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 12월 28, 2015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이인규

(오래 전에 모 인터넷 신문사에 객원컬럼으로 올렸던 글로서 다시 정리하여 올립니다)

 

이단이라고 불리는 단체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심지어 황당한 사이비집단이라고 할지라도, 그곳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교리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기존 기독교의 교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자신들의 짜깁기 교리는 가장 성경적인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나중에 상담을 거쳐 이단교회에서 개종하여 돌아온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 당시에는 왜 그런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부끄럽고 한심하다라고 고백을 한다. 그렇다면 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그곳 안에 있을 때에는 잘못된 문제점을 스스로 발견할 수 없으며, 밖으로 나갔을 때에만 그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당사자가 성경적인 지식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자기 자신의 척도 기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사물의 척도를 비교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어떤 음식에 대해서 맛있다고 칭찬을 할지라도 자기 자신이 그것을 싫어하거나 혹은 먹지 못한다면 그 음식은 맛이 없는 것으로 평가를 한다.

예를 들자면,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일회용 커피에 익숙하여 그 커피가 맛이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일회용 커피를 싫어하며 원두커피를 즐겨 마신다. 반면에 이태리와 스페인 사람들 중에는 매우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호주 사람들은 생크림의 거품이 넘치는 카푸치노를 즐겨 마신다.

이러한 것은 음식뿐 아니라 음악이나 영화와 같은 엔터테인먼트와 문화에서도 사람마다 그 기호가 상당히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점은 결국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것이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나쁜 것이 된다. 우리나라 개고기 문화를 비난하는 프랑스사람들은 우리가 곤충이나 벌레로 여기는 달팽이를 먹지 않는가?

 

즉 내가 속한 교회, 내가 배운 교리, 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라는 관점이 바로 자신에게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모두 공평하다고 하는 저울이 있는데, 그 저울은 내가 그 중심점을 잡으면서 추를 놓아야만 그 저울이 공평한 것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단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동일하게 내가 있는 교회가 곧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각 교단이나 단체에서 회장이나 대표의 선거가 있을 때가 되면 항상 유권해석이 문제가 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본다. 그 유권해석은 원칙과 공평한 기준이 아니라, 항상 자신이 속하거나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해석이 되어야 하며 그것을 공의(Justice)라고 생각한다. 즉 나는 법규에 위반을 하여도 해석을 달리 적용하여 예외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사소한 규칙하나도 어기면 자격이 없다는 해석이 공의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즉 절대적 기준인 <>와 다르면 안된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지역, 내가 속한 교회와 내가 졸업한 학교 출신과 내가 친한 목사가 대표가 되고 회장이 되어야만 교단과 한국교회가 개혁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부정과 불법은 용납될 수 없지만, 나는 부정과 불법을 하여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소위 로맨스와 불륜의 차이는 <>라고 하는 기준의 차이다.

또한 법규를 해석할 때에는 나에게 가장 유리한 입장으로 해석을 하여야만 그것이 공평한 절차가 되어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느 특정한 선거에 대한 내용이 아니며 일반적인 경우를 예를 들었을 뿐이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내용은 오늘날 정통교회의 목사들이 이단 교회를 지지하거나, 명백한 이단적인 주장을 이단이 아니라고 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한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서 볼 때에, 대부분의 일반 목회자들은 이단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다. 다시 말하여 이단에 대해서 구체적인 전문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단을 이단이라고 하지 못할 수도 있고, 혹은 내가 그 목사와 친분이 있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기독교를 대표하는 연합단체들과 선교단체에서 이단교회나 문제단체를 영입하는 일들이 종종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실제적인 예를 들면, 현재 한기총에 가입된 이단/문제단체들은 합동복음(장재형, 크리스쳔투데이, 3개교단에서 규정), 다락방(류광수, 전도총회, 9개교단에서 규정), 인터콥(최바울, 4개교단에서 규정), 평강제일교회(박윤식, 2개교단에서 규정)이며 심지어 자칭 보혜사라고 주장하는 신천지와 동일한 계열인 김풍일(새빛등대중앙교회)까지 영입을 시켰다. 교단의 연합단체에서 그 소속교단들이 이단으로 규정한 곳을 한기총에서 영입을 한 것으로서, 많은 소속교단들은 이 문제로 인하여 한기총을 탈퇴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한기총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곳은 고소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공문을 발송하고 있는데, 이미 필자는 이단연구가들과 신학대학교수들을 포함한 207명과 함께 한기총에서 10억 손해배상 고소를 당하였다.


더욱이 요즈음은 기독교신문들이 이단을 지지하는 기사를 실어주고 이단을 홍보하거나 광고를 실어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신문사 자신이 운영하는 경비와 이윤이 기독교 언론으로서의 사명감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이단들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계의 현실이다. 이제는 건전한 기독교 언론사를 손꼽아 셀 수 있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바로 자기 자신의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진리가 되고, 기준이 되며, 심지어 불법과 부정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묵인되어진다고 생각한다.

즉 나에게 어떤 이익을 지불하는 곳이거나 내가 가깝게 교류를 하는 곳, 혹은 나에게 도움을 주는 곳은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하여 주는 것이다. 혹은 나의 가족이나 친지, 나의 동료나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그 교회 목사라면 그들은 이단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혹은 내가 그들과 비슷한 사상을 갖고 있다면 그 교회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이단이 아니라고 판단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최근에는 적지 않은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과 표적을 보이기 위한 집회만 강조하고 있다. 일년에 몇 번씩 부흥회를 열지만, 정통신학과 성경공부는 가르치지 않는다. 오로지 교인들을 숫적으로만 증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서 다른 교회에서 교인들이 수평이동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나의 교회 교인 숫자가 늘어날 수 있다면 다른 교회 교인숫자가 줄어들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쓰러지고, 딩굴고, 소위 입신을 하고, 교인들에게 장래 일을 점치는 예언과 계시를 하며, 금가루와 금이빨을 보여주면서, 신비한 현상에 미혹된 교인들을 불러 모으기에 집중하는 교회들이 있다.

하루에 백번을 쓰러지고 하루에 열번을 입신하면 그가 구원을 받는가?

자신의 이빨이 모두 금이빨로 변하면 그는 구원을 받는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망각하는 교회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는 목사가 안수를 통하여 성령과 은사를 줄 수 있다는 소위 임파테이션을 주장하는 곳도 있다.

이 모든 것이 곧 진리의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나와 관계가 있고 나를 유익하게 하여 주는 곳은 나의 적이 아니라 나의 동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한국교회를 위하여 이단을 비판하는 이단연구가를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란 무엇을 말하는가?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26: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13:2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7:6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요일 5: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를 위하는 것을 말한다. 곧 탐심과 정욕과 사욕이 곧 우상숭배가 된다. 나를 기준으로 하는 모든 기준이 곧 우상숭배가 된다.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우상숭배는 자기를 위한 것이며, 자기의 정욕과 탐심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6:33)이다. 즉 이단을 정죄하는 것은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과 교우, 나아가서는 한국교회를 위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종교적 경건은 이익의 재료가 될 수 없다. 교회를 비즈니스로, 목사를 CEO로 생각하는 자는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잃어버린 자이다. 정치판이나 교계나 심지어 신학대학교까지 선거때만 되면 돈을 수억을 뿌렸느니 어떤 청탁이 오갔느니 하는 소문들이 나돌아 마치 진흙탕을 연상시킨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이단의 논쟁은 기록된 성경말씀을 기준으로 하면 가장 공평할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단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될 때마다 이름이 거론되는 일부 친이단성향의 목사들이 있다. 진실로 한국교회를 생각하기 바라며, 경건을 자기 자신의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어떤 이단들을 풀어줌으로서 어느 목사는 얼마를 받았느니, 어느 이단은 얼마를 주었느니, 혹은 수십명을 성지순례를 보내주었다는 등의 근거없는 소문들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이단을 지지하는 기사를 써주면 얼마를 받느니, 심지어는 이단연구가를 비판하여 주면 얼마를 주겠다는 제안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실제로 어느 연합단체의 대표회장은 이단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면서 집회 행사에 인원동원을 부탁한 일이 있었으며, 연합단체의 어느 목사는 이단교회로부터 억대 단위의 돈을 받았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단영입에 방해가 되는 이단연구가들을 이단으로 조작하고 모함하는 정치적인 일까지 있었다.


더욱이 돈을 더 준다고 하여 이단교회에 교회를 매각하고 다른 곳으로 이전한 교회들도 있으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한 교회가 부지기수이다. 그들은 당회에서 합법적으로 결의되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의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6:24, 16:13)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22:21)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것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동등한 가치로 인정하는 이원론적인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은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화폐는 가이사의 것이지만, 전인적인 사람 자신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인정한 것은 단지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로마화폐이며, 그것은 곧 우상이다. 측면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중에서 양자택일을 결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로마의 화폐는 은전으로서 데나리온이었으며,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의 초상화와 명문(銘文)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화폐가 가이사의 것이라는 일차적인 의미는, 로마화폐에 가이사의 형상과 가이사의 업적을 기록한 글이 있었다는 것에 있다.(12:16-17. 20:24-25)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며, 그 형상이라는 개념도 역시 외형적이거나 신체적인 개념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1:18, 딤전6:16, 요일4:12)


우리가 예수를 닮아간다는 것은 타락한 인류의 구속과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새 피조물이 되어짐(고후5:18)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은(8:29) 결국 그리스도의 본성을 닮아감으로 인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벧후1:4)을 내포한다. 성경은 장래에 우리의 낮은 몸이 그의 영광된 몸의 형체와 같이(3:21) 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마침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고전15:49)라고 하였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화폐는 하나님나라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다. 물론 물질이나 돈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수단과 도구의 일부로 사용되어질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나라는 물질이나 권력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내면적인 영역으로서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의 차이가 말하는 본질적인 관점은 무엇일까?

즉 예수님의 답변은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절대 가치적 기준을 말씀하신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며, 그것을 알고 실천에 옮긴다면 한국교회의 잘못된 분쟁이 없어질 것이라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