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과 구원의 확신

  • 7월 01, 2016

                                                  구원론과 구원의 확신

 

                                                                                                                                           이인규

 

1) 구원의 확신

 

개혁주의가 말하는 구원론은 성경적이다. 필자는 정통신학적인 구원관을 결코 틀렸다고 평가하지 않으며 온전하게 성경적인 구원관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11)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면 우리는 실족치 않고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개혁주의 구원론에 대해서 큰 오해와 착각을 하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이 주관적으로 구원을 이미 받았다고 생각하며, 그 구원은 끝까지 견인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구원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구원파는 자기 자신이 어떤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 순간에 이미 구원을 받았고 동시에 이미 거듭났다고 생각을 한다. 즉 구원파의 구원여부는 자기 자신의 깨달음에 달려있는 셈이다.

개혁주의도 구원을 받은 자의 견인교리를 주장하며, 구원파 역시 견인교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와 정통신학이 말하는 구원의 확신은 구원파와 같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구원의 확신은 자기 자신의 단정이 아니다.

 

견인의 개념 : 이 교리의 의미는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 교리는 모든 예배 참석자나 교회 회중들이 그들의 신앙 안에서 끝까지 견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또는 공적으로 신앙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영원히 안정하게 된다는 것이나 우리에게 참 신자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결코 신앙에서 떠나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더군다나 이 교리는 성경이 분명하게 언약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다고 증거하기 때문에 구속사 가운데 드러난 은혜 언약 속으로 결합된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된다는 개념도 아니다.” (안토니오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기독교문서선교회, 386)

 

성도의 견인의 교리의 요지는 하나님이 중생시키시고 은혜의 상태로 유효적으로 부르신 자들은그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또한 궁극적으로 떨어질 수 없으며 다만 분명히 그 상태에서 끝까지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이다.”(루이스 벌콥, 조직신학 하권, 기독교문사, 312)

성도의 견인이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전되어 그들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그리스도인일 것이며 또한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거듭난 자임을 의미한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은성, 462)

 

개혁주의가 말하는 견인교리는 자기의 주관적인 확신과 판단에 의한 보장이 아니며,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 즉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으로서 장차 믿음에서 탈락하지 않을 성도를 뜻하며,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성도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감리교의 웨슬레목사는 견인교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웨슬리안은 칼비니즘의 견인교리와 달리 구원의 조건부 취소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측에서 예정된 구원을 취소한다는 뜻이 아니며,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웨슬리안은 믿음을 인간의 책임적 측면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신자(信者)의 입장에서 믿음을 잃을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구원관은 행함이나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예정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믿음을 유지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가 믿음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한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본다. 즉 신자(信者)의 개념을 진정으로 거듭난 참 신자로 본다면, 개혁주의 견인론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되고, 중생하고, 그리고 성화되어 구원을 얻지만, 그 믿음은 계속되어야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웨슬리는 예정된 자의 구원이 아니라, 믿는 자의 구원을 강조하면서 신앙의 현재성과 계속성을 강조한다”(웨슬리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98)

다시 말하여 구원파가 주장하는 자의적인 깨달음으로 구원을 이미 받았다는 주장은 정통 기독교적인 주장이 아니다. 구원파에서 자신이 스스로 깨달았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구원예정 안에 있다는 주장과같기 때문에 자신이 구원주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개혁주의 교회 또는 정통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구원파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참 신자는 곧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와 동일한 사람이며 전자는 수동적이지만 후자는 능동적인 표현이 된다.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나 신천지,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들은 자기 자신이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단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철저하게 믿는다. 다시 말하면 주관적인 확신은 이단이 더욱 강조하고 있으며 그러한 주관적인 확신이 곧 구원이 될 수 없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주관적인 확신과 객관적인 확신의 차이에 대해서 웨슬레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웨슬레목사는 영국 올더스케이트의 집회에서 강사가 로마서 1:17(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을 읽을 때에 뜨거운 회심을 경험하고 구원의 확신을 체험하게 됨으로서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면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언급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언급해 왔던 것은 객관적인 확신과 주관적인 확신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실례로는 요한웨슬레가 있습니다. 알더스케이트 거리에서 사건 전에 자신의 마음에 이상한 뜨거움을 느꼈을 때 요한웨슬레는 진리를 믿었으며 객관적인 확신이 있다는 것, 즉 그것은 사실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까지 그가 갖지 못했던 것은 주관적인 확신, 즉 내적인 것뿐이었습니다”(마틴로이드존스, 성령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222)

 

회심 이전에 웨슬레가 갖고 있었던 구원의 확신은 주관적인 확신이었지만, 회심 이후에 웨슬레가 갖게 된 구원의 확신은 객관적인 체험이었던 것이다.

 

먼저 올드스케이트 이전의 웨슬리의 사상에는 인간은 도덕적인 선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복종,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킴으로서만 구원받는다는 기본적인 원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노력과 그 노력의 도적적 영적 결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다”(웨슬리조직신학, 한영태, 167


이후 웨슬리는 올더 스케이트에서 로마서 서문을 듣고 회심을 체험하고 오직 믿음을 주장한 종교개혁자들의 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나의 마음에 이상스럽게도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임을 믿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죄, 나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함께 웨슬리에게는 아들의 믿음이 왔으며, ‘율법 아래 살 때에는 전력을 다해 싸웠어도 패배자일 따름이었는데 이제 은혜 아래에서는 승리자가 된다는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자신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다가 실패한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종교개혁자의 교리로 돌아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웨슬리조직신학, 한영태, 169)


2) 믿음과 구원

거의 매일 술을 먹는다고 알려진 어느 이단 단체의 목사는 교인들 앞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강조한다. 그 행위의 열매가 결코 성령의 열매라고 말할 수 없으며 매스컴에 많이 알려진 모 목사는 자신이 평생을 복음을 위하여 생애를 바쳤다고 인터뷰를 하였다. 또 이단연구가들은 이단들에게 금품을 제공받고 이단들을 지지하여주는 밀접한 공생관계를 가진 것으로 유명한 목사들, 즉 이단옹호자라고 불리는 목사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과연 그들이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들 자신의 구원을 보장받았을까? 만약 그들이 심판에 대한 믿음을 진심으로 갖고 있다면 금품을 받고 이단들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의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는다. 하나님보다 강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내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예정에 포함되어 있느냐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생명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생명록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정확히 알 수 있는 구원의 확신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가 안받았는가에 대한 확신은 스스로 나의 믿음을 확증하는 시험으로 알 수가 있다. 내가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면 나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물론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없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 단 한 구절도 없으며, 진실하지 않은 믿음 즉 형식적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가져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내가 10년 전에 예수를 믿었는데,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가정을 하자. 더욱 알기 쉽게 지금 나는 불신자이거나 타종교를 믿고 있다고 가정을 하자. 과연 내가 10년 전에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1-2)

 

또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지만, 10년 후에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한다고 하여도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은 이제”(now) 예수 안에 있는 자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3) 행위와 은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2:8-9)

 

당연히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으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이다. 우리의 심판은 행위로서 이루어지는데, 행위로서 구원을 받을 사람이 단 한명도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의지와 자력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자체가 곧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 된다. 그 은혜의 동기가 바로 주님의 십자가 대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위가 필요할까?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열매로서 행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 인간의 의지와 자력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행위와 그 열매로서 어떤 사람이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거듭난 자도 죄를 지을 수가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라고 말할 수 없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행위는 믿음의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은혜와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 성경은 아래와 같이 말하는데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면 그것은 결코 행위로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면 안된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11:6)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