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식(진주초대교회)의 알레고리적인 해석

  • 6월 16, 2016

                           전태식(진주초대교회)의 알레고리적인 해석

                                                                                                                                        이인규


아바드성경.PNG

    

아바드성경은 비논리적이며 비상식적인 성경해석, 즉 알레고리적인 풍유의 엉터리 성경해석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전혀 관계가 없는 구절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주의 종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축복을 받는다는 식의 해석이 많은데 상당히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특히 난해한 성경 구절에서 여러 가지 해석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견해만으로 단정하여 해석하여, 일정한 해석으로 만들려고 하는성향이 있다.

5:21 (7) 에녹은 왜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였을까? 이는 심판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1:5 를 인용하였으나 아무런 근거가 없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한자인 것은 맞지만, 에녹이 심판을 깨달았다는 내용은 성경에 전혀 없다.

에녹(하노크) 봉헌된이라는 뜻을 갖는다. 또 므두셀라(, 메투쉘라) 창의 사람 혹은 쉘라의 예배자라는 뜻이다. 심판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내용은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 이해가 어렵다.

또한 에녹이 동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동행하신 것이다.

6:3 (8)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아바드성경은 본문을 믿지 않는 자와 함께 하면 신앙이 떨어짐을 뜻한다고 해석하였으나,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8:6-8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육체는 인간 자체를 말하고, 성령은 하나님을 뜻한다. 육체가 된다는 뜻은 죄의 영향으로 인한 육체, 즉 인간의 타락된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신앙이 떨어진다고 해석되지 않는다.

11:26 (13) 데라가 아브람을 낳은 나이가 70세가 아니라 130세이다?

11:26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본문은 난해한 성경본문에 속한다. 난해한 구절을 어느 특정한 견해로만 설명한다는 자체가 잘못이다. 특히 데라가 칠십세에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셋을 모두 낳을 수가 없다. 이것은 대략적인 나이 혹은 70세에 큰아들을 낳은 것으로 해석을 한다. 성경학자들은 나홀이 하란의 딸과 결혼한 것에 근거하여 하란이 데라의 맏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인의 성경과 영어성경은 “70세가 지난 후로 해석을 한다.

[현대인의성경] 그리고 데라는 70세가 지난 후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KJV] And Terah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Abram, Nahor, and Haran.

[NIV] After Terah had lived 70 years, he became the father of Abram, Nahor and Haran.

다시 말하여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데라가 205세를 향유하고 죽었다는 구절과 창12:4를 인용하여 205 – 75 = 130 세라는 공식은 더욱 이상한 해석이다.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떠날 그 해에 데라가 죽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란이 생존하여 있을 때에 아브람이 떠났을 가능성도 있고,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람이 떠날 가능성도 있으므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11:31-32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17:10 (20) 할례 : “할례받지 아니한 자를 백성 중에 끊어 버리신다라는 말은 비록 언약의 백성일지라도 육신의 일을 버리지 않고 이를 좇아 사는 자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해석은 이상한 해석이다.

아바드성경은 구약의 할례를 육신의 일을 버리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신약성경 골2:11은 오히려 반대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할례 즉 영적할례가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할례는 옛 언약(구약)이며, 예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신약)과 다르다.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58) 38장 계대결혼 :

아바드성경과 같이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기 태를 통하여 메시야가 탄생하기를 소망하였기에 계대결혼을 한 것은 아니다. 계대결혼의 원인은 과부가 된 형수의 생활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메시야의 족보가 되었지만, 그들이 메시야를 소망하였기에 계대결혼을 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해석이다.

41(63)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

전태식목사는 구원의 옷은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고, 의의 겉옷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여할 책임적인 측면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은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겉옷은 구약과 달리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가르킨다고 보아야만 한다.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행실 디카이오마이며 법적 선고을 말하며, 5:16-18 의롭다하심에 사용된 단어이다. 위 본문에서 보듯이 이 세마포는 하나님이 허락하여 입게 하신 옷을 말한다. 아바드성경은 이사야본문을 인용하여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이 다른 것으로 구별하고 있는데, 의의 겉옷도 하나님이 더하여 주시는 것이다.

61:10-11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마태복음에서도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악하거나 선하거나를 막론하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었으며, 길에서 만나는 대로 초청된 그들이 예복을 미리 준비하였을 리가 없다. 그 당시 왕국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예복이 왕국에 미리 준비되었다고 한다. 즉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믿음의 의가 없는 사람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22:9-12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더욱이 아바드성경은 의의 옷이 더러워질 수 있다고 하면서(64) 항상 씻어 희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7:14 22:14을 인용하는데, 계시록 본문은 예수의 피에 옷을 씻는다는 것으로서, 전태식목사는 예수의 피에 옷을 씻어도 그 옷을 항상 씻어야 한다는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다.

전태식목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약의 성경구절을 모두 외면한 채 왜 일부분의 성경만을 인용하여 인간의 책임과 의지가 별도로 필요한 것처럼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87(5:3) F.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광야로 탈출을 시키기 위하여 바로에게 제사를 이유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즉 모세가 광야로 나가서 제사를 지내도록 바로왕에게 변명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아바드성경은 예수를 믿어야할 사람이 믿지 않을 때 받는 징계로 해석하고 있는데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경우로서 (1) 예수를 믿어도 순종하지 않는 경우와 (2)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는 자도 저주를 받는다고 해석을 하고 있다.

본문은 예수를 믿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며, 그러한 해석은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순종이 조건이라는 행위구원론이 된다.

더욱이 예수를 믿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면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 아니라 순종이 되어진다.

이사야

1004 34 A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킨다는 주장. B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Special Corner)

이것들이라는 대명사는 여성명사이며, 하나님의 책은 남성명사이다. 본문의 이것들은 부엉이와 솔개의 짝을 말하며, 이것들은 모두 여성명사이다.

영어성경과 다른 한글 번역성경을 보면 그 뜻이 분명하여 진다.

[공동번역] 야훼의 기록을 찾아내어 읽어보아라. 이런 모든 짐승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리라. 그것들은 직접 야훼의 입에서 떨어진 분부를 받아 그의 입김으로

몰려온 것들이다.

[표준새번역] 주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 짐승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겠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주께서 친히 입을 열어 그렇게 되라고 명하셨고 주의 영이 친히 그 짐승들을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성경]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 동물들 중에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되도록 명령하셨고 성령께서 그것들을 함께 모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의 짝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와 신천지같은 이단들의 해석이며 성경을 비유풀이를 하는 단체들의 해석이다. 아바드성경이 이러한 해석을 한다는 자체가 아바드성경이 그들과 같은 짝풀이와 비유풀이를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본문은 에돔이 심판을 당하여 불바다가 된 후에 황무지로 변하고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되어, 구약에서 부정한 짐승 즉 당아, 고슴도치, 부엉이와 솔개와 같은 짐승들이 짝을 이루고 살게 된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책을 보면 이런 짐승들도 다 짝이 있다는 그러한 의미이다.

13, 9:17 새 포도주부대가 터져

아바드성경은 새 포도주가 약속하신 성령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본절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과의 영적다툼이 있을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다, 본문은 유대교의 율법적인 전통과 의식에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대한 완성이자 그 최종 목적이 된다는 뜻이다.

19, 12:31 성령을 훼방하는 :

아바드성경은 본문에 대해서 앞뒤 문맥으로 볼 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1, 2:32)라는 말씀은 그 환난의 때에 끝까지 주의 이름을 시인하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이라고 해석을 한다.

그러나 본문은 환난의 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제한이 없이 언제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구약에서는 제한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하였으며, 신약에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만인에게 성령이 내주하게 된 것을 말한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름만 부른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을 말한다.

33, D. 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아바드성경은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는 구절에 대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려 할 때 마음을 상하게 하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기 원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마음을 상하지 말아야 한다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본문은 그러한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다.

39-40쪽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방법(엉터리 알레고리적인 임의해석)

* 산으로 도망할 찌어다(24:16) :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환란을 이기기 위해 교회 중심 곧 예배 중심으로 살라는 것이다?

* 지붕으로 내러가지 말며(24:17) :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는 뜻이다

밭에 있는 자는…(24:18) : 성도는 하나님의 밭이므로 좋은 밭이 되라는 뜻이다.

*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24:19) : 아이밴 자와 젖먹이는 자는 평소보다 오히려 신앙이 나태하기 마련이다. 본절은 이와 같이 신앙이 나태해지는 자는 결코 환란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24:20) : 겨울은 동면의 계절이며, 안식일은 노동을 쉬는 날이므로 믿음이 잠을 자거나 쉬지 말라는 뜻이다?

이러한 해석은 알레고리적인 임의적인 해석이다.

산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간주되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은 곳도 산이었다.

유대인들의 지붕은 기도와 휴식이 가능한 지붕이었다.

집안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것은 귀중한 물건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의미이며. 밭에 있는 자가 겉옷을 가지러 가지 말라는 것도 촉박하고 급한 재앙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에 재한 경고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충분하다.

겨울이나 안식일에 대해서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충분하다. 겨울은 추춰서 도망을 가기에 지방이 있으며, 안식일은 먼 거리를 갈 수 없으므로 제한을 받는다는 뜻으로 본다.

(41)  *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24:26) :

주님의 재림은 지상재림이 아니라 공중재림이다. 그러므로 광야에 있다는 말은 미혹시키는 말이므로 속지 말라는 뜻이다

광야(개방된 장소)나 골방(패쇄된 장소)은 어느 장소에 불문하고 거짓 그리스도를 조심하라는 뜻이다.

43: 24:51 “엄히 때리고 외식 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아바드성경은 본문을 죽기 전에 이 땅에서 성도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는 뜻이라고 해석을 한다. 성경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구절이 죽기 전의 생애를 말한다는 해석은 말이 안되는 해석이다.

성경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을 죽기 전에 성도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고 해석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43, B (열처녀의 비유) 등불이 꺼져가니(25:8) :

아바드성경은 등불을 켰다는 것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라고 고백했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열처녀 모두 거듭난 성도를 의미하며…. 기름이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환란의 때에 주의 이름을 끝까지 시인할 수 없음을 뜻한고 해석을 한다.

완전히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며, 열처녀가 모두 거듭난 자라면 거듭난 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되고만다. 열처녀는 모두 기름이 있었다, 다만 다섯처녀는 여분의 준비를 못한 것이며, 그 다섯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구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본문은 예수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므로 미리 준비하라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며, 혼인잔치는 구원의 문을 상징하는 것이 명백하다. 열처녀를 모두 거듭난 성도로 본다면, 예수님의 열처녀에 대한 비유가 전하는 멧세지적인 의미가 없어진다.

107 F (9:27)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아바드성경은 열두제자 중에 요한을 가르켜 하는 말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신천지의 해석이며, 명백한 오류이다. “하나님나라를 볼 자들에 대한 관계대명사는 남성복수 명사로 기록되어 있다. 죽기 전에 하나님나라를 본다는 것은 변화산을 뜻한다. 공관복음은 다음과 말이 말하고 있으며, 본문 뒤에 변화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 죽기 전에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가 있다.(16:28)

마가: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9:1)

누가: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있다.(9:27)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이미 죽은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동행한 제자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였다.

136 G 베드로가 멀찌기 따라가니라(22:54)

멀찌기 따라가니라를 이상하게 해석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아바드 성경은 믿음이 좋더라도 예수님과 상거가 멀어지면 환난때 주를 부인한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는데. 예수가 잡혀가므로 단지 두려워서 멀찌기 따라간 것에 대한 기록을 이상한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요한복음

146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아바드성경은 예수님 외에 천국에 들어간 자가 없다고 해석을 한다. 그러나 천국과 낙원을 다른 곳으로 분류할 필요가 없으며 낙원도 천국이다.

물론 천국은 종말적으로 완성되어지며, 부활후 신령한 몸으로 영생하는 곳으로 사후 영혼이 가는 낙원과는 구별이 된다, 그러나 낙원도 천국이다.

천국의 개념은 포괄적이고 보다 넓은 개념으로서 낙원도 천국의 일부이며, 성도도 하나님나라의 일부이다.

151 (5:47)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아바드성경은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동일하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정반대의 해석이다. 모세의 의문에 쓴 가르침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의 가르침, 영적인 가르침을 받겠느냐는 뜻이다.

154(6:63) “살리는 것이 영이니

아바드성경은 본문과 전혀 상관이 없는 매우 저급한 해석을 하고 있는데, “육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은 죽지 않는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NIV와 표준새번역을 참고하라,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뜻은 영이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영이 생명을 준다는 뜻이다.

166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아바드성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일이었지만, 수족을 메었던 베를 푸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라고 해석을 한다, 전혀 상관이 없는 본문을 사람의 행위를 강조하도록 과장하여 알레고리적인 해석

170 (13:36) “후에는 따라오리라.”

주님의 고난의 길을 따라 간다는 뜻이 아니라, 죽음 이후를 말한다

173 15장 과실은 사랑의 열매를 뜻한다?

본문의 열매는 사랑의 열매가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의 유기적인 관계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185 (21:15) “내 양을 먹이라

아바드 성경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즉 아무 것도 섞이지 아니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먹이라는 뜻으로 해석을 한다.

물론 그렇게 해석을 하여도 큰 오류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떤 것을 먹이라는 내용이 아니다. 더욱이 아무 것도 섞이지 아니한 말씀만을 먹이라는 내용은 없다.

두 번째에서도 내 양을 치라고 하셨다.(21:16)

사도행전

189 F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를 종말적으로 해석하여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해석

변승우목사나 신사도운동 목사들과 같이 요엘의 예언을 종말적으로 국한시켜 해석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며, 요엘의 성취는 오순절에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다.

말세에 라는 단어가 있으므로 이 요엘의 예언은 종말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세에라는 단어는 에스카토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 단어는 , 마지막이라는 뜻도 있지만, 현재 시간을 기준으로 나중, 라는 의미도 있다. 다음 성경의 예는, “에스카토스 나중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성경적인 증거이다.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에스카토스)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에스카토스)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에스카토스는 마지막 종말적인 말세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를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얼마든지 성경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스카토스)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벧전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스카토스)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요엘2:28에서는 그 후에라는 단어로 사용되었지만, 구약에서도 말일이라는 단어는 종말만을 뜻하지는 않으며, 어느 시한적인 때나 메시야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10:14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요일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로마서

238 (1:1) 사도에 대한 의미가 잘못 설명되어있음

사도는 추수할 일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250 (8:23) 양자될 것과 몸의 구속을 구별하여 재림 후 부활로 해석하는 것은 이상한 해석이다.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베드로전서

379 B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

이 구절은 난해한 구절에 속한다. 성경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난해한 구절을 하나의 견해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게다가 아바드성경은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본문에서 은 지옥이 아니라 감옥을 말하며, 전파하다는 선포하다로 해석을 하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본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하나의 견해만을 단정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보여진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3:18-20)

벧전 3:18-20은 사실 난해한 구절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에 지옥에 갇힌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시고 그들이 정죄를 받았음을 선포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타당성있는 주장 중에 하나로 간주된다. 이 구절에서 전파하다는 단어는 유리겔라조“(복음을 전하다)가 아니고, “케루소“(선포하다)이다. 즉 정확한 번역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카톨릭의 공동번역도 선포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혹간은 영을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영으로 해석하고, 그리스도가 노아의 홍수 이전에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석을 할 때의 지옥이 아니라 세상을 말하며, 실제 원문으로 지옥이 아니라 감옥을 말한다. 또 하나의 해석이 있는데, 옥에 있는 영들은 타락한 천사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타락한 천사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381 D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4:18)

아바드 성경은 본문을 순종하여야만 의인이 된다고 설명하며, 의인이 실제로 겨우 구원을 얻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잠언11:31의 칠십인역을 인용한 것으로서, 의인이 실제로 겨우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경각심을 높이기 위하여 강조를 한 것이다.

405-406 B 십사만사천(7:4) : 14장의 십사만사천과 다르다는 주장

계시록에 144,000은 세구절이 나타난다. 이것을 다르다고 해석할 이유는 없다.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혹간은 7:4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이스라엘 열두지파만의 숫자로 해석하지만, 옳은 해석은 아니다. 십사만사천은 구원받은 숫자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구약의 12지파(21:12) X 신약의 12사도(21:14) = 144(21:17)

성경에서 1000이라는 숫자는 매우 많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144 X 1000 = 144,000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보편적인 견해이다,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21: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406 C 능히 셀 수 없는 무리(7:9)

이 능히 셀 수 없는 숫자를 낮은 반열의 구원자로 보는 견해는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이다.

사도요한은 7:4 144,000을 보았고, 그 후에 다시 7:9의 셀 수 없는 무리를 본 것이다.

7:4은 구약에서의 이스라엘 12 지파, 7:9은 신약에서의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즉 이방민족에서 셀 수 없는 무리를 상징한 것이다.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407쪽 첫째 나팔 넷째 나팔(8:7-12)

아바드성경은 이 나팔재앙에 대해서 이는 비유와 상징이 아니다라고 하며 구체적으로 어느 사건으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계시록의 특성을 무시하고 임의적인 해석을 한 것이 된다.

첫째나팔의 재앙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열가지 재앙 중 일곱 번째 재앙과 같이, 자연계의 재앙을 묘사한 것이라는 견해가 보편적인 견해가 된다.

둘째 나팔의 재앙은 예레미야51:25을 인용한 것이라는 주장이 보편적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51:25)

문자적이며 일차적인 인용은 여섯 번째 견해인 렘51:25을 인용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다음 절(9)에 언급된 전쟁과 연관된 것으로 보아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보는데,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된다는 것과 9절의 언급은 전쟁의 재앙을 뜻한다고 보여진다.

셋째 나팔의 재앙은 불신자나 악인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며, 고대부터 빛을 발하며 떨어지는 별이나 운석은 멸망과 저주의 징조로 생각되었으며, 또한 성경에서도 종종 인간들에게 임할 고난이나 심판에 대한 예언이 떨어지는 별로 상징되고 있다(32:7, 2:10, 24:29).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라는 본문은 그 오염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 원인이 된다고 하였으므로 이것에 대해서 학자들은 이단과 우상숭배같은 사상적인 오염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넷째 나팔의 재앙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재앙 중에서 아홉 번째 재앙인 3일간의 애굽의 흑암(10:21-23)을 연상케 하며 계612절의 여섯 번째 인의 재앙과도 유사하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때에도 어두움이 온 땅을 덮은 현상이 있었고(27:45) 본문은 구약의 욜2:31과 암8:9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8:9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특히 마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라는 구절의 실제적인 성취라는 견해도 있다.

9 408-409의 해석으로 화학전, 생물학전, 핵전쟁으로 구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계시록을 임의로 해석한 무리한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