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를 조심하자

  • 8월 03, 2016

                                                        신비주의를 조심하자

 

                                                                                                                                  이인규

  

 

신비주의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나 절대자 등 궁극적 실재와의 직접적이고 내면적인 일치의 체험을 중시하는 철학 또는 종교사상.

 

사실 신비주의라는 단어는 실상 많은 의미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종교 자체가 갖고 있는 체험적 이해를 모두 신비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므로 반드시 부정적인 측면만을 뜻하지 않는데, 교회사적으로도 신비주의는 역사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신비’(mystic)라는 단어의 어원은 눈이나 입을 닫는다는 뜻의 헬라어 mystiko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기독교에서는 이성적(理性的) 인식에 의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에 게 접촉하는 것을 의미한다. 굳이 이성적인 신학과 신비주의를 구별하자면, 신학은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이론을 말하지만, 신비주의는 개인적이며 체험적이고 주관적인 이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 신비주의는 보편적인 종교 관점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소위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신비주의라는 형태를 말하는데, 유치한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주관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형태로서 교회성장 방법으로 악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최근에 내적치유, 또는 영성운동을 가르치는 단체에서 어떤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장래 일을 예언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의 무속화를 시도하는데, 이러한 주장들이 상당히 보편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에 대한 능력을 더이상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분으로서 기적과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행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만일 더이상 기적이 없다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비주의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신비주의를 경계하여야만 할까?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오늘날 일부단체에서 행하여지는 신비주의는 첫째, 지도자나 목사를 신령한 존재나 초능력을 가진 존재, 소위 영성이 충만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며, 둘째, 교회를 오직 숫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셋째, 이러한 현상들이 소위 쓰러트림, 진동, 입신, 방언과 같은 은사남용주의와 같은 유치한 수준이고, 보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기적과 표적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령이 충만하면 짐승소리를 낸다거나, 술에 취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든지 소위 거룩한 웃음을 웃게 된다고 하거나, 성령이 지나간 자리에는 금가루가 나타난다는 주장 등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에 이러한 현상과 성령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성주의 신학자들은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두가지의 문제점이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기복주의이고 두번째는 신비주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가지 문제는 그러한 일이 절대로 없다고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악용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는 매우 신령하고 무언가 깊은 내적지식이 내포되어 있으며 성경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우리를 성경에서 벗어난 잘못된 영성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신비주의 영성은 로마 카톨릭에서부터 분리되어 출발한 종교개혁자들의 가장 근본적이며 중요한 원칙, “오직 성경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신비주의자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자신들을 고의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성경짜깁기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신비주의는 과연 무엇을 말할까?

1) 내가 필요하다고 요청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항상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신비주의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한다. 필자도 자신의 문제나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 기도를 한다. 성경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하지만, 필자도 나와 가정의 신상적인 문제와 장래적인 바램에 대해서 기도를 한다. 이것을 신비주의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비주의적인 기도의 한 예를 들어 보자면, 필자가 알고 있었던 어떤 사람은 자신이 운전을 하여 주차장에 들어갈 때마다 기도를 하면 주차할 곳이 곧 나타난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하나님이 어느 개인을 위하여 주차장에서 항상 빈 장소를 만들어 주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기도를 하여야만 하지만, 내가 사소한 문제까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기적을 베풀어 주시지는 않습니다. 농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짜장면을 먹어야할지 짬뽕을 먹어야 할지에 대해서 기도를 하고 그러한 소소한 응답까지 들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보자. 동일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두사람의 축구감독이 각자 기도를 하고 축구경기를 하였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위하여 승리를 하도록 하여 주시는가? 믿음이 더 큰 사람의 팀을 승리하게 하여 주시는가? 그렇다면 실제 경기에서는 기독교인만이 승리를 하고, 그 중에서도 믿음이 더욱 큰 사람만이 항상 승리를 하는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적은 구속사적인 섭리와 관계가 있다. 대부분 성경에서 보여진 기적과 이사는 개인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자녀들, 그리고 공동체에게 보여주기 위한 멧세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개인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공동체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사람이었다.

 

2) 기적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기적이 오늘날에는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자연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자주 일어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말한다. 자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어떻게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신비주의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놀라운 기적이 나에게 보편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거나, 혹은 성경에 극소수 예를 찾을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사건이 나에게 일상적으로나 보편적으로 항상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개인적인 간증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간증들은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며, 자신의 믿음이나 삶, 충성을 자랑하기 위하여 대중에게 간증이 표현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었다거나, 혹은 천국 지옥에 대한 간증등이 이러한 경우가 되는데, 이러한 간증은 거의 대부분 고의적인 목적으로 거짓말을 만들거나, 혹은 드물게 가사상태의 뇌의 착각이나 꿈과 같은 환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꿈과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일을 보여주시거나 예측하신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징조를 매우 중요시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기적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경에서 꿈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전하신 것은 성경에서 겨우 몇건에 지나지 않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음을 알아야만 한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성경을 무작위로 펼쳐서 손가락으로 어느 구절을 집으면, 그 구절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미리 알려준 것이라고 한다.

 

3) 신비주의는 개인적 체험을 가장 권위있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을 신에 대한 체험적 인식이라고 부르는데 기독교는 성경을 그 객관적인 신앙의 기준으로 보지만, 신비주의적인 체험은 성경보다 개인의 체험을 우선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성경에서 신비적인 현상은 항상 하나님의 특별한 멧세지가 포함되어 있는 반면에, 개인적인 신비주의는 자신과 신에 대한 특별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에 그 목적을 둔다.

성경에서 바울과 요한은 그 신비적인 체험을 감추거나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은 고후 12:6-12에서 3인칭을 사용하여 낙원에 대한 신비한 체험을 잠깐 말하지만 그 표현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사도요한은 그의 환상을 비유적으로 기록하며 그 계시록을 가감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다. 가장 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였던 예수님조차 요나의 기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며 표적을 보여달라는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비주의자들은 외부로 알리기 위하여 그러한 것을 악용한다. 개인의 체험을 진리적인 기준으로 제시하는데, 그들이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러한 현상이 성경적인 내용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는 매우 유치하고 단순한 행동을 기적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목사가 안수를 하면 그 성도는 쓰러지게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되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성도는 안수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쓰러지게 된다.

하루에 백번을 쓰러져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반면에 일년에 한번도 쓰러지지 않아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성경에서는 성령을 받음으로 쓰러진 경우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타종교나 무속주의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역사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에 빠지면 그는 건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하루 빨리 이러한 형태를 벗어나야만 한다. 이러한 무속적인 성향을 가진 목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우리나라 기독교의 비극이며 현실이다. 기록된 말씀에 충실한 믿음이 곧 반석에 세운 믿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신앙의 선진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1-2)

 

벤자민 워필드는 신비주의의 근본적인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비주의자들은 기록된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를 자신들의 종교적인 체험으로 대체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원천으로 삼는다. 혹 여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명백하게 계시된 말씀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하여 직접적이지 못하고 설득력이 없는 통로로 여기고 자신의 종교적인 체험을 더 우위에 둔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여야할 것이 있다.

기복적이며 순종과 헌신만을 가르치는 교회는 교인들이 아무런 느낌이나 체험도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교회에 출석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교회에서 어떤 기적이나 표적을 강조하는 신비주의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면 쉽게 미혹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비주의 영성은 형식적인 신앙과 달리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접촉을 강조하고 기적과 표적을 보여주게 되므로 에너지가 넘친다고 표현을 할 수 있다. 즉 영적으로 갈급함을 느끼던 사람들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쉽게 빠져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황과 마주하여도 결코 신비주의 영성을 우리의 신앙적인 기준으로 삼으면 안된다. 어떤 점에서는 신비주의 영성이 형식적인 신앙으로 잠들어 있는 교회를 깨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신비주의 영성은 결코 메마른 정통 기독교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피난처가 될 수 없다.

교회가 신비주의를 수용하는 것은 신앙적인 기준이나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갖고 있지 않으며, 결국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의 기독교 신앙을 스스로의 훈련과 행위의 인본주의적의 종교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지금 수많은 이단들의 교주들이 이러한 신비주의라는 도구를 악용하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신비주의에 대한 분별

 

1) 어떤 연습이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치거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다고 하며, 목사나 지도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고 주장하는 곳

 

2) 목사나 지도자가 개인의 장래에 대해서 예언, 계시를 하는 곳

 

3) 모든 질병과 사고, 불행, 가난등의 문제를 귀신 또는 악령때문이라고 하며, 귀신과 악령을 쫓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곳

 

4) 사고나 불행, 그리고 질병의 치유, 나쁜 예언과 계시를 피하기 위하여 무리한 헌금이나 비상식적인 봉사와 순종을 요구하는 곳

 

5) 성령이나 성령의 은사를 목사나 지도자의 안수로 전가(임파테이션) 받을 수 있다고 하거나, 방언등의 은사를 성령 임재의 외적증거라고 가르치고,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하는 은사남용주의

 

6) 대적 기도, 선포 기도, 호흡기도, 땅밟기 기도, 호흡 기도, 촛불 기도, 관상 기도, 명상 기도, 큰소리 기도, 주여 천번 기도등과 같은 비상식적인 기도와 이상한 기도를 장려하는 곳

 

7) 쓰러지고 넘어지며, 입신, 투시, 진동, 웃음, 짐승소리, 금가루, 금이빨등 현상적이며 유치하며 무질서한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곳

 

8) 성경적인 강해와 건전한 신학적인 가르침이 없으며, 그러한 것을 오히려 비판하거나 부정하며, 오직 눈에 보이고 나타나는 현상을 성령의 역사라고 강조하는 곳

 

9) 성경을 기록된 내용과 전혀 다른 비유와 상징(알레고리칼)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영적인 해석이며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가르치는 곳

 

10) 다니엘서와 계시록의 단어를 종말론적이며 자의적으로 비유하여 시한부종말론, 혹은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하는 곳, 예를 들면 666을 베리칩으로, 열뿔을 유럽연합으로, 짐승을 컴퓨터로, 적그리스도를 어느 정치가로 비유하거나, 어느 단체나 개인을 프리메이슨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