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과 다른 복음

  • 5월 27, 2016

                                                      오직 믿음과 다른 복음


                                                                                                                                                  이인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6)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의로운 행위이다. 그러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다. 다시 말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자체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  

너무나도 많은 성경말씀이 구원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으며, 많은 성경말씀이 행위와 은혜를 구별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되어진다.

다시 말하여 구원에 있어서 은혜를 부정하고 행위를 요구하는 견해는 기록된 말씀과 전혀 다른 복음이 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바울은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갈1:8)

적어도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인간의 행위와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다른 복음이 되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그 이유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구원을 받을 사람이 한명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은 진짜 복음과 매우 유사하므로 구별이 매우 어렵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유명한 설교자 무디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 방황하다가, 다음 성경구절을 읽고 변화되었다고 전해진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서11장1절의 말씀에 의하여 확증되어진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믿음의 결과는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할지라도(즉 아직 보이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마음 속에 확신하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너희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하신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였듯이, 인간의 눈에 아직 보이지 않고 성취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순종하는 것이 참믿음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근거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실체화하며 실증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가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구속과 죽음과 부활을 영원한 진리로 믿는 믿음 위에 굳건히 서있어야만 한다. 마틴 루터와 요한 웨슬레가 모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통하여 거듭났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맹수 앞에서 그들의 믿음을 확증하며 찬양을 부르며 죽어갔다. 그들이 영생의 부활을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


아브라함은 부활, 즉 자신의 아들이 다시 살 줄로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하였던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장(章)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온전히 믿었던 믿음의 사람들의 기록인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조상들은 모두 믿음의 위인들이었던 것이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히브리서의 기자는 믿음의 위인들이 너무나 많아 시간이 부족함을 이유로 일일이 설명을 생략한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히 11:32-33)


이미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성경은 66권 전체가 믿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혹간의 사람들은 행함을 강조하는 구절도 분명히 성경에 있다는 것에 구원에 행위가 필요하다는 오해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행함은 믿음을 제외하거나 믿음을 부정하는 행함이 아니라, 믿는 자로서의 결과적인 열매로서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도덕과 윤리를 무시하는 폐단을 우려하는 목적으로서, 실천전인 믿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야고보는 믿음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행함이 따르는 살아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었으며,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형식적이며 의식적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더욱 높은 율법적 의의 기준을 제시하심으로 그들이 도저히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려고 시도하셨던 것이다.

율법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산상수훈을 믿음을 부정하고 행함이 필요하다고 해석하는 자들은 소경이며, 귀머거리이며, 복음을 율법으로 다시 복귀시키는 앉은뱅이의 슬픈 저주의 해석이다.


사도바울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소위 이신칭의에 대해 역설하였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믿음이란 히브리어로 “헤에민”이란 단어가 많이 사용되었고, 그 원래의 뜻은 “참된 것으로 간주하다”는 것이다. 70인역에서는 이 “헤에민‘은 거의 모두 헬라어 ”피스티스“로 번역되었다.

헬라어로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주로 바울서신에서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 뜻은 “온전히 맡기다”라는 뜻으로 지적요소를 포함하는데, “피스티스”라는 용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 한 인물에 대한 일반적 신뢰

2) 이러한 신뢰를 근거로 하여 그의 증거를 받아들임

3) 미래(구원)를 위하여 그를 신뢰하는 것


즉 믿음은 몇가지 요소로서 구별되어 분류되어질 수 있다.


1) 지적요소(지식)

2) 감정적 요소(찬동)

3) 의지적 요소(신뢰)


이 세가지의 요소가 종합적으로 상관되어질 때에 우리는 확고한 구원적인 신앙을 갖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교회만 다닌다고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는 없으며,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을 가져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는 없다. 예수 이름만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교회가 있는가? 또한 범죄하고 타락하여도 상관이 없으니 마음놓고 범죄하고 타락을 하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없다. 그런 교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 달라.

항상 허위사실과 과장된 주장으로 “오직 믿음”의 구원관을 부정하는 사람은 다른 고의적인 목적을 가진 자들임에 분명하다.

구원을 받을 믿음은 곧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며, 그러한 믿음에 영생이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예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의 반석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셨다. 하나님은 광야교회에서 이스라엘을 온전한 믿음의 연단을 갖게 하기 위하여 40년을 방황하게 하신다.

또한 숱한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을 지키며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을 위하여 카톨릭이라는 골리앗과 싸워 주님의 교회를 정립하였다.


사단은 다른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기 때문에 분별이 매우 어렵다. 만약 그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르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청2:16-17)


사단은 하와에게 하나님을 말씀을 변질시킨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사탄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바꾼 것이다.

성경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와를 유혹하였던 바로 그 사탄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고 있다. 사람이 도저히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위하여 예수가 십자가에서 대신 목숨을 바쳤는데, 오늘 하와를 미혹하던 그 사탄은 십자가의 의미를 없게 하려고 인간의 행함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