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의 용어의 형성과 발전 과정

  • 6월 17, 2016

                                         삼위일체의 용어의 형성과 발전 과정

                                                                                                                                                             이인규

  

 

                                                   

이단들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은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한 식이라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용어도 성경에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그 용어는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정통삼위일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여호와의 증인을 위하여 아주 쉽게 설명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해보아도 그들에게는 소귀에 경읽기일 뿐일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적인 내용보다 그들의 교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의 교리가 성경의 내용과 다르면 성경을 다르게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3에서 휘포스타시스”(confidence essence, nature, person)라는 단어가 나타나는데 이 단어의 뜻은 본질, 본체, 실체, 실상이라는 뜻을 갖는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의 휘포스타시스(본질)인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은 동일하며, 이 단어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탄생하게 한다.

                                                             

[개역]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휘포스타시스)의 형상이시라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공동번역]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표준새번역]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현대인의성경]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KJV] 1:3

Who being the brightness of [his] glory, an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 and upholding all things by the word of his power, when he had by himself purged our sins, sat down on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NIV] 1:3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RSV] 1:3

He reflects the glory of God and bears the very stamp of his nature, upholding the universe by his word of power. When he had made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또한 히브리서 외에도 빌립보서 2:6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 본질임이 기록되어 있다.

                                       

[개역성경]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몰프헤)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공동번역]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2:6에서 몰프헤라는 단어는 휘포스타시스와 동일한 뜻을 가진다. 본체, 본질, 형상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에서 동등하다는 결론을 갖는다.

                                                                     

삼위일체에서 삼위는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발전되어짐에 따라 세 인격(위격, person)이라는 의미가 되어진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다. 그러나 성자도 한 휘포스타시스이고 성령도 한 휘포스타시스이다. 즉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 이러한 용어에서 처음에는 본질과 인격이라는 단어가 혼동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 인격(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인격(위격)은 동일한 한 본질(본체)을 공유한다.

실제로 고전적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본체와 본질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혼동을 일으켰다.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는 셋에 존재한다는 의미로서, “위격(인격)”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어가게 되는데, 헬라어가 라틴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서방의 교부들, 특별히 어거스틴은 이 휘포스타시스라는 헬라어를 번역함에 있어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 용어적인 차이에서 양태론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진다.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가면, 얼굴이라는 의미도 있었는데, 한 배우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연극(일인다역)을 한다는 뜻에서 양태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가 페르소나로 번역되고 위격이라는 의미가 되자,  본질을 뜻하는 용어는 우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고동방교회에서는 한 우시아(본질)에 세 휘포스타시스(위격)가 있다라고 정의되었고, (미아 우시아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 서방교회에서는 한 숩스탄시아에 세 페르소나가 있다고 정의가 된다.(우나 숩스탄티아 트레스 페르소나)

후에 페르소나는 영어로 person 이 되고 우시아는 essence로 번역되어진다. 서방교회에서는 휘포스타시스 페르소나’(헬라어 프로소폰)라고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양태론적인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 초대교회사적인 문헌에 많이 나타난다. 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했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였는데, 로마사람들에게는 우시아가 잘 이해되지 않는 언어였고, 헬라사람들에게는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터툴리안이 가장 먼저 사용하였으며, 그는 One subtance, Three persons 라는 용어로 사용하게 된다

초대교회는용어적인 혼란으로 인하여 교회는 용어적인 개념을 정립시킬 필요를 갖게 된다. 그래서 헬라어 휘포스타시스는 라틴어 페르소나와 동일어라는 결정을 하게 된다. 한 본질(우시아, esence), 세 인격(페르소나, person)이라는 용어가 정립되어진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One essence, three persons 를 말한다.

                                             

물론 양태론은 이단의 비성경적인 주장이었으며 단 한번도 정통신학이었던 적은 없었다. 단일신론 역시 초대교회부터 이단의 비성경적인 주장이었듯이 말이다.

정통신학은 항상 이단들이 먼저 나타났고, 그들을 반박하기 위한 과정에서 정통신학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단들과 성경적인 근거로 토론을 했고, 토론에서 패한 자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어 도태되어 간 것이다. 현재에도 이단들이 조작을 하듯이 정통신학은 인위적으로 탁상공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목숨을 걸고 이단에 대항하고 토론을 하여 정립된 것이었다.

                                                  

교회가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는 동의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은, 어거스틴이 죽은지 반세대가 지난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에서였다. 이리하여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에 휘포스타시스의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성격을 포함시키는 길을 열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이 위격들을 존재양식이라고 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영구성이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어휘선택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어휘는 그를 사벨리우스주의로 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이것은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얼굴이나 가면을 뜻하기 때문에 삼위가 한분 하나님의 세 얼굴로 이해되어 결국 양태론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역주)”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8)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는 무엇이 동일한가?

우시아라고 하는 본질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그 안에는 신성(데오테스, Godhead)의 모든 충만(플레로마, Fullness)이 육체로 거하시고…”(2: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플레로마)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1:9)

물론 신성(데오테스)과 본질(우시아)은 단어가 다르며 그 개념도 좀 다르다. 그러나 성경본문에서 신적본질은 곧 신성으로 이해되어진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공유하는본성의 단일성은 바로 신적본질이며 신성을 뜻한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이 아닌 유사본질이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보다 열등한 것이라고 볼 것이다. 즉 신성과 신적본질을 다르게 보는 그들의 용어는 우리와 전혀 다르다.

영국국교회 신앙신조 제 1조는 이 신성의 하나됨 안에는 한 본체, 권능, 영원성을 가진 세 위격이 있다로 되어 있으며,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에는 신성의 하나됨 안에는 한 본체, 권능, 영원성을 가진 세 위격이 있다라고 되어있다. 즉 하나님을 우시아”(신적본질)로 볼 때에는 하나이지만, “페르소나”(인격, 위격)로 볼 때에는 셋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본질을 신격(Godhead)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칼케톤신조는 예수의 본질을 신성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으로 완전하시며(teleion), 그는 실제로 하나님이시며 또 실제로 사람이시며, 합리적인 영혼(Psyches logikes)과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신성에 관한 한 그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타고 나셨고 또 그의 인성에 관한 한 그는 다만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성경적인 내용에서 볼 때에 삼위의 인격은 동일하지 않으며 상호관계를 갖을 수 있었고 또 서로 구별되어야만 했다.또한 삼위의 역할과 기능은 모두 다르다. 또 정통삼위일체에서 질서적인 종속까지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신적본질이란 무엇일까?

즉 성부도 하나님이며 예수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즉 동일한 신적본질을 공유한다. 그러나 인격적으로는 성부는 성령이 아니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다.  

인격과 역할과 기능은 모두 다르며 삼위는 서로 상호교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과연 정통신학에서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는 것을 부정하는가? 성자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정하는가 당연히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당연히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예수님은 그것을 몸소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 역할과 기능은 모두 다르다.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보다 크다는 것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등하다는 것은 신적본질을 의미한다

요한복음175절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라고 말한다. 비록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지 않고 종의 형체(성육신)로 오신 예수님이지만, 그가 창세전에 가졌던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그 영화이었다.

또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1:3의 영어성경은 RSV(그의 본성, 그대로의 각인)이며, NIV(그의 존재의 정확한 표현), KJV(그의 인격상의 표현)이라고 번역된다. 즉 예수는 하나님아버지의 본체에게서 나온 하나님이고, 그의 본체는 아버지의 본체라는 것이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정리된 아타나시우스의 니케야 신조가 된다.

사람에게 본질은 열명이 있다면 열명이 다 다르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그 본질이 다르며 또한 그 인격도 다르다. 그러나 삼위하나님에게 그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그러한 동일본질이라는 용어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쌍둥이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한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성경구절은 많다. 성령과 하나님이 동일시된 성경구절도 많다.

더욱이 아래의 성경구절은 하나님과 예수의 신적본질이 동등하다는 결론을 표출시킨다. 즉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삼위의 인격은 구별되어지며 상호교류를 하고 있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피송하고, 성자는 성령을 파송하며, 성자는 성부께 기도를 하고, 성령은 성자의 것을 기억나게 하며 가르치게 된다.

그런데 본질은 동일하며 신성 또한 동일하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동일한 본질인가?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동등하다는 구절은 있고, 성부하나님과 성령이 동일시되는 구절도 있는데, 그렇다면 성자와 성령도 동등하다는 뜻이 있는가?

더욱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성령은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며,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려지기도 하며, 예수의 것으로 오셔서, 예수를 증거하며, 예수가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할 것이요.”(15: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6)

                               

다음 구절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과 성령,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구별이 사실상 없다.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은 같다. 그러나 성부하나님과 성자예수와 성령은 다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9-10)

 

삼위일체에서 일체는 본질의 동일성을 뜻하며, 그러나 삼위의 인격은 상호구별되며 상호교류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삼위의 인격적인 구별과 함께 기능, 역할에서도 구별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느니라”(2:18)

“For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by one Spirit.”


예수님과 성령님, 그리고 아버지라는 세 인격적 관계와 그 각각의 사역이 잘 언급되어 있는 구절이다. For Jesus Christ(말미암아), by Spirit(의하여), to Father()를 의미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이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이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4-6)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28:19)


위 본문은 삼위를 말하지만, 이름은 단수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만일 하나님이 한 분, 한 인격이시라면 왜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하고 있을까? 이것은 상호 독립적인 관계성을 말한다.

실제로 양태론자들은 이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지 않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4)


윗문장은 믿는 성도들과 함께 서로 교통하는 삼위의 관계를 말하는 구절이다.

또 아래의 본문은 성도들과 삼위의 사역적인 관계가 각각 구별되어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리심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벧전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