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레신학에 대해서

  • 11월 15, 2020

웨슬레 신학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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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

 

1) 웨슬레신학에 대한 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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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장로교의 신학이나 감리교의 신학에 대해서 모두 정통신학의 범주라고 보며, 다양한 신학적 견해 차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 카페는 장로교의 신학자료가 많이 올려져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삭제를 하거나 비판을 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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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에 감리교가 인간의 의지와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는 비판을 하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웨슬레 조직신학적인 증거를 올리면서 그렇지 않다고 설명을 했지만, 끝까지 그런 글을 올리면서 반박을 하였기 때문에 삭제와 강퇴 조치를 하였습니다. 이 카페는 개혁주의 신학을 올리는 것은 허용하지만, 개혁주의 신학만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카페가 아니며, 끝까지 웨슬레 신학을 잘못된 지식으로 비난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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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신학교수들조차 웨슬레 조직신학책을 한번도 읽지 않고 감리교를 비판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습니다. 장로교는 웨슬레가 인간의 의지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웨슬레조직신학책을 인용할 것인즉 이러한 무지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단들이 인용하는 반칼빈주의 책은 전혀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분량이 제법 많지만, 제가 올리는 글을 정독하면 웨슬레 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론을 하더라도 다른 교단의 신학을 논리적으로 이해하여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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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를 보면 이렇게 설명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올리는 이유는 감리교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네이버 백과에서도 인정하는 상식이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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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칼뱅의 이중예정론을 주된 교리로 내세우는 장로회와 달리, 감리회는 ‘선행 은총(The Prevenient Grace)에 의한 선택권의 회복’을 강조한다. 흔히 감리회 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감리회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권의 발휘”를 주장한다고 호도하는데 자유의지 운운은 당연히 펠라기우스 이단이고, 감리회 신학에서 말하는 선택권의 발휘는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하는 원죄 이전의 선택권의 회복을 말한다.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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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쟁은 500년 동안 있어왔지만, 예정론이 결코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장로교 자신도 이중예정론을 드러내놓고 비난은 하지 않지만, 현재의 예정론은 당시의 타락전선택설의 이중예정론과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현재 어느 누구도 웨슬레안이 다른 구원관을 가졌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아직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지와 함께 자신의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신앙을 고쳐야할 것입니다.

한국에는 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지만, 미국에는 침례교회가 가장 주류이며, 침례교는 캘빈주의도 있지만, 웨슬레안이 더 많습니다. 또 미국의 통계를 보면 카톨릭이 1위, 남침례교회가 2위. 감리교가 3위, 몰몬교가 4위, 하나님의 성회가 5위였습니다. 장로교는 9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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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간은 도르트공의회에서 알미니안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람들도 교회사를 한번도 읽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정확한 교회사를 알아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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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8년 11월13일부터 1619년 5월9일에 끝난 도르트공의회에서, 102명의 네델란드 캘빈주의자와 28명의 외국 캘빈주의자, 그리고 13명의 알미니안주의자가 참석하였습니다. 그들 13명의 알미니안 대표자들은 이미 국가반역죄가 주어졌으므로 발언권과 선거권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도르트공의회에서 알미니안들은 만장일치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들은 항의자(Remonstrations)로 불려졌습니다. 그 회의로부터 예정론을 비판하는 자는 하나님을 비판하는 비기독교인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르트 공의회는 발언권과 선거권이 전혀 없는 13명의 알미니안 대표들을 앉혀놓고, 캘빈의 5대강령을 재확인하며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켈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중예정론의 오류를 덮기 위하여 타락전선택설에서 타락후선택설로 바꾸게 됩니다 (칼빈주의와 웨슬레신학, 한영태, 58-59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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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니우스는 예정론자였으며,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단 한번도 토론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습니다. 알미니안도 그 후계자들에 의하여 자유주의적 알미니안과 복음적 알미니안등 다양한 신학적 견해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웨슬레는 알미니우스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들의 영향도 받았으며, 알미니안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대해서 더욱 강조하였으며 믿음과 은총을 구체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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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주의자로 살다가 죽었다. 아르미니우스의 아르미니안 주의는 펠라기우스가 아니며, 또한 펠라기우스의 어느 부분도 아니다.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과 아주 동떨어진 채, 아르미니안이라고 불리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많은 신학사조들이 있다. 오늘날 칼빈주의의 대부분은 아르미니안화 된 칼빈주의이다. 그것은 복음적이고 선교적이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는 복음적이지도 선교적이지도 않다. 칼빈주의에는 많은 종류가 있는데, 자유주의적 아르미니안처럼 자유주의적인 것도 있다. 신학적 용어로서의 아르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는 둘다 올바른 정의가 없이는 의미있게 사용될 수 없다(칼빈주의와 웨슬레신학, 한영태,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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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 알미니우스에 대해서 잘못 알려져 있으며, 웨슬레에 대해서도 잘못 알려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알미니우스도 인간의 의지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그는 펠라기우스와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알미니우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으며, 인간의 의지와 공로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미니우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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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정교리는 일차적으로 철학적이 아니라 성경적이어야 한다.

2) 예정은 반드시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신적작정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원의 근원이며 원인이다. 인간은 강요받은 선택에는 책임이 없다.

3) 구원은 복음적이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

4)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드는 어떠한 이론도 비성경적이며, 한편으로 인간을 스스로 구원의 창시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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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레나 알미니우스는 당시의 극단적 이중예정론을 비판한 것뿐입니다.

또한 알미니우스와 웨슬레도 신학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시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펠라기우스와 동일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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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웨슬레와 찰스웨슬레는 아르미니우스 사후 약 100년 뒤에 살았다. 그들은 영국 종교에서 두가지 오류의 근원에 직면했다. 그 하나는 자유주의적 아르미니안주의로부터 유래하였고,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칼빈주의로부터 유래하였다. 이것들은 갈급한 심령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고, 국력을 좀먹는 거대한 사회악에 도전할 마음을 일깨우지 못했다. 이러한 잘못에 대한 대책으로 웨슬레 형제는 강력한 성경적 호소에 힘썼다. (칼빈주의와 웨슬레신학, 한영태,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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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에는 나라의 헌법과 같은 “교리와 장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감리교신앙의 기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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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23] 제 9조 사람을 의롭게 하심 :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 우리의 행한 것이나 당연히 얻을 것을 인함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위로가 넘치는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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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 10조 선행

선행은 비록 믿음의 열매요 또한 의롭다하심을 따라오는 것이되, 능히 우리 죄를 없이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위엄하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고 기뻐하시는 바요, 참되고 활발한 신앙으로 좇아 나오는 것인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 같이 선행을 보고 그 활발한 신앙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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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의 구원의 조건은 “오직 예수, 오직 믿음”입니다. 만약 오직 믿음을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단일 것입니다. 개신교가 카톨릭에서 나올 때에 종교개혁자들의 3대 슬로건이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오직 은혜는 유효하고 오직 믿음은 필요없다는 2개 슬로건만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나요? 성경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수백개의 구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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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불구하고 웨슬레안이 인간의 의지와 노력,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러한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하여 몇 개의 조직신학적인 증거를 올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러한 곡해를 하는데 거의 눈감고 귀막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 같습니다.

웨슬레 신학적 내용은 웨슬레조직신학 책을 보아야 알 수 있고, 감리교의 교리는 교리와 장정에 기록된 것이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웨슬레조직신학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 다른 교단 사람이 왜 임의대로 판단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주 좁은 신학적 스펙트럼을 갖고, 자신들의 신학이 아니면 모두 이단이라고 하는 배타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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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는 인간의 행위와 의지, 공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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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레 목사와 이 연회의 회집자들은···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가장 위험하고 가증스러운 도리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즉 우리가 현세에서나 심판시에 칭의나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의 다른 것을 믿는 일은 없다. 그리하여 시간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하지않는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지라도(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선행은 어디까지나 혹은 부분적으로나 또는 전체적으로나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우리의 공로가 된다거나 그 보상이 될 수는 없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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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므로··· 불경건한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는 순간, 그는 행함이 없어도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졌을 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이요, 그 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믿음만 있다면 그는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흉악한 죄인으로서 지옥의 형벌 밖에 받을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길 때 그 시각으로 그는 용서함을 받는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11쪽, 웨슬레의 표준설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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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없다. 내가 바로 이 순간부터 하늘나라로 갈 때까지 의를 행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한다하여도 이것이 내 지난 죄를 보상할 수는 없다.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인간들과 하늘 위에 있는 모든 천사들의 완전하고 철저한 순종도 우리가 범한 단 한가지 죄를 대속할 수가 없다. 인간의 행위로 용서받을 생각을 하다니, 이 얼마나 허망한 생각인가?”(웨슬레, 믿음에 위한 구원, 웨슬레의 조직신학, 한영태,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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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유의지와 선재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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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의 두 번째의 오해는 웨슬레안은 자유의지와 선재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도 엄연한 잘못으로서 그들은 자유의지와 선행은총에 대해서 그 의미를 잘 이해조차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웨슬레 조직신학책을 약 수십권을 갖고 있는데, 그들과 같이 주장하는 책은 단 한권도 없습니다.

웨슬레목사는 Free Grace(값없는 은총)를 주장한 것이지 Free Will(자유의지)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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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단연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장로교 목회자들과 교류를 합니다. 제가 이단연구 모임에서 웨슬레안과 캘비니즘에 대하여 강의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저에게 “자신이 웨슬레 신학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다”라고 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즉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감리교신학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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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선재은총)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싹트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과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과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께 범죄하였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등이다 (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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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나 선행은총은 구원을 하는 방법이나 조건이 아닙니다. 감리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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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은총이 구원에 충분한 은총이 아니듯이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율법도 죄인을 의롭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만 한다. 사람이 자신을 율법의 거울에 비춰보면 볼수록 그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웨슬레의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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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타락하여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웨슬레도 인정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락하고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주장인데 물론 웨슬레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분명하게 동의하고 있습니다. 웨슬레는 이러한 인간을 “자연인”(The Nature Man)이라는 용어로 설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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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은 완전 타락하였고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며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이다. 그는 영적으로 수면상태에 있으며 선악을 분별할 수 없으며 그의 자유의지는 악만을 선택할 뿐이다. 그 자신에게는 어떠한 구원의 능력과 가능성이 없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은 인간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웨슬레조직신학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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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레의 선재은총은 초대교회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의 부르심이 신앙을 결단하는 의지보다 앞서 있다”고 말했으며, 그것이 곧 선재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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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레의 선재은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구원의 조건으로서 선재은총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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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스스로 얻을 수 없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고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구절은 성경에 단 한곳도 없기 때문이다.

3) 또한 이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우리는 전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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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무엇이 다를까요?

웨슬레안은 자연인은 선을 행할 수 없으며,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없다고 가르치며,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미리 주어지는 선재은총으로서, 구원의 조건이나 방법이 아닙니다. 선재은총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선재은총에 대한 그 성경적인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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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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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도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행1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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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행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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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미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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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선재은총은 구원을 받는 은총이 아니며, 혹시라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주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요? 웨슬레 당시에 영국은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도덕폐기론이 퍼져 있었으며, 이중예정론과 혼합되어, 구원파와 같은 사상이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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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멸망당하기로 예정된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지옥에 가기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그것을 거절하느냐 응하느냐는 것을 자유의지라고 정의했고, 그 자유의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책임, 즉 예수를 믿지 않은 책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지옥에 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선행은총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기의 자유로운 의지로 예수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온 인류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며 기쁜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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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성경구절은 멸망당할 사람들이 미리 예정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두가 멸망치 아니라고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늦게 오신다는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구절은 성경이 수없이 많습니다. 만약 구원과 멸망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전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로 몇세기 전의 네델란드의 신학자들은 전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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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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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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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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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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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가능하다면 모두가 진리를 알게 되어서 다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심판을 참으셨습니다.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당할 사람이 미리 다 정해져 있는데 왜 죄인 한명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기뻐하나요? 하나님의 구원은 미리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구절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구절은 수없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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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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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동안 예정론을 비판하지 않았으며, 정통신학적인 구원론으로 인정해 왔기 때문에 개혁주의 예정론에 대한 글을 한번도 삭제하거나 비판한 적이 없습니다. 또 예정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경고와 삭제를 해왔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니다. 그런데 최근에 정확한 지식이 아닌, 웨슬레신학을 곡해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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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은 하나님의 신앙적인 측면입니다. 예정의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믿음은 인간적인 측면이라고 보는 것이며, 믿음의 주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믿음의 주어는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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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신적 측면 : 하나님의 은혜

신앙의 인간적 측면 : 인간의 자유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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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고, 웨슬레안은 사람의 책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 차이는 아주 작으며, 그러나 그 결과는 동일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볼 수 있고,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내가 예수를 믿었으므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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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의 신학적 패러다임을 이해하려면 신앙의 두 측면을 살펴 보아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외적 혹은 위로부터의 신앙적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자유, 즉 내적 혹은 아래로부터의 신앙적 요소이다.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은 오래된 신학적 논쟁 주제요 신학의 패러다임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 기독교 신앙을 담고 있는 신앙체계는 세가지 유형으로 설명되어 왔다. 첫째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체계요, 둘째는 인간 중심의 신앙체계요, 셋째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체계이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체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서, 진정한 신앙을 이루는 일에서 사실상 인간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고 보는데, 이를 대표하는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이다. 인간 중심의 신앙체계는 그 반대로 신앙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인간 안에 내재되어있는 본성을 통해 발현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대표하는 신학자에는 펠라기우스와 소시너스가 해당된다.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체계는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협력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대표하는 신학자는 세미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라고 할 수 있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김용복, 하기서원, 377-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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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며 “강제적 폭력의 길보다는 섬기는 종의 길”을 선택하시는 분이다. 그 바람에 하나님은 “인간적 자유에 의해 자신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거부될 수 있는 모험”을 “감수”하신다. 인간은 로봇이나 꼭두가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화상대로 계약의 파트너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은 은혜와 자유가 만날 때 형성된다…. 에릭슨은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응답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응답하도록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는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다.(회중주체적 조직신학, 김용복, 하기서원, 402-4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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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과 웨슬리가 똑같이 주장하는 바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인간의 자연적인 의지(natural free-will)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견해의 일치를 본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고 인간에게서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없다는데 칼빈과 웨슬리는 동의한다.

모든 선은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하는데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것도 인간의 공로나 선행이 아니고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free-grace of God)라는 점에서 웨슬리신학은 칼빈신학과 공통의 견해를 견지한다. 특별히 웨슬리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칼빈주의에 대한 지나친 비난은 온당치 않다는 태도의 변화를 보이고 자기의 주장과 칼빈주의는 머리털 하나의 차이밖에 안되며 견해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것을 멀리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술회한다.

칭의와 성결에 관하여 웨슬리가 강조하는 것을 본 당시의 교계는 그가 선행으로 성화되는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이에 답하기 위하여 웨슬리는 1763년에 “구원의 성서적 방법”(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를 통해 구원이 인간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며 성결의 은총도 믿음으로만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믿음만이 구원과 성결의 유일한 조건인 것을 밝힘과 동시에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든 인간은 구원으로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칼빈과 대립을 보이고 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웨슬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의지라는 점에서 칼빈과 차이를 보인다…….

웨슬리가 인간의 책임과 결단을 촉구하는 것은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도덕폐기론자(또는 반율법주의자, Antinomianist)의 사상으로부터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경험적으로 볼 때도 인간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라는 주장을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덕폐기론자들은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니 선을 행한다든가 법을 지키는 일이 무의미하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 똑같이 해당된다고 하는데, 이에 반대하여 기독교와 윤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웨슬리의 입장이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말하는 죄론(罪論)이나,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구원론에 있어서 웨슬리의 입장은 칼빈과 일치한다. 다만 극단적인 예정론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에 반대하며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결단과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이다.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레의 자유의지론, 목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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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악이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거스르면서 세상에 악이 들어왔을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자가 아닐 것이다. 악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세상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악조차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나는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저서들을 뒤적이면서 수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추구하였다.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명석한 일부 시도들을 발견했지만 아직도 만족스러운 답변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하여 우리가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해결책은 그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언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듣는다.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세상이 들어왔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죄의 장본인이다”. 물론 이러한 진술은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설명과 일치한다(알기쉬운 예정론, R.C.스푸룰,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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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적 은혜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모두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며 또 거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중생의 은혜가 그 목적을 이루는데 실패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도 아직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은혜를 거부하기 위한 모든 일을 다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번번이 거절하는 마음이 완악하고 목이 곧은 백성들의 역사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고 또 거절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항가할 수 있는 은혜이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다, 그 은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유효적 은혜(effectual grace)라고 부르겠다.(알기쉬운 예정론, R.C.스푸룰,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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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그 자유적인 선택을 인정합니다. 웨슬레안은 그 자유의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자유의지로 믿음을 거절하므로서 그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현재의 개혁주의는 구원과 멸망을 동일한 예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멸망당하는 자들에 대해서 유기론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멸망받을 사람들의 불신앙을 그대로 유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심판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타락후 선택설이 과연 웨슬레안과 무엇이 다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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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레는 타락하여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재적인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응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재은총은 구원의 기회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지 이 자체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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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선이 무엇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 속에 부분적으로 다시 하나님의 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과 동시에 내면의 율법인 도덕법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하셨다. 이것이 선행은총이다. 어느 정도 회복된 도덕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행은총이 작용한 결과이다. 선행은총이 구원의 충분한 은총이 아니듯이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율법도 죄를 깨닫게 하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만 하지, 죄인을 의롭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하지는 못한다”(존웨슬레와 감리교신학, 김영선, 대한기독교서회,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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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은총으로 우리는 선과 악을 택하는 자유, 즉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자유의지는 단순히 의지의 작용이 아니고 인간 영혼의 한 속성으로 각 영혼의 정서와 이성, 그리고 의지를 관장하는 능력이다. 이 자유는 인간의 영혼의 본성에 속하며 모든 인간 – 신자이간 불신자이건 – 이 본성을 가진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행은총에 의하여 회복된 것이다. 선행은총에 의하여 회복된 의지의 자유와 유용에 따라 선악의 행위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자기 행동에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 인간은 강요받은 선택에 책임지지 않는다.” (존웨슬레와 감리교신학, 김영선, 대한기독교서회,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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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신조에서도 자유의지에 의한 타락을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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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항 자유의지에 대해서

1)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의지를 부여하셨는데, 이 의지는 본성상 자유하다. 따라서 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억지로 선을 결정하거나 억지로 악을 결정하지 않는다. 자연의 필연성이 아무리 강해도 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제할 수 없다.

2) 인간은 무죄했던 상태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의지할 수도 있고 행할 수도 있는 자유와 능력을 소유했었으나 이와는 정반대의 가능성도 소유했었으므로 그는 타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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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선악과의 과일을 먹은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자유의지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시면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좇지 않고 그것을 먹은 것이 원죄이며, 인간의 타락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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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신 이스라엘은 왜 범죄하고 타락했습니까? 이스라엘의 계속된 범죄와 타락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선지자와 사사들 때로는 천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했을까요? 이스라엘의 범죄와 타락은 하나님의 예정이었을까요?

이러한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게 됩니다. 알미나우스와 웨슬레는 이것을 비판한 것이며, 결코 인간의 의지와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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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자유의지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없다는 학자들도 간혹 있었지만, 내부에서도 신학적 비판이 있었으며, 종교나 철학이나 신학에서도 자유의지를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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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나 나는 그 용어를 사용하기 싫다. 다만 인간은 그 공정한 선택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강요에 악한 의지로 행동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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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 선재적 은총은 의지를 움직이며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벼운 폭력으로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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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인그루뎀: 인간은 가장 위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그 어떠한 피조물보다 자유하다. 우리는 의지적인 선택을 할 수 있고 이 선택은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 우리가 운명론이나 결정론에 빠져 우리의 선택이 어쨋든 상관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유의 섭리와 통제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자유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완전한 다스림을 부정하는 완전한 자유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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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벌콥: 세계 안에는 자연세력이나 인간의지와 같은 원인들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고무하시며 매순간마다 동행하시며 또한 이 행동을 효과있게 하신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한부분을, 인간이 다른 한부분을 분담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며 하나님은 그의 모든 창조물과 합력하시며 그들의 일을 정확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선을 위하여 악을 제압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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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래이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우물 속에 있는 밧줄과 같다. 표면에서는 그것들이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우물 바닥의 어둠 속에서는 함께 올라온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적인 선재은총의 증거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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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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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도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행1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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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미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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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행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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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구원과 멸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성경적 증거는 있을까요?

성경은 사람에게 자유로운 선택이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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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 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3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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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 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으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삿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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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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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는 함께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그 의지대로 선택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곧 그 사람 자신의 선택과 책임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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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음 두가지에 동의하여야 합니다

(1)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2)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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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가지 사실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 두가지 개념을 서로 반대라고 안식하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로운 선택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사역에 있어서 그의 뜻대로 역사하시고 섭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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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여야만 이론이 성립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과 멸망을 모두 미리 정하셨으므로 인간에게 그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해야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중예정론의 아킬레스건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유의지가 없다고 한다면, 구원과 멸망의 일차적인 책임은 모두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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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자로 유명한 스푸룰은 이중예정론을 반칼빈주의라고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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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적 운명은 예정론에 대한 칼빈주의적 견해나 개혁주의적 견해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초칼빈주의(Hyper-Calvinism)라고 부른다. 나는 오히려 이것을 준칼빈주의(Sub-Calvinism), 아니 차라리 반칼빈주의(Anti-Calvinism)라고 부르겠다.(알기쉬운 예정론, R.C.스푸룰,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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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예정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믿음의 주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 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믿지 않도록 운명지어 놓은 것이 아니며, 그 사람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통치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악을 조장하시거나 불의하신 분이 아니며,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예수를 믿을 자를 구원으로 예정하고 인도하십니다.

동일한 로마서에 아래와 같은 서로 다른 두가지의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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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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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즉 예정하시는 하나님과 믿어야 하는 인간의 주어(主語)적인 차이라고 봅니다. 구원이라는 결과는 같지만, 주어적인 입장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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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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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구원하실 자를 미리 정하시지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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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성경에 A라는 견해가 있고, B라는 견해가 있을 때에. A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성경은 만인구속을 말하는 구절도 있고, 제한구속을 말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성경구절만을 제시하며 제한구속만이 옳다고 하는 주장은 성경적이라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며,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가 오셨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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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차이점은 웨슬레안은 믿음을 인간의 책임으로 봅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며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웨슬레안이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장 성경적인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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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레는 거듭남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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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중생할 수 있는가? 웨슬리는 요한복음 3:8의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중생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구체적으로 중생이 되는지 웨슬리에 의하면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생의 과정은 신비한 영역에 속하므로 어느 누구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중생은 성령의 사역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웨슬리신학에서는 인간 측에서 어떤 수단들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중생의 방법은 없고 다만 하나님의 은총에 이해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인간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까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존 웨슬리와 감리교신학, 김영선, 대한기독교서회,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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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믿음으로 칭의되고, 중생하고, 그리고 성화되어 구원을 얻지만, 그 믿음은 계속되어야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웨슬레는 예정된 자의 구원이 아니라, 믿는 자의 구원을 강조하면서 신앙의 현재성과 계속성을 강조한다”(웨슬레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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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내주한 거듭난 자의 구원이 취소된다는 것이 아니고, 신자(信者)의 믿음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현재성과 계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믿음을 인간의 책임으로 끄집어낸 것이 예정론과 다릅니다.

웨슬레는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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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도 구원도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어느 것도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요, 분에 넘치는 선물이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이 즐거이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한가지 실증이요,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실증이다(한국웨슬레학회, 웨슬리설교전집, 1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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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가짐과 동시에 웨슬리는 믿음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다. 즉 믿음은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회심 이전의 믿음은 인간 자신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기본 개념을 가지고 있던 웨슬리가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신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며, 따라서 구원은 오직 은혜로, 그리고 그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성서적 진리를 체험으로서 확신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믿음을 낳거나 만들 수가 없다. 오직 은혜는 구원의 근원이요.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다. (웨슬리의 조직신학2권, 한영태, 성광문화사,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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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군가를 믿으라고 할 때에 우리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에게 주시려고 하는 신앙을 가지라’라는 말이다. 분명히 믿는 것은 인간의 행위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힙입지 않고 믿는 자는 아직 한사람도 없기 때문이다”(웨슬레의 조직신학2권, 한영태, 성광문화사, 53쪽, 웨슬레의 편지 7:36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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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는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인지요? 아니면 둘 중에 하나만 필요하다는 것이 맞는지요? 가르치지도 않는 인간의 공로와 의지를 구원의 조건이라고 만들면 안됩니다.

웨슬레 신학에서 인간의 의지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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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은 단지 인간적 성취가 아니다. 수세기를 통해서 인간적 요소를 잘못 강조하는 중생에 대한 여러 견해가 주장되었다.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초대교회의 이단은 중생을 인간의 의지와 한 행동으로 간주하였다. 중생은 진리에 의해, 지성의 예증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의 삶을 단지 모방함으로서 성취된다고 말했다.”(웨슬리안 조직신학, 세복, 오튼 와일리, 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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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레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을 모두 인정합니다. 알미니우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구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절대적으로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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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에서 이중택일의 원리를 적용하지 아니하고 양자를 택하고 창의적으로 종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의 주도권을 인간의 책임에 두기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에 둠으로서 인간은 그의 의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존웨슬리와 감리교신학, 대한기독교서회, 김영선, 156-1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