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
이인규
하나님 나라, 천국
영어 “Kingdom of God”, “Kingdom of heaven” 히브리어 “말쿠트 야훼”. 알람어 “말쿠타 디스마이아”, 헬라어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실레이아 톤 우리논”은 본래 하나님의 통치영역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이스라엘의 특유한 언어적인 개념으로서, 매우 오랫동안 다양하게 인식되어져 전해오고 발전되어진 개념이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몇가지의 개념으로 정의되어지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슈가 되는 몇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실제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나라는 영역적인가, 통치적인가? 혹은 영역적이며 또한 동시에 통치적인가?
또한 하나님나라는 과거적인가, 현재적인가, 혹은 미래적인가? 혹은 과거적이며 동시에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가?
죽어서 가는 사후의 천국(낙원)은 하나님나라가 아닌가?
또한 하나님나라는 이미 도래한 것인가? 궁극적으로 실현되며 성취되는가? 혹은 진행적이며 확장되어지는가?
하나님나라라는 개념은 포괄적인 의미로싸, 어떤 한가지의 개념만을 하나님나라의 정의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와 함께 이 땅에 도래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온전히 성취되며 실현되어진다는 사실이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 15:24)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 11:15)
이러한 개념은 구약에서도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내가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셨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 할 것이라.“ (단7:13-14)
이러한 개념들을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자
1) 영역적이고 통치적인 개념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실제적인 신정통치의 영역적이며 개념을 뜻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나라가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지금도 유대인의 왕국이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과 동일시 되어있다.
예를 들면 시돈은 아스다롯을 숭배하였고, 몰록은 암몬의 밀곰 신이었고, 그모스는 모압의 신이었던 것처럼(왕상 11:5-7),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였다. 물론 여호와는 만유의 주이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지만,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시는 여호와 유일신의 통치적인 개념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주변국가와 종족들은 모두 우상을 숭배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민족들과 교제나 혼인을 할 수 없었으며, 땅을 얻기위한 영역적 전쟁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함과 동시에 자신의 민족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동일시 되었으며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곧 심판을 의미하였다. 심지어 우상을 숭배하던 족속과 나라는 전쟁에서 한명도 살려 주어서는 안되었던 적도 있었다.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은 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자신의 나라에 가서도 여호와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흙을 노새 두 마리에 실어가기를 엘리사에게 요청한다(왕하5:17-18)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토가 동일시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었으며, 그들의 장막에 계시는 분이었으며, 나아가서는 그들의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이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라만이 곧 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동일시 되어져 왔다.
그러나 그들의 남북조가 멸망을 당하고 포로기를 거치며 그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어짐으로서, 그들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점차 지리적 영역이나 정치적 실체만의 개념에서 떠나게 된다. 즉 통치영역을 뜻하는 하나님나라의 개념은 국한된 영토적인 개념에서부터 넓은 영역적이며 내면적인 개념으로서 통치적인 의미로 간주되어지기 시작한다.
포로기 이후에 디아스포라를 겪은 이스라엘은 결코 예전의 영광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치적 현실에 대하여 큰 갈등과 긴장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후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의 실체적이며 영역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충성된 개인들의 내면적인 믿음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간주하게 되며, 마지막 때와 연관되어지는 종말적이며 심판적이며 영적인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된 관점에서 마지막 때 인류를 심판하시는 역사의 정점에서의 새로운 왕국의 출현을 고대하게 된다. 그들은 메시야의 출현을 그들의 압제와 구속에서 해방시켜줌으로서 정치적이며 새로운 왕국(하나님나라)을 건설하는 인물로써 기다리고 있었기에, 세례요한마저도 예수님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그러나 천국은 침노를 당하게 되며, 침노하는 자가 빼앗을 것이며,(마11:2) 하나님 나라는 오직 능력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고전4:20) 나라의 본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며,(마8:12) 농부에게 맡겨진 포도원은 빼앗김을 당하며(마21:33-40) 혼인잔치는 청한 사람들 외의 다른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마212:1-14)
2) 현재적인 개념
신약에서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나라의 개념은 현재적인 개념과 장래적인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는 가는 것인가? 오는 것인가?
하나님나라는 고정적인가? 확장적인가?
하나님나라는 장소적 실체인가? 영적인 내면의 세계인가?
전체적인 성경으로 볼 때에 하나님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만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가 도래하였고 그 나라는 진행적이며 확장적이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사후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궁극적인 미래의 장소를 천국이라고 말한다)
신약에서 말하는 현재적인 개념과 궁극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가 있어왔다. 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리출(Ritschl), 하르낙(Harnack), 그리고 도드(C.H. Dodd)는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현재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반면에 봐이스(Weiss), 슈바이처(Schweitzer), 그리고 몰트만(Moltmann)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으로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와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과 같은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보았다” (개혁주의종말론, 안토니 A. 후크마, 기독교문서선교회, 65-66쪽)
감리교의 존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동일한 사실에 대한 두 개의 술어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하늘에서 누릴 행복한 상태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는 상태로서, 이것은 소유한다기보다 인간심령 속에 있는 하늘의 영광스런 상태이다. 이것은 지상에 실현되는 복음의 시대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백성들의 사회인데, 먼저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영광 중에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성경에는 이 천국이 특히 지상의 것으로 표시되기도 하고, (천상의) 영광의 상태로도 나타났으나, 보통으로는 둘다 함께 포함한다”(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성광문화사, 345-346쪽)
세례요한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마3:2)라고 말하였는데, 예수님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으며, 다만 세례요한과 다른 점은 “때가 찼고”(막1:15)라는 말씀이 추가된 것과 “이때부터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되”(마4:17)라는 시간적인 개념이 추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라고 말씀하신다.
이 ‘에프타센’이라는 단어는 이미 도착하였다, 임하였다는 뜻이며 (to come before, precede)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이미 왕국이 임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도래하였다고 본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2-43)
하나님나라는 진행적이며 확장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겨자씨의 성장에 비유되었으며(마13:31) 가루서말에 넣어 부풀어지는 누룩에 비유되었는데(마13;33) 그것은 예수와 함께 도래하여 진행적이며 점진적으로 확대되어져 가는 통치적인 개념이 분명하다.
또한 밭에 뿌려진 씨앗에 비유되어짐으로서(마13:3) 선택적이며, 그 보화를 획득하기 위하여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살 필요가 있는 상대적인 가치가 있다.(마13:44)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새로운 개념의 하나님 나라는 계속 진행되며 확장되어진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내면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강조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의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였으며(롬14:17)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없는 내면적 영적실체이며, 성도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눅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또한 성도들을 곧 그의 나라와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된다(벧전2:9. 계1:6. 5:10)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계1: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6)
예수님께서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예수와 함께 하나님나라가 도래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온전하게 성취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지만, 그것은 현실과 달랐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눅19:11)
3) 긍극적이며 미래적인 나라
하나님나라는 또한 긍극적이며 미래적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26:29)
그 나라는 궁극적으로 오직 홀로 하나님만이 높힘을 받게 될 것이며(사2:11) 그 분이 몸소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며(사11:9) 우리가 주님과 영원히 거할 처소가 될 것이다.
혹간은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만을 강조하다가 사후천국이나 궁극적인 마래의 나라의 개념을 놓치는 경우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이며 종말적인 장소적인 개념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12)
주님이 직접 가르쳐 준 기도문은 그 나라가 임할 것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요3:3.5)
또한 믿는 자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마6:33)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0)
성도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한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가 종말적이고 궁극적인 장소의 실체라는 것을 시사하여 준다.
왜 예수님은 일부 제자들에게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을까? 그리고 이 말씀 뒤에는 변화산 사건이 뒤따르게 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8)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눅 9:27)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택하신 몇몇 제자들에게만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지만, 그 변화산에서 보여준 사건은 상상적인 허상이 아니라, 영적이며 실제적인 사건이었다. 일부 제자들에게 죽기 전에 미리 보여준 하나님나라는 보편적으로는 누구나 죽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다는 뜻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혜로운 서기관에게 그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았음으로 설명하시며(막12:34) 분명히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은 선택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하였다.(눅13:28) 계시록에서의 그 나라는 갑자기 나타나게 되며 완성되어진다. 궁극적으로 전쟁(9:1-12)과 재앙(13-19)과 함께 나타나며 인간사회는 구원과 멸망, 영생과 영벌의 두 세력으로 양분하게 되어짐으로서(계20:7-10) 그 나라는 심판을 거쳐야만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이미 도래하였다.
그 나라는 믿는 성도들로 구성되어진 영적인 영역으로서 점점 확장되어지며 진행되어지게 될 것이다. 그를 믿는 자발적인 개인들로 구성되어지는 하나님 나라는 내적이며 영적인 실체로써 점점 그 영역을 넓히게 되어질 것이며 마침내 종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선택적이며 심판적으로 완성되어지며,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짐으로서, 현실적인 세상나라를 모두 포괄하게 될 것이며, 그 나라는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세세토록 영원히 폐하여지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 나라는 이미 임한 나라이며 또한 진행적이며, 그 나라는 영적이기도 하며 실제적이기도 하며, 그 나라는 현재적이기도 하며 궁극적이기도 하며, 그 나라는 통치적 영역적이기도 하며, 공간적이며 시간적인 개념을 갖고 있기도 하며, 그 나라는 실제적이기도 하며 내면적이기도 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 나라가 곧 교회는 될 수가 없다.
믿는 성도도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 나라가 곧 성도가 될 수는 없다. 믿음의 영적 세계도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영적인 내면 세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가 사후에 가는 곳, 역시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즉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과거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존재하였다. 현재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 영역을 확장시키면서 진행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죽어서 가는 영적인 장소도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말적인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되어 나타나게될 것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1-2)
4) Already but not yet
성경적인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직접 파송하신 칠십문도들이 돌아와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고한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10:17)
그 때에 예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0)
다시 말하여 귀신을 쫓는 권세를 받은 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며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며 그것이 더욱 중요한 본질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귀신과 악한 영에 대적하고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 싸움의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전쟁이다.
5) 잘못된 경우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치우치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나라의 내면성과 현재성을 부정하는 경우
하나님나라의 내면성과 현재성만을 강조하는 경우
하나님나라의 궁극적인 사후천국을 부정하는 경우
자신이 현재 지상에서 사역하는 일을 하나님나라라고 강조하는 경우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눅 19:11-13)
그 나라는 지연되어 왔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어느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갔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그 귀인은 예수를 비유한 것이 분명하며, 왜 먼 나라로 비유하였을까? 누가복음 19장에서 귀인이 왕위를 받아갖고 오는 날은 분명히 장래적이며, 그가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은 그가 떠났던 동일한 장소, 즉 지상이 된다.
산상보훈은 현재 죄인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속한 시민들의 “의”에 대한 개념이다.
신약에서 하나님나라는 예수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그 나라의 충만한 실현과 성취는 분명히 미래적이며 궁극적이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고 성경은 말한다.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요3:3)는 것은 거듭난 사람은 그 시점이 현재이든 미래이든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적인 개념과 확장적이며 진행적인 개념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나라는 현재 온전히 성취되거나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주기도문에서 보듯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악을 행하는 자들은 종말적으로 심판을 통하게 될 것이며, 의로운 자들은 궁극적으로 세상 끝날의 추수를 거쳐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마13:38-43)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 13:38-43)
하나님나라의 개념은 상당히 포괄적이며, 시간을 초월한다. 이것을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그 구성원이라는 것이며, 장래에 완전히 실현되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