1-26절
2) 재판적 율법…………….출 21:1-14절
3) 의식적 율법…………….출 24장-31장.
2. 율법으로 의인이 되거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며 의인이 되거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즉 율법을 지키는가 안지키는가가 의의 표준이나 잣대가 될 수 없다. 첫째, 성경은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세상 누구도 모든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내가 99가지의 율법을 온전하게 지켰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실수로 한가지의 율법을 어기고 말았다면, 나는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고만다.
그레서 사도바울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고 은혜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즉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6)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의로운 행위이다. 그러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다. 다시 말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자체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
너무나도 많은 성경말씀이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의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으며, 많은 성경말씀이 행위와 은혜를 대조하여 구별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되어진다.
다시 말하여 구원에 있어서 은혜를 부정하고 행위를 요구하는견해는 기록된 말씀과 전혀 다른 복음이 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바울은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갈1:8)
적어도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인간의 행위와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다른 복음이 되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그 이유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구원을 받을 사람이 한명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은 진짜 복음과 매우 유사하므로 구별이 매우 어렵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유명한 설교자 무디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 방황하다가, 다음 성경구절을 읽고 변화되었다고 전해진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서11장1절의 말씀에 의하여 확증되어진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믿음의 결과는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할지라도(즉 아직 보이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마음 속에 확신하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너희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하신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였듯이, 인간의 눈에 아직 보이지 않고 성취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순종하는 것이 참믿음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근거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실체화하며 실증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가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구속과 죽음과 부활을 영원한 진리로 믿는 믿음 위에 굳건히 서있어야만 한다.
마틴 루터와 요한 웨슬레가 모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로마서 말씀을 통하여 회심을 하였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장(章)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온전히 믿었던 믿음의 사람들의 기록인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조상들은 그들 자신의 행위 때문에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모두 믿음의 위인들이었던 것이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히브리서의 기자는 믿음의 위인들이 너무나 많아 시간이 부족함을 이유로 일일이 설명을 생략한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히 11:32-33)
사도바울은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의 괴수였다고 말하지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소위 이신칭의에 대해 역설하였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3. 율법의 기능과 목적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무디는 율법을 “마음의 거울“이라고 했는데, 바울같은 사람도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지만 그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을 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으며…..” (롬3:10)
이 세상에는 율법의 요구충족에 달할수 있는 자가 없으므로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즉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율법이란 왜 존재하여야만 했을까? 이 답변은 신약성경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즉 율법은 의롭다함을 얻는 기능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 율법이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 줌으로써, 죄를 깨닫게 함이 그 첫째 기능인 것이다.
“죄가 율법있기 전에도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5:13)
아직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그 뜻을 우리는 잘 새겨보아야 한다. 율법의 기능이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인데, 죄가 있었기에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즉 율법이란, 죄가 있었기에 그 죄를 죄로 알리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계속 죄를 지어왔으며 세상에 죄가 만연하였으므로 “이것을 어기면 죄가 된다“ 혹은 “이것을 하면 죄가 된다“라는 것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란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한 것이라” (갈3:19) 라고 바울은 이야기한다.
율법이란 그것을 지킴으로 하나님이 의를 주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고 떨어진 자라고 혹독한 비판을 하고 있다. 아담을 통하여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고 그 죄가 넘쳐 흐르게 되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그 만연된 죄와 범법함을 보시고 율법이란 것을 주셨다.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이것은 이렇게 해야 되고 저것은 저렇게 해야만 한다….. 즉 지키지 않으면 벌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율법에 어긋남을 알고 “아! 이것은 죄이구나, 하지 말아야지….” 라고 죄를 깨닫게 하도록 하나님이 배려하신 것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그러나 목이 곧은 그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곧 하나님의 의의 표준과 잣대인 것으로 착각을 하여 율법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그 표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적인 행함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면 의인이 되고 안지키면 죄인이 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의의 표준“이 아니고 “죄의 표준“이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이거나 강도짓을 하면, 사형을 당하거나 형무소에서 징역을 살아야 하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형법인데, 사람을 죽이지 않거나 강도짓을 하지 않으면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이러한 무서운 형법이 있는 목적은 강도짓과 살인이 해서는 안될 죄라는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살인을 하거나 강도짓을 하게되면, 그 사람은 징역이나 사형같은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되므로 살인이나 강도짓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활을 하는 것이다. 법이란 결코 사람을 의인으로 만들지 못하며,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란 그 기능적으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7:6)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의 선물인 구원을 얻는다.
만일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구원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 되고말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율법은 복음의 예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리는 것이냐?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
율법으로는 누구도 의인이 되지 못하므로 구원을 얻을수 없다. 왜냐하면 원래 율법의 목적이 “살리게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죄를 미연에 강제적으로 방지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율법과 반대로 복음으로는 아무리 죄인이라도 구원을 얻을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살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율법은 폐하여졌는가?
이 문제는 “율법으로 의로움을 받을수 있는가?”라는 문제보다 사실상 더 어려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더 굳게 세워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은 율법의 본래적인 기능…… 죄를 알게 하며 깨닫게 하는 역활로서 더욱 굳게 세워져야 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의인이 될 수 있는 기능과 구원을 얻게 하는 율법의 기능은 폐하여 진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것은 율법이 미완성이었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3:23)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19)
앞 문장들은 분명히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라든지 “약속한 자손이 오기까지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또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율법이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으며, 믿음이란 의를 얻게 하는 것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3-24)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의미는 율법이 다시 완성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며, 예수님 자신이 율법을 이루신 것이다. 율법으로는 충족할 수 없는 “의”를 바로 믿음으로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율법이란 (1) 죄를 깨닫게 하고 알리는 역활로서, (2)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활로 더욱 굳게 세워지고 더욱 예비적인 역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율법을 더욱 굳게 세워졌다고 말하기도 하며, 율법이 폐하여졌다고도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 두 뜻은 전혀 상반된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율법보다 더욱 엄격한 지킴까지 요구하였는데, 그 이유는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율법의 기능적이고 내면적인의미로서 뜻하신 것이다,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서는 죄를 알려 주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과거에 주마다 법이 달랐다. 어느 주에서는 술의 제조와 판매를 할 수 있었으나, 어느 주에서는 술의 제조와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기준은 바로 법이었다.
예를 들어 어느 집을 건축하는데 설계도면이 곧 율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집의 건축이 완성되었다면 설계도면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설계도면은 계속 필요하다. 그러나 그 설계도면이 계속 필요한 용도는 집을 더 건축하기 위함으로서가 아니라, 보수와 사후처리등 다른 목적을 위하여 설계도면은 계속 필요하게 된다.
또 우리는 설계도면이 더 이상 필요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일단 완성된 집에서는 더 이상 건축을 위한 도면으로서의 기능은 폐하여진 것이기 때문이다.즉 율법이란 의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폐한 것이지만, 죄를 알고 깨닫게 하는 역할로서는 계속 필요하며 더욱 굳게 세워져야만 하며, 믿음의 내면적인 의로 인도하기 위한 역할로서도 필요한 것이다.
5.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가?
이 문제에서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 같은 교단이 정통교회가 부딪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다. 그 원인은 죄가 넘치고 범법함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지켜야만 한다“ 든지 “하면 안된다“는 율법은, 애당초 그것을 지킴으로 의로움을 주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그 율법은 “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어졌는데, 그래서 복음은 값없는 은혜가 되어진다. 복음은 아무리 죄인이라도 살릴 수 있다.
율법이란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의를 얻는 새로운 방법“이 된다.
이제 새로운 의가 나타난 것은, 이제 “살게 하는 것“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다시 율법으로 의를 찾는다든지 “율법의 지킴이 심판의 기준“이라는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같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본래적인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율법과 복음은 동등한 것이 아니다.
율법은 예비적이었고 복음은 완성적이다. 율법은 정죄의 기능을 하는 것이었으며 복음은 죄를 없애는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의 시대에 와서, 지켜야만 하였던 거룩한 날과 달과 절기가 없어졌으며, 정결하고 부정한 음식물의 구별이 없어졌으며, 짐승으로 희생제사를 드리던 성전의 제사가 없어졌다. 그 모든 율법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어졌다.
율법이 완성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완성을 이루신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가 실체가 되시며, 율법은 그림자일 뿐이다. 하나의 새롭고 완성된 법이 공표되면 예전의 법은 이미 그 새로운 법 안에 포함되어 진다. 법이란, 지킴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기의 죄를 알 수 있는 그런 마음의 거울인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헤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은 율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할 수가 없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거나 율법이 우리에게 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2)
전자의 “법“은 생명의 성령의 새 법이며, 후자의 법은 율법을 말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의롭다고 받아들여 주시는 것이다. 율법이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의“이며 그것은 죄와 사망의 법이다. 복음이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생명의 법이 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라.“(갈2:19)
바울은 율법에 대해 죽었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이미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율법의 마침이 되어주심으로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되는 성령을 따르는 것이다
6. 구원은 율법의 기준이 아니라 믿음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산다. 그렇다면 작은 죄를 하나 짓고 그것을 회개하지 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죄의 공포에서 두려워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지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그러한 주장은 도덕폐기론, 성화무용론이라고 하는 구원파의 주장이 된다.
정통교단에 있는 사람들도 간혹 이것을 착각하여 “죄를 지어도 좋다”든지 “성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나는 나의 믿음으로 내가 이미 칭의를 얻었으며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판정을 하여, 어떤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도덕폐기론이며 성화무용론이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와 보호하심으로 조금씩 죄에서 멀어져 가게 되며, 그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부른다. 그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회개가 필요하다. 다만 구원을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스스로 죄에서 멀리 하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이루게 된다. 성화는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를 닮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7.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혹간은 야고보서를 예로 들면서 오직 믿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흩어진 열두지파의 유대인에게 보내는 글(약 1:1)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디아스포라로 말미암아 세상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율법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부하며 살아갔지만, 유대인으로서 삶에서는 율법적인 행함을 망각하고 그 열매가 없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야고보는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실천적인 필요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오늘날 도덕폐기론과 성화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이라고 본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게된 사람들은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단지 쳐다봄으로서 살게 되었는데,(민21:8-9) 그것은 구약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방법이었다. 예수님은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자들이 살아났듯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마다 영생을 얻게 된다. 과연 놋뱀을 쳐다보는 것 외에 또다른 방법으로 살아날 수 있었을까? 성경은 오직 쳐다보는 사람만이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를 바라보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예수님이 장대에 놋뱀처럼 달리셨던 것이다. 그래서 2000년 전 예수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참으시며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
요즈음 주일학교 학생들로 암송하는 요한복음 3장16절을 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너무나도 유명한 성경구절이 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는 정직하지 못하도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
위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약의 하박국 구절은 바울을 통하여 로마서 1장17절에 인용되어지며, 갈3:11과 히10:38에도 인용되어진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바울은 시대적이며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하박국 예언자를 통하여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음성을 성령의 감동으로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성령께서 주셨던 그 감동이 바울의 영감을 통하여 로마서1장 17절을 다시 기록하게 하였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종교개혁자인 마틴루터와 웨슬레가 그 말씀을 들었을 때에 성령께서 뜨거운 회심과 감동을 주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이다.
마틴 루터는 그 구절을 통하여 “하늘문이 열리는“ 감동을 느꼈다고 하였고, 웨슬레는 뜨거운 회심을 체험하게 된다.
히브리서의 기자도 역시 하박국선지자와 바울에게 영감을 주었던 성령께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게 하신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0:38-11:2)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고, 이스라엘 베냐민 지파였으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던 사도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좇았던 것이다.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