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지속론과 은사중단론
이인규
은사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는 현재에도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며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주로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은사중단론(cessationism)을 지지하며, 진보적인 신학에서는 은사지속론(continuationism)을 지지하는데,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며, 보수적인 개혁주의에서도 은사지속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으며, 진보적인 복음주의에서도 은사중단론을 주장하는 신학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은사지속론자는 예언과 치유와 같은 신령한 은사는 당시 초대교회에서만 역사한 것으로서, 지금은 중단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즉 매우 다양한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은사지속론을 지지하지만 은사의 남용, 특히 방언의 남용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는 입장입니다. 개인적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방언이 과연 성령께서 주신 방언일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이며, 특히 예언과 통역하는 은사에 대해서는 거짓된 현상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은사가 다 거짓은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스스로 판단하여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방언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하며,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교회에서는 두세 사람이 순서대로 하며,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권면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할 것입니다.
은사중단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존 맥아더, 아브라함 카이퍼, 노만 가이슬러, 안토니 후크마, 워필드, 리처드 개핀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와 캘빈, 웨슬레는 은사중단론자가 아니라 은사지속론을 지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조지 휫필드, 찰스 피니, 웨인 그루뎀, 존 파이퍼, 조나단 에드워즈, 존 스토트등은 은사지속론을 지지한 사람들입니다. 박윤선 박사와 차영배 교수같은 분들도 은사지속론을 지지하는 분들입니다. 어떤 분은 처음에는 은사중단론을 주장하다가 후에 은사지속론으로 자신의 주장을 변경시킨 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인 논쟁은 유익하다고 생각하며 성경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은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주장과 다른 것을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거나, 이단시하는 사람은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사람들입니다. 특히 은사지속론을 사탄 운운….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신학적 스펙트럼이 아주 좁은 사람들로서 자기가 배운 신학만이 옳다고 믿는 소위 교리주의적인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주장이 옳다면 위에 열거한 신학자들은 모두 사탄이 역사하신 분들인지요?
건전한 토론문화가 장착되어 건전한 성경토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단적인 주장과 맞설 때에는 단호하게 정통신학적인 견해를 강조하여야 하겠지만, 다른 신학적 견해에 대해서 비난을 하거나 공격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스펙트럼을 좁게 유지하지 말고, 정통신학적인 범위 자체를 더 넓게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은사중단론이나 은사지속론은 다양한 신학적 견해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은사지속론이라고 하여도 그것이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며, 은사라는 것도 주관적인 판단이 많으므로 은사남용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방언을 받아야만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오순절계열의 주장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특히 연습에 의한 방언은 성령이 주신 방언이 아닙니다. 방언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며, 무조건 사탄의 역사라고 단정하는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판단하는 것이 있는데, 은사중단론이라고 하여도 오늘날 모든 은사가 일제히 중단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방언, 신유, 예언, 통역등의 신비주의적인 은사와 일부 초능력적인 은사가 중단되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오늘날에는 기적과 이사도 없다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소수 있지만, 이런 기적중단론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보수주의 학자들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시작된 대각성운동도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은사지속론을 지지한다고 하여, 오순절 계열, 더 나아가서는 신사도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매도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은사중단론을 지지한다고 하여, 그 사람은 근본주의나 세대주의로 간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은사란 교회라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각 지체에게 나누어주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저는 지금도 교회 각 부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으로 봉사하는 성도들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아무리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현재에는 기적과 이적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기적과 이적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섭리하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지요.
은사는 공동체인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각 지체가 되는 성도들에게 나누어주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4-12).
사도바울뿐 아니라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0)
모든 교인이 다 동일한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며, 여러 가지의 형태로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졌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