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말씀)

  • 9월 14, 2016

                                                        로고스(말씀)

 

                                                                                                                                                      이인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1-3)

 

요한복음 11절의 말씀”(로고스)는 하나님의 위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즉 선재(先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또한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한다.

또한 사도요한은 요일 1:1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말하며, 계시록 19:13에서도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라고 하였다.

 

즉 예수님을 로고스로 표현한 것은 주로 사도요한의 독특한 표현인데,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말씀)라고 기록하였는지에 대해서, 많은 견해와 주장이 있는데, 특히 이 말씀(로고스)에 대해서 잘못된 주장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보자.

 

당시 로고스”(말씀)란 말은 몇가지의 이론적 배경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에 대한 개념이고, 둘째는 헬라적인 개념이며, 셋째로는 히브리적인 개념이다. 사도요한은 이 세가지 개념을 모두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도요한은 고의적으로 스토아 철학적인 개념과 함께 헬라적인 개념의 용어와 히브리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므로서, 그 당시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기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고의적인 의도로 그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보여진다.

즉 사도요한이 예수를 로고스로 표현하였을 때에 스토아 철학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헬라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히브리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각각 그 개념을 자신들이 사용하는 용어의 사고 범주 안에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스토아 철학적인 개념이다.

스토아 철학은 BC 335-236년에 있었던 제논이 시작한 철학적 사상으로서 스토아학파는 로고스를 우주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을 존재케 하는 씨앗으로 보았다. 이 스토아 철학이 유대교 철학자 필로를 비롯하여 클레멘스등 초대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헬라적 유대교의 필로(Philo)는 로고스가 세상이 창조될 때에 쓰였던 도구를 가르킨다고 주장하였고, “로고스란 우주를 움직이는 원칙으로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로고스가 하나님과 물질세계를 잇는 다리의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두 번째는 헬라적인 배경이다.

헬라어에서 로고스라는 개념은 크게 두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강론, 말씀을 뜻하며, 둘째는 이성, 법칙, 생각등을 의미한다. 특히 두번째 견해를 의미하는 로고스라는 용어는 BC 5세기경의 헤라클레토스(Heraclitus)로부터 발견되며, 우주 만물의 이성적 원리를 뜻하는 단어이다. 즉 로고스는 신적 원리, 신적 이성, 신적 본질을 뜻하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말한다.

본래는 고전적인 그리스어로 말하다를 뜻하는 동사 “legein”의 명사형이며 말한 것을 뜻한다. 그래서 사람은 말을 함으로서 로고스적인 존재, 즉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했다.

여기서 로고스는 많은 종류의 파생적 의의를 낳아 고대철학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헬라 철학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이 분명하며, 고대 철학은 대개 로고스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세 번째는 히브리적인 배경으로서 유대교적인 개념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만물을 존재케 한다. 실제로 히브리어적인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의인화되어 있으며(33:6, 잠언8장등) 잠언에서도 지혜가 의인화된 것도 같은 표현이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을 받았다고 구절이 구약성경 시편이 기록하고 있음을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사도요한이 예수를 로고스라고 기록하였을 때에,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모두 어떤 호소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보아야 생각된다.

 

그러나 사도요한이 예수를 로고스라고 표현하였을 때에, 그가 로고스라고 표현한 동기와 배경은 헬라적인 요소와 히브리적인 요소가 모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예수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라는 존재를 가장 쉽게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요한이 비록 헬라적인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그가 하고 싶은 본질적인 내용은 헬라 철학적인 사상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도요한이 말하고 싶은 로고스적인 개념이 스토아 철학 및 헬라 철학과 다른 점은 아래에서 요약한 세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의 주요 관심은 로고스의 인격과 성육신, 그리고 그가 태초부터 선재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었다.

 

1) 로고스가 인격적인 존재라는 점

2) 로고스가 영원 전부터 선재하였다는 점

3) 로고스의 성육신, 즉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점

 

즉 사도요한이 예수를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한 가장 첫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하나님의 뜻과 감추인 지혜를 알게 하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즉 태초부터 선재한 신성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또 사도요한은 예수께서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임을 분명히 말하기 위하여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즉 사도요한은 예수가 태초부터 선재하였던 말씀이였으며,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임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는 함께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과 인격적인 구별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 로고스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정관사(the)를 생략하여 성부하나님과 인격적 구별을 하였다.

 

함께 라는 단어는 헬라어 프로스이며,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향하여, ~을 향해 라는 일차적인 개념을 갖으며, 소유격과 함께 “~의 쪽에, 관하여 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여격과 함께, “~의 곁에, 가까이에”, 또 일반적으로 대격과 함께, “향하여, 가까이에, ~동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진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함께 하였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즉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함께 존재하였고, 친밀한 인격적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을 뜻한다.

 

여러 가지 성경번역본은 요 1:1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공동번역]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표준새번역]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현대인의성경]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말씀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셨다.

 

[KJV] [NI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즉 사도요한은 자기가 입증하고자 하는 위대한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함께 계신 분임을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단들이 주장하는 몇가지의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1. 인격적인 말씀은 비인격적인 성경말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의 기록 가운데 독특하게 쓰이는 용어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말씀이란 단어이다. 일반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가르침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지만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1 18절에서 왜 그리스도를 말씀이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 말씀에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말씀과 입 밖으로 선포된 말씀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사도요한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내재된 말씀을 로고스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말씀은 인격적인 존재로서 무인격적인 성경 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은혜로교회 신옥주는 태초의 말씀을 기록된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 말씀>이라는 등식은 항상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지칭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무궁화는 꽃이지만, 꽃이 무궁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로고스는 선재하신 말씀이다.

 

(1) 말씀의 선재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 이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지칭하며, 말씀이 성육신 이전에도 계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에 앞서서 계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세상은 태초부터 존재했으나 말씀은 태초에 이미 계셨다. 다시 말해 세상이 있기도 전에 말씀은 계셨던 것이다. 태초에 이미 계셨던 말씀은 결코 시작도 없으셨으며 그러므로 영원히 계셨던 것이다.

 

(2) 성부와 더불어 계심 : 첫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므로 본질(essence)과 실체(substance)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지만, 함께 계셨으므로 인격(person)으로 구별되는 분이시다.

 

(3) 창조 사역에 있어서 말씀의 역할 : 여기 3절 말씀에서 창조 사역에 있어서의 말씀의 역할이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첫째,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주장이다.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만물을 창조하는 신적인 역할 수행에 있어서 능동적이셨다. 둘째,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예외란 없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수행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이러한 기록은 고전 8:6에서도 기록되어 있으며, 골로새서 1:16-17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16-17)

 

3. 말씀은 유일하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이 로고스를 이교적인 철학의 이성적인 원리 또는 씨앗으로 해석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이단들이 있다. 심지어 예수도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다.

이 이유는 로고스를 내재적 이성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즉 영이신 성부하나님이 사람이신 예수의 영의 자리에 들어왔다고 하는 아폴로내리우스적인 기독론과 양태론적인 신론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로고스를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실체로 이해하며, 그것을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이해한다.

즉 성육신을 성부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온 것이 예수라고 믿는다. 지금도 지방교회와 같은 이단들은 이런 사상을 갖고 있다.

또한 요즈음 적지 않은 이단들은 하나님이 예수의 육체에 들어온 것과 같이, 재림예수의 영이 그들 교주의 육체에 들어왔다고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