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구원론

  • 6월 16, 2016

                                                               행위구원론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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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부쩍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많아졌다. 그 설교가 도덕적이며 교훈적이므로 구구절절 옳은 주장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그들을 행위구원론이라고 비판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행위구원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 교인들조차 행위구원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행위구원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행위구원론이란 행위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주장을 말하지 않는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위구원론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행위구원론이란 믿음과 행위를 동일한 조건으로 주장하는 견해를 말한다. 즉 어떤 목사가 믿음 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도 함께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면 그는 행위구원론자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단지 믿는 자로서의 열매로서, 즉 실천적인 믿음의 조건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의무로서,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행위구원론이라고 말할 수 없다. 즉 기독교인의 열매로서 행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함을 주장하는 것은 곧 행위구원론이다. 특히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 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하거나, 그것을비판하는 사람은 행위구원론이 된다.

결론은 간단하다. 인간의 행위로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사람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는 행함이 필요하다. 심지어 불신자들보다 더욱 악하고 타락한 기독교인들이 있어서 상습적이고 고의적인 타락과 범죄를 일삼는다면, 당연하게그들은 거듭난 자가 아니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며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으로서, 혹은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의 조건이나 거듭나는 중생의 조건으로서 행함을 믿음과 동일한 조건으로서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행위구원론이 된다.

행위구원론의 특징은 그동안 기독교가 잘못 가르쳤다는 주장을 하며, 기독교인 중에서 구원을 받는 자가 소수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곧 행위구원론이다. 물론 기독교인들 중에는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을 갖는 자들이 있을 것이며, 그러나 어느 기독교도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행위구원론은결국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온전하지 못한 대속으로 간주하는 주장이 되기 때문에 이단적인 견해가 되어진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십자가 예수의 피를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것으로 간주하고 또다른 별도의 행위나 법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신칭의적인 구원론 자체를 부정하고 비난하는 구원론은 곧 행위구원론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기독교의 이신칭의는 형식적인 믿음이나 거짓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견해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와 웨슬레가 롬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성경구절에서 회심을 하였을 때에 그 믿음이 과연 거짓 믿음이었고 입으로만 말하는 믿음을 뜻하였을까?

행위구원론자들이기독교의 이신칭의를 부정하고 비난하는 이유는 입으로만 고백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러나 어느 교단의 교리와 신학에서도 입으로만 고백하는 거짓믿음과 형식적인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즉 기독교가 잘못 가르치거나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신칭의를 부정하도록 왜곡시키는 고의적인 비난이 된다.

어떤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의 개인적인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기독교의 복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기독교인의 타락과 범죄는 분명히 문제가 있으며 적지 않다고 보지만, 기독교의 복음 자체가범죄하고 타락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 전체가 말하는 멧세지이며, 그 결과 때문에 예수가 대신 죽으신 것이다. 만약 행함으로 인간이 의에 이를 수가 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저주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으실 이유가 없었다.

행함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믿음 외의 인간적인 책임 측면을 행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행함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열매가 되며, 행함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다시 말하여 인간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이며 기본이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치명적인 이단 주장이 되고만다는 것을 명심하여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캘빈주의 신학과 다른 웨슬레안의 신학적 견해로서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왜 이단이냐고 질문을 한다. 이러한 주장을 웨슬레안의 신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놀라운 생각이 든다. 그들이 과연 웨슬레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인가?

웨슬레신학 성향의 교단들의 교리와 헌법을 보면, 모두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캘빈주의와 웨슬레안을 포함한 정통신학은 모두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즉 행위구원론은 이단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또 웨슬레 조직신학책을 보면 웨슬레는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말하였으며,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웨슬레안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왜곡을 시키고, 캘빈주의와 다르다고 이단이냐는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을까?

요한 웨슬레 목사와 이 연회의 회집자들은……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가장 위험하고 가증스러운 도리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즉 우리가 현세에서나 심판 시에 칭의나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의 다른 것을 믿는 일은 없다. 그리하여 시간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하지않는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지라도(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선행은 어디까지나 혹은 부분적으로나 또는 전체적으로나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우리의 공로가 된다거나 그 보상이 될 수는 없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09)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므로…. 불경건한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는 순간, 그는 행함이 없어도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졌을 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이요, 그 반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믿음만 있다면 그는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흉악한 죄인으로서 지옥의 형벌 밖에 받을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 맡길때 그 시각으로 그는 용서함을 받는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11, 웨슬레의 표준설교 인용)

행위계약은 인간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총 안에 지식과 사랑, 성결과 행복을 누리며 살기 위하여는 완전한 사람이 하나님의 법의 완전하고 흠없는 복종을 요구한다. 반면에 은혜의 계약은 하나님의 은총과 생명의 회복을 위해 오직 신앙만을 요구한다. 불순종하는 이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신 분, 죄를 위해 제물이 되신 분을 우리가 믿는다.(웨슬레, 왕국의 길, 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148-149

웨슬레 조직신학은 행함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으며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롬1:17을 듣고 회심을 하였던 웨슬레의 체험에 대해서 알고 있다. 웨슬레가 회심 하기 이전의 구원관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올드스케이트 이전의 웨슬레의 사상에는 인간은 도덕적인 선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복종,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킴으로서만 구원받는다는 기본적인 원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노력과 그 노력의 도적적 영적 결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다(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167)

오히려 웨슬레가 회심 하기 이전의 구원관은 행위적인 요소가 있었다

그렇다면 웨슬레가 로마서 서문을 듣고 회심을 체험하였을 때의 그의 일기문과 그에 대한 해설을 보자.

– “나는 나의 마음에 이상스럽게도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임을 믿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죄, 나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함께 웨슬레에게는 아들의 믿음이 왔으며, “율법 아래 살 때에는 전력을 다해 싸웠어도 패배자일 따름이었는데 이제 은혜 아래에서는 승리자가 된다는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자신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다가 실패한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종교개혁자의 교리로 돌아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169)  

그들은 오히려 웨슬레 회심 이전의 견해를 웨슬레안적인 구원관으로 알고 있지 않는가? 최근에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기존 기독교의 복음이 모두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는 목사가 있다. 그들 중에서는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복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거나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적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거듭나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결단과 의지적인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사도 있다. 죄를 하나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목사도 있다.

의롭다함을 받으려면 믿음 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도 있다. 바로 이들이 예수 십자가의 공로를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구원론자들이다.

초대교회에서 그들의 조상인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나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3:10-12)

의인은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어떻게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가? 아담 이래 인류 역사상 행함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을 하셨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미혹하고 있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3:23-27)

왜 행위구원론자들에게 미혹되어 다음과 같은 수많은 성경구절들을 보지 못하는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3:5)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