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뢰아 김기동목사의 황당한 주장들

  • 7월 02, 2015

                          베뢰아 김기동목사의 황당한 주장들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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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 성락교회 김기동목사는 성경을 거의 자신의 임의대로 추측하고 상상하여 해석을 하며, 베뢰아 교리를 만들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추리신학이라고 부른다. 추리소설을 빙자한 용어이다.

필자는 베뢰아원강이라는 책을 입수하여 그 책을 읽으면서 김기동목사의 주장을 살펴 보았는데, 그동안 밝혀진 베뢰아교리는 물론, 그 외에도 너무나 황당한 교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런 황당한 주장들에 어떻게 적지 않은 목사들까지 미혹되었는지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든다.

                                           

1)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아브라함의 집에 이삭을 통하여 영적으로 함께 계셨다.

                                                

하나님의 교회같은 이단들은 이삭을 하나님, 예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김기동목사에게 그러한 주장과 유사한 내용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하나님이 오신 표적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삭이 예수가 영적으로 나타난 것인가?

                                   

예를 들어 성경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르면 내가 네게 오리나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백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네게 오리라고 할 때에 오신다는 그분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분이 확실히 내 집에 오셔서 내 집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영적으로 알게 됩니다. 성경전체의 흐름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하나님아버지로부터 아브라함의 집을 통해 세상에 오셨다가 하늘로 가신 것입니다. 성경을 잘못 보면 아브라함 이야기만 하다가 맙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셔서 아브라함의 집을 하나의 터널로 삼으시고 하나님 우편보좌에 오르신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베뢰아원강, 159)

                                                                

– (24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오시는 표적이 바로 이삭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서 독자를 바쳤을 때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독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삭의 출생과 더불어 언약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왔고, 그 후손 속에 계속 머물다가 드디어 마리아의 몸에서 육신으로 현현하신 것이다. 육신으로는 아브라함보다 훨씬 후에 마리아의 몸에서 나타나셨지만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고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날 때부터 아브라함의 가정과 그 후손 속에서 영적으로 함께 하신 것이다.(베아 15:3, 베뢰아원강, 161)

                                                                  

18: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교회도 이 성경을 잘못 오역하여 사라에게 아들이 있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 베뢰아에서 안증회와 같은 황당한 주장을 할 지는 꿈에도 몰랐다. 안증회에서는 하나님이 사라의 아들, 이삭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번역과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돌아올 때에 이미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을 알 수 있다.

                                                                                                

[공동번역] 이 야훼가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느냐?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에 내가 다시 찾아오리라. 그 때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나 여호와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 내년 정한 때에 내가 너에게 돌아올 것이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KJV] Is any thing too hard for the LORD? At the time appointed I will return unto thee, according to the time of life, and Sarah shall have a son.

[NIV] Is anything too hard for the LORD? I will return to you at the appointed time next year and Sarah will have a son.”

                                                                                  

사라의 아들 이삭은 하나님이 오시는 표적도 아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오실 때에 그 때에 사라는 이삭이라는 아들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오기 전에 사라가 이삭을 낳는 것이 순서적으로 먼저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나이가 많아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사라에게 태를 허락하여 아들 이삭을 낳게 해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삭이 곧 여호와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데,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난 다음 성경구절을 제시하면 답변을 하지 못한다.

                                                                                  

26: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2) 하나님을 부르면 육체의 복과 구원을 받으며, 예수를 부르면 영혼과 육체를 모두 구원받는다는 주장.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자는 육체마다 복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구약사람은 육체의 복과 육체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영혼과 육체 모두 구원 받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여호와 이름은 심판하는 이름이지 구원하는 이름이 아닙니다(베뢰아원강, 195)

                              

한마디로 기가 막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사이비집단들의 주장과 유사하다.

김기동목사는 하나님을 부르면 육체의 구원을 받고, 예수를 부르면 영혼과 육체의 구원을 받는다고 구별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호와하나님을 믿던 구약의 성도들은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가? 구약의 성도들은 육체만 구원을 받았고, 그 영혼은 천국에는 없다는 것인가?

                                    

3) 무소부재를 어느 곳에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미친다고 해석하는 김기동목사.

                                     

– (320)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만약 무소부재를 말 그대로 안계신 곳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지옥에도 계시다는 뜻이 되고만다.(베뢰아원강, 202)

                                      

무소부재(편재)라는 것은 어느 곳이나 계신다는 것을 뜻하며, 장소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일학교 학생들도 아는 이러한 용어를 왜 김기동목사는 다르게 해석하는가? 영광이 마치지 않는다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편재, 무소부재를 부정하는가?

김기동목사는 아래 성경을 읽어보지 못한 것 같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39:8-10)

                      

4) 하나님의 뜻은 천사에게 우선권이 있으므로, 사람의 의지는 천사에게 양보하여야한다는 주장

                                                              

– (393) 사람의 의지는 때로 천사에게 양보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뜻으로는 사람보다 천사에게 우선권이 있다. 천사는 하늘로부터 온 심부름꾼이다. 인간은 땅에 있고, 천사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왔기 때문에 사람은 천사에게 의지를 양보해야 할 때가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의지와 천사의 의지 사이에서 인간은 천사에게 자신의 의지를 양보해야 한다(베사 2,4)(베뢰아원강, 248)

                                 

김기동목사는 아래 성경구절을 하늘로부터 온 천사에게 인간은 의지를 양보하여 다른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해석하는가?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전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5) 사람만이 영적인 존재이므로 생령이 되었다.

                      

창세기27절에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흙으로 모양을 만들고가 아니라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입니다. 사람을 지으시고 거기에 생기를 부어 생령, 곧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생기를 부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곧 영을 부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만 특별히 생기를 부어 영적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동물의 모양을 만들고 동물에게 생기를 부은 것이 아닙니다. 동물은 그냥 동물로 만드신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생기를 붓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이 생령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에게만 생기를 부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베뢰아원강, 268)

                     

사람이 영적존재라는 것은 옳다, 또한 생령(네페쉬하야)라는 단어는 생명체라는 뜻이며, 동물에게도 생령(네페쉬 하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결국 이러한 김기동목사의 자의적인 주장은 이중아담론이라는 해괴망칙한 해석을 낳게 된다.

김기동목사의 주장과 달리, 성경을 보면 사람만 생령”(네페쉬 하야)이 된 것이 아니라, 짐승들도 동일한 네페쉬 하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1:21, 1:24, 1:30, 2:19)

만일 생령을 영적인 존재로 해석하려면, 짐승들도 모두 영적인 존재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하이 네페쉬: Living Creature)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2:19)

          

생령이라고 번역된 네페쉬 하야는 살아있는 영이 아니라, 전인적인 “Living Being”이라는 생명자체를 말한다. 흙으로 지음을 받고 하나님이 불어 넣어주신 생기를 가진 전인적인 존재가 바로 아담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네페쉬 하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1:24)

                    

네페쉬 하야(생령)는 창1:20(생물), 1:21(생물), 1:30(생명), 2:9(생물)에서 짐승에게 사용되었다. 그것을 영적존재로 해석하여야 하는가?

김기동목사는 하나님께서 짐승과 같은 사람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 영적존재가된 것이 아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령이라는 단어는 짐승을 포함하여 생명체를 뜻한다.

또한 사람에게 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만, 사람만이 유일한 영적존재라는 것은 매우 이상한 주장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천사는 영적존재가 아닌가?

                    

6) 김기동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육체가 없는 영적 존재인 천사와 사탄도 인격이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과 성령도 육체가 없으므로 인격이 없는가? 또한 사람이 죽으면 사후영혼은 인격이 없게 되므로 의식적인 활동을 할 수 없으며 결국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이 된다.

                       

이 우주 안에서 만들어진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유일하게 영적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늘로 돌아갑니다. 영적인 영원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혼은 육과 함께 있다가 육이 죽으면 혼비백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영이 있기 때문에 혼이 흩어지지 않고 영에 잠재하게 됩니다. 이처럼 영이 혼과 함께 있어서 영혼입니다. 육만으로도 인격이 안되고 혼만으로도 인격이 안됩니다. 인격은 육이 있을 때만 존재합니다. 육이 없으면 인격은 없어집니다. 그런데 영이 부여되는 바람에 육이 없어져도 혼이 영과 함께 있으므로 인격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베뢰아원강, 271-272)

                      

김기동목사는 자신의 병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 순간 모두 고침을 받지만, 남이 들어와서 만든 병은 치료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김기동목사는 모든 병의 원인은 귀신 때문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는가모든 병은 귀신때문이라고 가르치던 김기동목사에게 자신의 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아래 주장이 과연 성경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의 주장인가 아니면무속종교의 주장인가

                  

– (446) 영은 항구적 존재다. 어떤 사람은 영이 인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격은 혼이고 몸과 함께 있을 때를 말한다. 따라서 영이 인격이라면 사람 속에 혼인 인격과 영인 인격, 두 인격이 들어있다는 말이 된다. 영은 인격이 아니고 항구적 존재, 영원한 존재다. 저주는 예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죄인인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순간에 예수가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 저주는 모두 사라집니다. 내 병은 다 없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예수믿고 고질적으로 앓던 신경통이 다 나았는데 다른 병은 안 나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 자기 병은 예수께서 담당하셨으니 없어졌고 남이 들어와서 만든 병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기 전에 자기에게 부여된 저주가 현실화된 병은 예수를 믿으므로 그가 다 담당하셨습니다. 가난해야할 사람이 부유해지고 병들어야 할 사람이 병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들어와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쫓아내야 합니다. 신자는 구원받았으므로 영은 깨끗합니다. 그러나 육체는 언젠가 죽습니다. 육체는 죽으면 사라지고 영혼은 분리되어 낙원으로 갑니다. 그런데 귀신은 머물러 있어야할 육체가 없으니 다른 사람의 육체로 옮겨 들어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서 다시 그 병을 일으킵니다(베뢰아원강, 283-284)

                      

7)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120년 생애를 채운다는 주장

                     

만약 어떤 사람이 두 살 때 죽었다면 그는 귀신으로 백십팔년 정도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다 만수가 되면 자연히 무저갱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을 때 늙어서 죽었다는 귀신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병들어 죽거나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16장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가 병들어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연락하며 편히 사다가 죽었고 죽어서 음부에 갔습니다. 무저갱은 음부 안에 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속에 들어갔지만, 부자는 음부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가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아직 불속이 아닙니다. 불못이 아니라 불꽃입니다.(베뢰아원강, 287-288) .

          

사람의 생명이 120년이라는 성경적인 주장은 없다.

또 불못과 불꽃을 다른 장소로 주장하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 불꽃은 불(Flame) 자체를 말하며 불못은 불이 있는 장소를 말한다. 불못에 불꽃이 있는 것이 아닌가?

부자가 불꽃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었다면, 그곳이 불못이 아니라면 부자는 촛불로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육체가 없어지면 그 사람의 영은 낙원에 가지만, 귀신은 제삼자에게 들어갑니다. 옛날에는 인간이 천년 가까이 살았는데 노아때부터 인간의 수명은 백이십년으로 제한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의 수명은 평균적으로 백이십년입니다. 이는 예수 당시의 자연수명입니다. 불신자가 자연수명을 마치고 죽으면 무저갱으로 갑니다. 그러나 자연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으면 나머지 기간은 음부에 머물렀다가 마침내 무저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베뢰아원강, 286)

                     

김기동목사는 아래 성경구절을 보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의 평균 자연수명은 칠십에서 팔십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물론 아주 건강한 사람은 드물게 백세를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강건하면 팔십을 살 수 있다고 본다.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앞두고 백이십년을 말한 것은 인간의 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대부분의 정통신학적인 주석은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한다. 그 이유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인간의 수명은 120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크마주석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한다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당시 모든 사람들의 수명이 일백 이십년으로 한정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기간이 지난 후 대홍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적 경고이다. 따라서 이 기한은 당시의 타락한 인간들에게 주어진 심판의 유보 기간이자 동시에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은혜의 기간이었던 것이다(호크마주석)

                       

그래서 [현대인의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을 한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죽어야 할 육체이므로 내 영이 영영 사람에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내가 그들에게 120년 동안의 여유를 주겠다.”

                             

8) 부자가 무저갱에 들어갔다는 주장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나는 네게 갈 수 없다. 너와 나 사이는 구렁이 있어서 갈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부자는 무저갱에 들어갔습니다. 무저갱에 들어간 사람은 다시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도 무저갱은 지옥이 아닙니다. 지옥은 예수께서 재림하신 후에 형벌 받을 때에 들어가는 곳입니다(베뢰아원강, 289-290)

                     

어느 성경에 부자가 무저갱에 들어갔다고 되어 있는가? 부자와 아브라함 사이에 구렁이 있다는 것이지 부자가 깊은 구렁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무저갱은 사탄과 그 사자들이 종말 때까지 임시적으로 갇혀 있는 곳이지(20:1-4), 사람이 죽으면 무저갱에 가는 것이 아니다

                           

9) 예수가 죽음을 담당하였으므로 이제 인류는 죄값으로 죽지 않으며, 저주만 받는다는 주장

                            

– (630) 죽음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담당하셨으므로 인류는 이제 죄값으로 죽는 일은 없으나 저주는 담당하여야 한다(베아 15,30) 영적인 일은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담당하셨으나 인간은 죗값으로 육체가 저주를 받는 것이다(베아 16,30)(베뢰아원강, 409)

                            

성락교회 교인들은 김기동목사의 이런 주장이 성경적이며 옳다고 생각되는가? 김기동목사는 성경적인 지식도 없고 신학적인 뿌리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상상하고 추측하여 황당한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베뢰아아카데미를 통하여 가르치고 있다. 이런 황당한 주장에 적지 않은 목사들도 미혹된다는 자체가 신기하기만 하다.

                         

10) 방언이 장차 있을 사고나 비밀을 미리 알려준다는 주장

                          

방언은 하나님께 하기 때문에 알아듣는 자가 없습니다.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합니다. 우리 영은 미래를 압니다. 우리는 한시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십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 마음은 과거부터 진행된 일과 현재 당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알고 그것을 기도할 뿐 미래는 모릅니다. 내일 아침에 교통사고 날 것을 영은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영은 알기 때문에 영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레서 하나님은 내 영으로 하여금 이것을 피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나 우리 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기도합니다. 방언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악한 영들로부터 오는 시험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은 미리 올 시험을 막고 장래 일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기도를 많이 해야만 합니다(베뢰아원강, 457)

                             

도대체 이런 황당한 주장들은 어떤 성경을 근거로 하는가? 기가 막힌 정도를 넘어서서 차라리 슬프다. 사고를 미리 알려준다면 성락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사고를 당하지 않는가?

                            

11) 예수가 부활하여 올라가기 전까지 하늘보좌가 비워있었으며 여호와라고 하는 천사가 있었다는 주장

                              

어떤 사람은 아들이 하늘에서 오셔서 다시 하늘로 가신 줄로 착각하지만, 예수는 아버지 품속에서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가 부활하여 하늘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가 올라가시기 전에는 보좌가 비어있었습니다. 보좌는 여호와의 이름으로만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서 받은 것입니다(베뢰아원강, 603)

                             

이제 김기동목사는 하늘보좌까지 만들고 있는가? 김기동목사는 아래 성경구절을 보지 않은 것 같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로 나와 후에 보좌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나와 아버지께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께로가 바로 하늘 보좌라는 것을 모르는가? 주의 보좌는 영원부터 영영이 있었다.

게다가 여호와가 천사의 이름이었다는 전후무후한 주장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도 없고 가치가 없을 것 같다.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93:2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45:6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1: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12) 본죄가 자범죄와 동의어라는 것을 모르는 김기동목사의 무식한 주장

                               

– (344) 인간에게는 원죄와 본죄와 자범죄가 있다. 원죄는 아담이 지은 죄며 유전한다, 본죄는 성품죄다. 자기 마음에서 솟아나는 죄다. 자범죄는 마음에 품은 생각을 행위로 지은 죄다. 자범죄를 짓거나 본죄를 지으면 죄에 대한 의식이 강해진다(베아22,8) 원죄는 영에서 나오고 본죄는 육신의 생각이고, 자범죄는 본죄의 결과다. 원죄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해결되고, 본죄는 성령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자범죄는 훈련을 통해 억제할 수 있다(베아16,29) (베뢰아원강, 667)

                           

죄를 분류할 때에는 원죄와 자범죄로 분류한다, 어느 신학자들은 자범죄를 본죄라고 명칭하기도 한다.

즉 자범죄는 본죄와 동일한 용어이다. 자범죄와 본죄를 구별하는 김기동목사의 신학적 지식에 연민의 정을 보낸다.

                           

13) 기독교가 낙원을 부정한다는 김기동목사의 거짓말과 기독교에서 요한계시록을 계시록이라고 하지 않고 묵시록이라고 한다는 거짓말

                           

기독교교리는 낙원을 부정합니다. 성경에 낙원이 있어도 낙원을 이야기하면 이단시합니다. 그들의 신앙고백의 교리가 예수 믿고 죽은 사람은 천국 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지옥갔으니 다시 올라올 수 없기 때문에 불신자의 사후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낙원에 았다가 부활하여 천국가는 것인데, 교리주의자들은 낙원을 부인하고 믿는 사람이 죽으면 천국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재림 때에 첫째 부활이 없다하여 첫째부활을 부인합니다. 첫째 부활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더라도 요한계시록을 계시록이라 하지 않고 묵시록이라 합니다. 요한 혼자만 본 묵시이므로 계시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베뢰아원강, 715)

                      

김기동목사는 기독교의 기초적인 교리조차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기독교가 낙원교리를 부정하는가? 기독교가 첫째부활을 부정하는가? 정말 웃음만 나온다

기독교는 사후영혼이 거하는 낙원을 인정한다. 단 그 낙원도 천국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요한계시록을 계시록이라고 하지 않고 묵시록이라고 하는가?

묵시록이라는 것은 문학적 장르를 뜻한다. 즉 계시록이나 다니엘서와 같은 것을 묵시록적인 내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독교가 계시록이라고 하지 않고 묵시록이라고 한다는 주장에 웃을 수도 없다.

                        

14) 그리스도인은 낙원에 있고, 예수 이전의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게 된다는 주장

                                  

– (433) 낙원과 아브라함의 품은 오두 믿는 자가 아버지 집에 가기 전에 머무는 곳이다.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이전까지 아브라함의 종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 즉 종의 신분을 가진 자가 머무는 곳이다(베아14,35). 아브라함의 품에는 믿음은 있으나 아직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가 간다. 율법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율법과 선지자의 권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는 복음을 믿는 자다.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자는 율법과 선지자에 속한 자이고 낙원은 복음으로 거듭난 자가 가는 곳이다(베아10,38) 그리스도인은 낙원에 가있고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자는 심판에 끝난 후에 비로소 하늘나라에 속하게 된다.(베뢰아원강, 718)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낙원에 있으며, 나사로가 있던 아브라함의 품이 낙원이라고 불려졌는가? 아브라함이 천국에 있다는 성경구절과 하나님나라에 있다는 성경구절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김기동목사의 성경에는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천국에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15) 계시록의 여자가 카톨릭이라는 주장

                          

– (560) 요한계시록은 영적인 책이므로 세상적인 국가나 정권, 전쟁을 사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빗나간다. 이것은 영계의 문제, 즉 가톨릭과 기독교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가톨릭은 마리아라는 여자를 중심으로 교리를 삼고 있다. 여자(14:4)를 가톨릭으로 보면 천이백육십일은 가톨릭이 세상을 통치했던 천이백육십년과 맞아 떨어진다(베아15,31)(809)

                             

카톨릭이 음녀라고 하는 극단적인 세대주의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들보다더욱 유치하다.

과연 카톨릭이 1260년 동안 세상을 통치하였는가? 14:4이 아니라 12:6이며, 천이백육십일을 천이백육십년으로 해석할 이유가 없으며, 그 기간은 3년반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또한 천이백육십년은 세상을 통치하는 기간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박해를 피하여 도망하여 양육하는 기간을 뜻한다.

                                

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