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가 주기도문을 거부하는 이유

  • 7월 06, 2015

                   구원파교회가 주기도문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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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가 주기도문을 채택하지 않는 첫째 원인은 자신들의 교리가 주기도문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과 같이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다.

 

“주기도문은 기도문의 한 예로서 가르쳐 주신 것이지 그대로 암송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파의 주장과 달리,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기도문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유대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로 드리는 정형화된 기도문을 갖고 있었다. 이것을 “테필라”라고 부르는데, 6개의 조항으로 만들어진 기도문인데, 후에 12개 조항이 추가되어 18개의 조항으로 만들어진 기도문이라고 한다. 이 테필라 기도문은 오후 3시에 전국적으로 암송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유대교와 같은 기도문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 이러한 사실을 예수께 고하며,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즉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인 것이다.

 

구원파들이 주기도문을 거부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교리와 상반되기 때문이다. 구원파는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죄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소위 칭의를 잘못 해석하고, 성화라는 과정을 부인하며, 자신들의 교리적인 깨달음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으로 가르친다.

다시 말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신분적, 법적인 개념을 착각하여, 실제로 죄가 없는 의인이 된 것이라고 믿으므로 회개를 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일생에 단 한번 단회적인 회개를 한다고 가르치며, 특히 박옥수는 회개를 반복한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므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적인 회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구원파에게 이 성경을 질문하면 답변을 하지 않고 침묵한다.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17:4)

그런데 주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다시 말하여 단회적인 회개를 가르치며, 더 이상 죄가 없다고 가르치는 구원파로서는 주기도문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모든 죄사함을 받았고, 이미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회개를 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구원파로서는 난감한 일이다. 예수님이 잘못 가르쳤다고 할 수도 없고, 자신들의 교리가 틀렸다고 인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준 기도문을 부정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면서 이미 목욕을 하여 온 몸이 깨끗한 사람도 발을 씻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사도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구원파는 위 본문이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라고 한다. 또 본문은 회개를 하라는 것이 아니며 자백은 하라는 것이라고 변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죄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진리가 없는 자라고 말하지 않는가?

위 성경본문이 죄가 없는데도 자백을 하라는 뜻인가? 죄가 없는데도 죄가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사귀라는 것인가? 성경이 신앙의 객관적인 기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만 할 것이 아닌가?

구원파의 주장대로라면 위 요한일서를 쓴 사도요한은 구원을 받지 못하여야만 한다. 또 구원파의 주장대로라면 다윗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으니 지옥에 가야만 한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1-4)

 

이제 구원파의 주장을 따르자면 죄가 있다고 고백하는 사도바울조차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3)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준 기도문을 부정하는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인가? 성경의 기자인 사도요한과 사도바울, 그리고 다윗을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조차 모르는 것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는 교회가 과연 성경적인 교회인가?

 

믿음으로 의롭다하고 불러주시는 것이 곧 “칭의”라고 한다

“칭의”(Justification)는 내가 죄가 완전히 없어져서 실제적으로 의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칭의는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소위 신분적, 법적인 의인을 말한다.

내가 어떤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갔는데, 피해자와 합의를 하여 석방된 상태를 칭의라고 한다. 실제로 칭의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디카이오마”인데 그 단어에서 파생된 “디카이오시스”라는 헬라어는 헬라 법정용어로서 “무죄석방”을 뜻한다. 그 대속금을 예수님이 지불하셨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 신분상, 법적상 무죄석방된 것이다.

이러한 값없는 은혜를 바꾸어서 온전한 의인이 된 것으로 주장하며, 죄가 없으므로 회개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는 도대체 무엇인가?

 

더욱이 이러한 엉터리 비성경적인 교리를 깨닫는 시간이 거듭나는 것이며 구원을 받은 날짜라고 가르친다. 더욱이 다른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며, 게다가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하므로서 다른 교회로 갈 수 없도록 미혹을 시킨다.

이 외에도 구원파는 삼위일체를 양태론적인 이단적인 주장으로 가르친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한 인격인데, 시대를 바꾸어서 세가지 양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즉 성부하나님이 예수로 오셨고, 예수가 성령으로 오셨다는 양태론이다. 한분 하나님이 다른 모습으로 오셔서 세가지 사역을 하셨다는 주장이다.

기독교의 정통삼위일체는 본질로서는 한분이지만 인격으로는 상호구별되며 상호교류가 가능한 세분이어야만 한다. 성경은 삼위하나님이 동시에 공존하는 언급이 있으며, 성부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며, 성자가 성부께 기도하는 상호구별되는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기도문을 거부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들이 가르치는 양태론적 이단적 주장과 다르기 때문이다.제자들과 지상에 계셔서 사역하였던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고 기도를 하라고 가르친 것에 대해서 양태론으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