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Religious Pluralism)

  • 6월 16, 2016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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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 들어서 다원주의라는 것이 상당히 부각되고 있다.

유럽쪽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온 몇몇 교수들이 신학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자신이 공부하였던 자유주의 신학을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유명한 목사 한분이 불교의 강연회에 초청되어 불교에는 불교의 구원 멧세지가 있고 기독교에는 기독교의 구원의 멧세지가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함으로서 큰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더군다나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교회이며, 복음주의이며 보수주의라고 자처하는 교회의 목사가 불교에도 진리가 있고 기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 소위 상대적인 진리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마 불교단체에 초빙되어 박수를 몇번 받으니, 자신도 모르게 지나친 외교적인 발언의 선을 넘은 것 같다.

몇 사람들이 다원주의를 극소수 신학자 일부가 주장한 정도로만 알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색다른 견해로만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다원주의의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젠 컴퓨터 통신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다원주의가 등장하며 또 혼합주의(물론 사이비 이단이지만)까지 등장한다.

이들의 배후에는 신학적인 학문을 배워 온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도 있지만, 증산교, 통일교같은 이단들도 동일한 주장을 하며 그러한 주장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근본적인 구원의 길이 많다는 것이다.

마치 정상에 오르는 등산길이 여러 가지인 것처럼 구원의 길이 매우 많다는 이야기이며 곧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혼합주의는 이것도 간단히 요약하면, 여러 가지 종교를 혼합시키자는 이야기이다.

종교적인 유형을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배타주의:

2. 유일주의

3. 포괄주의

4. 다원주의

배타주의란 주로 일부 유대교와 이스람교가 이에 해당되는데, 이스람교들은 한 손에는 코란을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선택을 강요하였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극소수이지만 급진적인 기독교인들이 절에 가서 불상에 돌을 던지던 일도 있었다물론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기독교는 유일주의이어야 할 것이다.

십계명에도 나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20:3)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사도 베드로는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음이니라”(4:12)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최근의 카톨릭은 포괄주의를 선포하였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적당하게 타협한 것이다.

그러나 포괄주의는 상대적인 입장표면일 뿐이며, 실제로 타종교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진리란 불가능한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라면 유일주의를 벗어날 수가 없다. 성경은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을 허락하거나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라는 용어가 어느 정도 체계화가 된 것은 힉(J.Hick)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그의 사상은 중심주의라고도 불리우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그가 말하는 신앙의 중심은 더 이상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학문적 사상을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에 의한 신중심주의라고 부른다.

물론 그 이전에도 틸리히같은 사람도 있었고(세속주의라고 함), 고가르텐이라는 사람의 주장(역사주의라고 부름)도 있었으며, 슐라이에르마허나 트릴취라고 하는 사람들(범신론주의)도 있었지만 체계적인 다원주의는 위에 말한 힉으로부터라고 볼수 있다.

힉의 사상을 아주 쉽게 말하자면 신()을 어떤 이미지 산물의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힉은 예수가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지칭하지 않았으며, 인자라고 지칭해왔다고 하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단지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여 신의 아들이라는 이미지에서 발전한 은유적인 존재라고 설명을 한다.(참고. 존힉의 종교신학연구 354페이지)

힉은 결국 예수의 신성과 성육신론을 배척하며, 특이한 점은 그는 선재하는 부다의 수육 불교적 성육신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위 책, 353페이지)

즉 그의 종교적 유형은 혼합주의에 가깝다.

즉 모든 종교적 표현은 수평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라는 견해이며, 재미있는 것은 이 다원주의도 여러 가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더 발전되어진 다원주의론자가 콥(J.B.Bobb)인데 이는 거의 혼합주의자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힉의 신의 이미지를 발전시켜 하나님은 단지 존재뿐이다라고 하며 하나님은 실체성을 결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도 부처와 함께 충만하게 되면 ()”의 경지에 이르며 그것을 하나님의 부처화라고 부른다.

그는 하나님이 부처화되어야 하듯 구원도 일반화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미래는 그리스도의 열반의 실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독교가 무엇인가에 집착하여 매달려 있다고 비판하며 참된 신앙이란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콥은 또 그리스도와 불교의 아미타를 똑같은 궁극적 현실이라고 하며 서로 변혁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혼합주의를 배격하는 다원주의자도 있기는 있다.

대표적 인물로는 큉(H.Kung)이다.

그는 기독교는 독특하나 그러나 유일한 것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는 라너(카톨릭 신학자) 익명의 그리스도는 가짜 해결책이라고 비난하며, 그는 불교는 더 좋은 불교가 되어야 하고 교회도 불교를 도와 더 구원사의 과정을 따라 진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큉은 기독교의 존재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으며 속죄에 대한 구원관을 무시한다.

혼합주의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다원주의자는 파니카(R.Panikkar)이다.

그는 브라만과 하나님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힌두교와 기독교를 완전히 혼합시킴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여러 아들 중에 하나라고 함으로서 그리스도란 브라만을 실현시킨 보통사람을 말하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예수가 브라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브라만은 범,을 의미한다)

이제 세계2차대전 후 포스터모더니즘 운동이 전세계로 확대되면서 초현실주의, 무정부주의적 경향, 예술의 자율, 합리주의의 포기성향등이 들어오면서 기독교에도 급진적 자유주의적 학문성향이 들어오고 카톨릭의 정치와 시대 조류를 따르려는 성향이 영향을 까치게 됨으로 우리나라에도 다원주의가 들어오게 된다.

즉 다원주의는 성경이라는 범위를 벗어나 오직 인간의 인식에 의한 주체와 대상을 그 근거로 삼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즉 기독교적인 진리의 기준이 모호해지는 경향이다.

어느 다원주의자는 부활의 의미적 개념을 광주사태로 비유하기도 한다.

즉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 항쟁으로 바뀌여져가는 시대적 상황의 비유로 보는 것이다.

특히 밀러(J.Miller)같은 사람은 창조를 부인하는 진화론으로 기독교를 설명하기도 한다

열린 방에도 부활의 의미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권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으며 진리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근거는 오직 개인의 주관적이고 추측의 인식일 뿐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탈규정, 탈규범, 탈경건에서부터 출발되어 지며, 특히 젊은 신학도들에게는 흥미를 끌게 된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다원주의는 타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것은 오직 예수라는 개념을 버리고 하나님을 정상으로 보는 개념의 믿음으로의 양보를 말한다.

즉 예수의 절대적가치를 상실케하고 상대적가치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종교는 신() 중심적인 신앙이다. 인간적인 견해에서의 학문적인 관점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과 학문은 동일하지 않다. 학문은 바뀌어질수 있지만 신앙은 절대적이다.

믿음이란 것은 나의 마음의 중심을 이야기한다.

그 대상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전지전능의 신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시절과 관점이 변화한다해도, 부모가 바뀔수는 없듯이 믿음이란 온전히 내어 맡기는 헌신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중심이 없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다원주의는 반기독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기독교를 뿌리째 흔드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들에게 이 말이 매우 불쾌하겠지만 그것은 사단의 역사일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아니라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 다원주의인데, 그들은 모든 종교를 모든 길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상이 바로 가장 비성경적인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종교다원주의는 먼저 만인구원론이란 논리에서 출발하여 논리적인 비약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성경비평주의와 다른 관점에서의 성경해석을 근거로 합니다.

그들 중에는 성경도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심판 받아야 할 역사적인 문서라고 본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중을 두느냐 현대신학자들의 사상에 비중을 두느냐는 선택을 하여야 한다.

19세기의 자유주의는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의문점에서 출발하였으며, 20세기의 다원주의는 너무 많은 그리스도와 로고스의 존재를 인정함으로 혼란과 상대주의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들 다원주의자들의 신학적 논리는 통일성이 있거나 일관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이들에게 신학적인 차이는 크게 구별되어진다.

다만 기독교의 유일성을 반대하고 부정하는 점만이 공통점인데, 이들 다원주의는 불신과 무신앙에서 비롯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단과 사이비들, 특히 통일교나 영생교등이 이 다원주의 신학을 많이 인용하고, 호응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성경은 일관되게 다원주의와 혼합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사도행전 412절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수 없나니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느니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장로교의 존힉은 기독교만이 절대라는 주장을 포기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창조주이므로 모든 인류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모순이다라고 외견상 그럴듯한 주장을 하고 있다.그러나 성경은 틀림없이 모든 사람에게 믿음이라는 기회를 주고 있음이 명백하다.

어느 성경도 믿음이 없이 구원에 이른다는 의미를 가진 것은 없다.

어느 다원주의자는 그리스도를 우상화하지 말라는 주장도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예수를 분리하는 자도 있다.

우상은 없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그들은 그들나름대로의 이성이 신앙보다 우선되며 그들의 주장이 성경보다 권위가 있다는 교만을 가지고 있다.

존 힉은 신을 이미지나 산물같은 개념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을 로써 이해하여야 한다고 하며 하나님을 존재 그 자체로만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는 없으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상은 거의 무신론에 가깝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 임의로 만들고 있다.

대부분의 다원주의자는 일부 WCC의 신학자들이며 WCC 인도의 신학자에게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나일즈와 사마르타이어이다.

그들은 힌두교와 기독교의 혼합주의자들이다.

힌두교는 신이 3억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악신도 숭배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하나의 신일 뿐이다.

또 한국의 다원주의의 시초라고 하는 김경재교수는 P.니터의 이론을 거의 답습하고 있다는 중론이다. 이정배교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의미하는 신중심사상을 거의 답습하고 있다.

진보적 신학대학의 일부 신학생들은 이러한 교수들과 일부 신학자의 영향을 받아 왔다.

그러나 신학은 개인의 사상과 학문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하는 학문이 되어야만 하며, 성경은 유일주의를 말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들은 그 신학자의 사상이 신앙보다 우선하고 있으며 이러한 파격적인 논리에 쉽게 젖어들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동조하지 않은 동료를 거룩한 체하는 이중인격자로 몰며, 다원주의야 말로 하나님의 의지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다원주의란 믿음을 배제한 학문적인 입장일 뿐인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는 부분적인 성경 몇구절만을 그들의 이론에 적합한 것으로 맞추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 다원주의 교수들에게 신학을 배운 젊은 신학도들이 졸업을 하고 후에 목회를 시작했을 때이며, 그러한 사상이 과연 성도들에게 강한 거부감으로 나타날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은 목회를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분명함을 알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신학적인 주류로 성행하였을 때에, 교회에서 젊은 사람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는 결과를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다원주의를 부르짖는 젊은 신학생에게 교회를 맡길 수 없다.

우리의 교회에 브라만의 사상과 부처의 사상을 가지고 들어 올수 없음을 그들은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많은 다원주의자와 혼합주의자는 모든 종교가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구원의 개념과 방법과 내용에 대하여는 아무런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타종교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며 어떻게 타협을 찾아야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만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듯이 이스람교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즈마엘을 바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이지만, 이스람교와 유대교에서는 예수는 선지자일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타협시키며 혼합할 지에 대하여는 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종교의 대중성과 보편적인 구원의 가능성에 대하여만 강조함으로 이들이 일으키는 많은 모순점과 문제점은 외면하고 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더욱 큰소리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진리는 평범하고 진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극적인 주장은 언제나 신선하며 매력이 넘친다.

물론 신학은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조명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된다.

예를 들어 의사는 치료법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병이 발생하는 원인까지도 배워야만 한다.

그러나 신앙은 진부하리 만큼 구태연하여야만 한다.

올바른 신앙은 올바른 신학을 그 한도 내에서 포용해야만 한다,

문학 비평자는 그 문학을 읽어야만 비평이 가능한 것처럼, 신학은 다양하여야 하고 모든 것을 알고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 비판이 주관적인 비판으로 치우칠 때에 그것은 공감을 받지 못한다.

신학은 공부하여도, 신학자를 공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는자의 목표는 하나님이어야 하며 최종권위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 과정은 언제나 예수님이어야 한다.

주님의 당부로 (주님은 3번을 내양을 먹이라고 당부했다) 주님의 양을 말씀으로 양육할 책임이 있는 장래의 목회자가 브라만과 부처와 알라신을 함께 이야기할 수는 없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기독교는 생명이 되야하고 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모든 자들이 다 다원주의를 믿더라도 나는 오직 예수를 믿겠다.

부처의 성육신 로고스화 된 브라만” “메시야가 되는 알라의 주장이 계속되는 한, 그가 목사이건 그가 신학생이건 그가 신학자이건 나는 끝까지 우리의 신앙을 지킬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은 오직 성경밖에 없다. 그리고 성경에 말하는 것은 결코 다원주의가 아니고 그 반대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데도 어떤 자들이 나타나 자신들이 부모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을 인정하고 따라가겠는가?

어느 학자들 몇 명과,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몇 명의 교수들이 가르키는 학문적인 논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하루 아침에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신앙은 기법이나 학문이 아니다.

나는 오늘 한 매일 접하는 평범한 말씀을 읽고 큰 은혜를 받았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9:27)

기독교는 반드시 성경이 전제되어야만 논리가 성립된다.

나는 길이요 진리라고 하신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언하셨다.

부처에게도 모하멧에게도 구원의 길과 진리가 있다는 것이 성경에 없는 한, 그들은 이미 기독교인이 되어질 수가 없다.

신구약을 통 털어서 이러한 다원주의의 언급은 언제나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며 벌을 내리시고 멸망을 시켰던 논리일 뿐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임의로 변경하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경계해야 할 사상이 다원주의이다….. 그러한 논리는 성경에서 절대로 유추되어지지 못한다.

성경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고, 다른 신을 섬기면서 구원을 얻은 인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그들의 사상은 불교에서도 이스람교에서도 힌두교에서도 환영을 받을 수 없는 종교계의 고아일 뿐이다.

철학은 여러 가지 논리와 주관과 이즘이 있다.그러나 신앙은 철학이 아니다.

기독교라는 신앙은 성경이라고 하는 Text를 벗어나면 곧 인위적인 초등학문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없는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신이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신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러한 혼합주의마저 용납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하셨으며 그 날 삼천명이 죽게 된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