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하는 죄 (성령훼방죄)

  • 8월 14, 2018

용서받지 못하는 죄(성령훼방죄)

             

이인규

   

J81.jpg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로부터 해방을 초래하였으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특별히 말하고 있다. 그것을 소위 성령훼방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12:31-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있느니라“( 3:28-29)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2:10)

    

혹간 몇 명의 청년들이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상담을 해온 적이 자주 있다. 자신은 전에 성령을 모욕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보니 성령훼방죄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청년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고민과 번민을 하게 되었고, 자주 필자에게 상담을 해왔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아야할 것 같았고, 전에도 성령휘방죄에 대해서 올렸던 글이 있는데 더욱 정리하고 보완하여 다시 올리게 되었다 

필자는 그 청년들에게 아래와 같이 답변을 하였다

   

이미 자신이 성령훼방죄가 아닐까 걱정하는 분이라면 그 자체로 벌써 성령훼방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훼방죄는 성령의 뜻을 알면서도 고의나 악의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훼방죄에 해당되는 죄는 회개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근심을 한다거나 양심에 찔림을 받아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거나, 고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즉 성령훼방죄가 아닙니다.”

  

훼방이란 말은 헬라어 블라스습헤미아로써 성경에서는 주로 참람, 훼방으로 번역하였다. 그 원래의 의미는 중상(특히 하나님에 대항하는), 참람(신적위엄을 손상시키는)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딤전1 13절에서 자신을 훼방자였다고 말하는데, 그 단어는 블라습헤모스라는 형용사로서 같은 어원을 갖는다 만일 전에 성령을 훼방한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사도바울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블리습헤모스)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3)

      

바울은 자신이 훼방자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나 지금 자신은 긍휼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고발하여 잡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잡혀간 그리스도인들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즉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에 성령을 훼방한 죄에 대해서는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의 딤전 1:13의 기록처럼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한 성령훼방죄는 해당되지 않는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잡아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며, 죄사함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블라스헵메오)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26:11)

      

윗 본문은 바울이 다메섹을 가기 이전, 즉 예수를 만나기 직전의 기록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형벌하였으며 잡아 가두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였고, 모독하다는 단어는 블라스헵메오로서 앞에서 언급한 단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동사이다.

즉 결론적으로, 성령훼방죄는 그리스도인이면서 고의와 악의로 성령을 참람하게 모욕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한때 이단이나 사이비집단에 속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철저하게 뉘우치고 회개한 사람은 더 이상 성령훼방죄에 속하지 않는다. 진실로 성령으로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죄라고 말할 수도 없다. 바울도 성령훼방과 모독죄를 범하던 때에는 유대교에 속하여 있었다.

     

즉 성령훼방죄는 단지 진리를 의심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는 자체를 말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회개를 거절하고, 양심과 성령의 조명을 고의와 악의로 거절하며 모독하는 경우를 말한다.

만일 누군가가 그러한 성령훼방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두려워하며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번민하며 기도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성령훼방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기독교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며, 현재의 상태인 믿음으로 구원을 확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 성령을 훼방했던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는데, 그가 기독교인이었다가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했다면 그는 과연 구원을 받느냐?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아다.

성경에 의하면, 자신이 현재에 믿음을 갖고 있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도 성령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욕되게 하는 자라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64-6절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지만, 사도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과연 무엇일까?

요한일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거짓그리스도,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미혹되지 말 것을 사도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일 3:10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나타남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고, 4 1-6절에서는 배교, 적그리스도, 거짓 교사에 대한 미혹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배교에 대한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과거에 믿음을 갖고 기독교에 몸을 담았다가 이단 혹은 사이비집단에 미혹된 사람은 배교이고 적그리스도, 거짓교사에 미혹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회개하여 주님에게 돌아온 사람은 성령훼방죄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과거에 교회를 다녔지만, 그 당시의 신앙이 확실한 성령의 조명 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가 이단에 미혹된 것은 알지 못하고 한 죄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단교회에 빠져서 예수를 모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고의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었다면(예를 들어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하였거나, 제대로 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 올바른 믿음을 갖고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성경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에 대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극단적인 예를 들면 돈이나 여자등 다른 목적을 위하여) 고의적인 목적을 갖고 이단으로 갔다면, 그리고 다시 회개하지 않았다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사실 성령훼방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벧전 4:3)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행락과 심지어 우상숭배를 한 것도 과거의 행한 것을 돌이킨다면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현재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그렇다면 히브리서 6 4-6절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6:4-6)

  

신자(信者)와 거듭난 자는 다르다. “성령이 내주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그 구원이 끝까지 보증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믿는 자“(信者)에게 있어서 믿음이 떨어지는 가능성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지 않을지라도, 구원의 소망을 가진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 위에 굳게 서야만 한다.

   

히브리서 64-6절은 상당히 난해한 구절로 간주되는데, 그 난해성에 대한 중요한 요점은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 배교를 함으로서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성령으로 인치심에 의하여 구원의 보증이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 실수로 이단집단에 미혹되었다가 다시 회개하여 돌아왔을 경우에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본문은 타락한 자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예수를 두 번 못박을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먼저 두 번째의 답변은 어렵지 않다.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를 한다는 자체가 다시 돌이킬 수 있다는 뜻이 되어진다. 히브리서1026-29절에는 유사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경우는 (1) 하나님 아들을 밟고, (2) 거룩하게 하는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3)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경우로서, 고의적인 훼방죄를 말한다. 즉 회개를 거부하며 고의적으로 욕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과연 히브리서 본문이 말하는 사람은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1) 성령체험을 한 그리스도인이 배교를 한 경우인가?

(2) 진실로 성령체험을 하지 못한 형식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가?

  

어찌 되었든 히브리서 본문은 어떤 행위로 인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는 보편적인 경우가 아닌 매우 드문 특별한 경우임에 분명하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믿음을 갖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 자들이라면, 왜 성경은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여한 바 되고라는 애매한 표현을 하였을까? 이러한 단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가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는 완전히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에게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무언가 미홉한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비침을 얻었다는 단어에 대해서 초대교회 교부들은 세례를 받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던 적도 있었는데, 현재도 Barclay, F.F.Bluce 같은 학자들은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헬라어 포티스텐타스라는 단어는 히10:32에서 사용되는데, 기독교의 입교 혹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다고 해석이 되어지므로 정확한 해석이 어렵다.

  

어쨌든 한번 비침을 얻었다는 표현에서 한번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하팍스인데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경우가 아니라 한번(once)”이라는 의미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한번 받아들였다거나, 예수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라는 조명을 한번 비침으로 국한시킨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맛보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규오마이인데, 이 단어는 먹다”(to eat)는 뜻도 있지만, “맛보다”(to taste)라는 뜻도 갖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상징적으로 선이나 악을 경험하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 즉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먹지는 않았지만 맛만 보는 그러한 개념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에 대해서 웨인그루뎀은 그의 조직신학 중권에서 이러한 성경적인 예를 들고 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27:34)

  

예수님은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맛만 보고 마시지 않았는데 이 단어가 바로 규오마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실제로 먹은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맛만을 보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맛보았다라는 단어는 경험을 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어질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로 해석이 된다면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라는 구절은 해석에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참예한 바 되고라는 단어는 어떠한가? 헬라어 메토코스는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고( 3:14), 아주 밀접한 관계가 아닌 단순한 경우를 의미하는 경우에도 사용된다는 것이다.

참여하다(partake)는 의미는 나누다, 분담하다, 함께 하다는 의미이지만, “동참자, 동료라는 단순적인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웨인그루뎀은 눅 5:7의 예를 들고 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 5:7)

  

다른 배에 있는 동무 메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개념은 다른 고깃배를 타는 어부 동료를 뜻한다는 것이다. 즉 같은 배를 타는 밀접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단순적인 의미의 동반 혹은 참여를 뜻한다는 것이다.

웨인그루뎀은 그 증거로서 엡 5:7-8을 예로 든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 5:7-8)

  

이 단어는 메토코스라는 단어에 syn(with)이 합성된 쉼메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에베소서의 교인들이 불신자와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더욱이 불신자가 되라는 뜻도 아니며, 단지 불신자에게 악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단순한 교류나 타협을 하지 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메토코스라는 단어는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동반의 개념을 갖는 참여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참예한 바 된다는 의미는 그들도 성령체험을 깊이 누렸다는 뜻보다는 성령체험을 하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 혹은 보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교회의 일에 함께 동참하였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예한 바 되고라는 의미는 그 배교자가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과 함께 그 현장을 체험하고 누리고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성령의 체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결론이 되어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구원의 경계선이 있다면, 그는 그 선 안에 들어온 사람은 아니며, 그 선을 밟고 있는 사람 또는 구원의 선에 막 미치지 못한 사람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사도로서 함께 참여하였던 가롯 유다와 같은 경우를 뜻한다고 보여진다. 그는 예수와 함께 생활을 하며 기적과 표적을 보고, 성령의 역사와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였지만, 성경에는 가롯 유다가 온전히 성령이 내주하여 거듭났다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즉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다고 해석이 될 수 있는경우는 매우 제한적이며한정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성령체험에 대한 시점의 다양한 해석문제일 뿐이다

즉 온전하게 구원을 받기로 하나님이 선택하여 성령을 보내주신 사람의 구원이 취소된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이러한 애매한 단어들의 선택은 그가 확실하고 완전하게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성령으로 거듭난 온전한 그리스도인에게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여한 바 되고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반면에 불신자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다시 새롭게 할 수 없고,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적용시킬 수도 없음에 우리는 동의하여야만 한다.

  

그리스도 밖에 있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dlY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뿌리와 연결되지 않는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으며 말라 죽게되므로 결국 꺾임을 당한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딤전 5:12)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 2:18)

 

분명  히 성경은 믿음을 버리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 간혹 미혹을 당하거나 믿음이 무너져서 이단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과거에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믿음을 버리고 적그리스도와 거짓교사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고의적으로 배교를 하는 자가 곧 성령훼방죄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0-22)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믿음을 잃고 배교함으로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 다만 위 베드로후서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라는 구절과 의의 도를 안 후에라는 구절의 의미가 어느 정도의 기독교인에게 해당되는가는 의문이다. 진정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며, 그 성령께서 구원을 보증하고 인도하는 사람의 경우는 구원의 취소가 있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10:27-29)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1:6)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3-24)

  

 

결론적으로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싶다.

  

 

1) 성령의 보증과 인도를 받는 확실히 구원받은 성도의 죄라고 말할 수 없다

2) 믿지 않을 때의 과거에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한 죄가 아니다

3) 고의적인 배교를 뜻한다.

4) 성령을 대상으로 한 죄이다

5)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이다