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강도의 구원

  • 8월 13, 2017

십자가 강도의 구원

 

                                                                                                             이인규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의 강도는 과연 구원을 받았는가? 그가 구원을 받았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신학적인 논란이 있다.

2341절에 대해서 다른 번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역성경]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공동번역]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표준새번역]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현대인의성경]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아도 싸지만

[KJV] And we indeed justly; for we receive the due reward of our deeds

[NIV] We are punished justly, for we are getting what our deeds deserve

 

우리는 십자가의 강도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은 로마로부터 십자가의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들이었다. 십자가의 강도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자기가 앞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도 없고, 말씀대로 순종한 적도 없었으며, 어떤 행함이나 회개의 열매를 보인 적도 없다.

단지 자신들이 받은 사형선고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올바른 실형 판결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을 뿐이며, 아울러 예수는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회개를 한 적은 없으며, 다만 자기가 사형선고를 받아야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였다.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라는 구절에서 정죄란 헬라어로 크리마로서 판결, 선고를 뜻하는 것으로서 동일한 사형선고를 받고서도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낙원을 약속받았을까?

 

[개역성경]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공동번역]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표준새번역]”예수님, 예수님께서 그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현대인의성경]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KJV] Jesus, Lord, remember me when thou comest into thy kingdom.

[NIV]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그것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었다.

 

(1) 예수께서 그 나라에 임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2)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나라임을 믿었다는 것은 곧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었다는 것과 같다.

(3) 그는 자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믿었다.

(4) 예수는 무죄함을 믿었다.

(5) 그는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며, 다만 자기 자신을 기억하여 달라고 예수께 특별한 은총을 부탁하였다.

 

예수님은 그 강도가 오늘 예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하셨다.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 강도가 예수님께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받은 것에 대해서 행위구원론을 주장하거나 율법적인 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곤혹스럽다. 십자가 강도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한 것도 아니고, 어떤 행위를 보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강도는 안식교와 같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내용도 전혀 없고, 하나님의 교회와 같이 유월절을 지킨 것도 아니다. 큰믿음교회(변승우)와 같이 회개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한 것도 아니다. 계시록을 알아야만 구원을 받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상한 비유풀이를 알아야만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어떤 교주를 알아야만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다. 또 구원파와 같이 내가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고 단정을 하여야만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소위 값싼 구원론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즉 평소에 불신자였다가 죽기 직전에 입으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구백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그런 멧세지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주장에 주로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마태복음 20장이다.

하루 데나리온의 품삯을 벌기 위하여 포도원에 들어간 품꾼들이 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들어간 품꾼들도 있었고 제 삼시에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으며, 제 육시와 구시에도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제 십일시에 품꾼으로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 모든 품꾼들은 일을 한 시간과 업무량에 비례하지 않고 모두 한 데나리온을 동일하게 받았다. 제십일시는 로마시간으로 오후 5시이며, 그는 1시간만을 일했을 뿐이다. 삼시와 육시와 구시는 유대인들이 시간을 구분하는 표준적인 방법이라고 말하는데, 제 십일시는 하루가 끝나기 직전을 뜻한다.

이것을 항의하는 먼저 온 사람들에게 포도원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구원은 그 사람의 믿음의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다는 놀랄만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분명한 멧세지는 구원이 믿음의 순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나중에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이 먼저 들어온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는 내용도 찾아 볼 수 없다.

본문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라는 것을 말하며, 마태복음 20:15에서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라는 내용이 그것을 뜻한다.

제 십일시에 포도원에서 들어온 사람과 죽음을 앞둔 십자가 강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은혜를 뜻하는 것이며, 물론 그것이 보편적인 구원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믿음의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그가 죽기 직전이라고 하여도, 만약 그의 믿음이 진실된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겠다고 한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피조물이며 피구원자인 인간은 자신의 뜻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감사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 구원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바로 제 십일시에 포도원으로 들어온 품꾼이며, 우리가 바로 불평을 하는 먼저들어온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바로 십자가의 강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구원은 성도들의 보상적인 행위와 수고가 아니라, 가능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주권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